[돌봄의 재발견] 돌봄에서 발견하는 성장의 단서

선종헌 루트임팩트 DEI 이니셔티브 팀장

아이를 낳고 키우며 일상이 송두리째 바뀌었을 때, ‘이제 영원히 이렇게 사는 건가’ 하는 공포가 밀려오곤 했다. 하지만 숨통이 트이는 순간도 있었고, 작은 효능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때야 비로소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이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진리임을 체감했다. 돌봄의 무게가 잠시 옅어지고 ‘지나간다’는 감각을 얻었을 즈음, 다른 종류의 돌봄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쉽게 지나갈 기약이 없는 돌봄은 어떤 모습일까. 끝내 이별을 향하는 돌봄,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돌봄,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돌봄. 이런 돌봄을 해내는 사람들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치매와 노년 돌봄을 오래 연구한 이지은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에게 물었다.

◇ 매일 다른 날을 살아내는 힘

“돌보는 분들은 매일이 다르다고 말씀하세요. 돌보는 사람 자신이 변하고 자라면서, 어제가 아닌 오늘을 살아내고 있는 거죠.”

이지은 교수는 이를 ‘관계적 역량’이라 불렀다. 누군가를 돌보는 과정에서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 모두가 조금씩 넓어지고 깊어진다는 의미다. 내가 몰랐던 내 힘을 발견하고, 상대가 여전히 보여주는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 돌봄은 바로 그 상호작용 속에서 역량을 확장하는 일이다.

아이와 함께한 나의 경험도 그러했다. 젖니가 빠지던 순간, 레몬즙으로 비밀 편지를 쓰겠다며 호들갑을 떨던 날, 구구단 7단 때문에 괴로워하던 저녁. 나는 아이와 함께 내 어린 시절을 다시 살며, 그때 하지 못한 성장을 조금 더 했다.

그렇다고 가혹한 돌봄 현실 속에서 성장의 빛을 찾으라는 주문은 지나친 요구일 수 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발견하는 경험은 극히 일부에게만 허락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돌봄은 고립돼서는 안 된다. 돌봄 속에서 발견되는 크고 작은 순간들을 나누고, 서로 응원하며, 경험을 함께 배우는 사회적 장치가 필요하다.

◇ 돌봄, 사회적 지혜로 모이다

한국에자이가 기업·지역 공동체·시민·전문가와 함께 운영하는 ‘돌봄 리빙랩 네트워크’는 그런 장치의 사례다. 이 네트워크는 고단한 돌봄 과정을 지지할 뿐 아니라, 개별 경험을 사회적 자산으로 전환하는 통로 역할도 한다.

이지은 교수는 “사소한 발견의 기쁨들이 모여 거대한 매뉴얼이 된다”고 말했다. 돌봄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과제를 풀어갈 매뉴얼 역시, 돌보는 사람들이 남긴 작은 기쁨을 휘발되지 않게 하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그러므로 돌봄을 포용하려는 조직이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하다. 돌보는 직원들이 충분한 시간과 공간을 확보해 경험을 기록하고 나누게 하는 것, 서로 지지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돌봄을 포용하는 조직은 그렇게 구성원의 경험을 역량 자산으로 만들 수 있다.

나의 할머니는 수년간 치매를 앓다 서서히 가족과 이별했다. 긴 투병 끝에 가장 선명히 남은 장면은, 아버지가 숟가락으로 밥을 떠넣어 드리던 모습이다. 그 마음이 참담했을지 따뜻했을지는 여전히 묻지 못했다. 하지만 그 장면은 나를 조금 더 어른으로 만들었다. 자녀로서 아버지가 떠먹여 주던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성인이 되어 목격한 아버지의 돌봄은 분명 나의 성장에 이바지했다.

이별을 향한 돌봄, 지나가 버린 돌봄이었지만 그 자리에는 희미하게라도 성장의 단서가 남았다. 우리 사회 곳곳의 돌봄 역시 그런 단서들을 품고 있다. 사회와 조직이 이 단서들을 존중하고 연결할 때, 돌봄 문제를 풀어갈 지혜가 만들어질 것이다.

선종헌 루트임팩트 DEI 이니셔티브 팀장

※ 참고
– 6회에 걸친 기고문에 담긴 메시지는 오는 18일 오후 2시 성수동 헤이그라운드에서 열리는 체인지메이커 컨퍼런스 <길어진 삶, 넓어진 돌봄 ─ 남성 돌봄에서 시작하는 돌봄 포용 실험>에 담긴다.
이지은, 관계적 역량 확장의 실천으로서의 돌봄. 한국여성학 제41권 2호 (2025년) pp.35∼69
– DEI Lab 웨비나 “기업이 만드는 돌봄 혁신과 포용적인 사회”

루트임팩트의 <돌봄의 재발견>

‘포용’이라는 말은 낯설지 않지만, 많은 조직들이 여전히 이를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포용적인 조직이란 결국 ‘돌볼 줄 아는 조직’이라고 믿습니다. 루트임팩트는 돌봄이 더 이상 개인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조직이 함께 책임져야 할 과제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돌봄은 너그럽고 여유로운 조직의 선택이 아니라, 국제사회가 주목하는 필수 전략이자 미래를 위한 투자입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독자들은 ‘돌봄’을 자신과 조직의 일로 다시 생각해보고, 포용적 조직을 위한 돌봄의 범위와 정의, 그리고 그 실천을 위해 누구의 어떤 역할이 필요한지 함께 고민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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