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은 즐기고, 배는 마신다…‘요즘 로컬’의 방식 

애그테크, 농업의 미래를 짓다<4> 
기술과 디자인으로 ‘농식품 스타트업’ 새 모델 개척하는 귤메달·랩투보틀 

한때 농업은 ‘생산’의 영역으로만 불렸다. 그러나 지금, 지역의 농산물은 디자인과 기술을 만나 새로운 문화로 진화하고 있다. ‘로컬’이라는 단어가 단순한 지리적 개념이 아닌, 브랜드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젊은 창업가들은 땅에서 나는 재료로 실험을 거듭하며, 농업을 ‘산업’을 넘어 ‘경험’의 언어로 바꾸고 있다.

◇ 귤메달, 시트러스에 ‘취향’을 입히다

제주의 감귤 농장에서 출발한 ‘귤메달(GYULMEDAL)’은 감귤을 단순한 농산물이 아닌 ‘취향 콘텐츠’로 바꾼 스타트업이다. 창업자 양제현 대표는 조부 때부터 3대째 이어온 농장을 이어받아, 감귤을 포함한 20여 종의 시트러스를 직접 유통하며 착즙주스 등으로 확장했다. 그는 “‘Happy Moment With Citrus’라는 브랜드 미션처럼, 귤로부터 시작되는 즐거운 순간을 디자인하고 싶다”고 말했다.

귤메달의 혁신은 ‘생산자 중심’이 아닌 ‘고객 중심’의 전환에서 비롯됐다. 소비자들이 수십 종의 귤 중 취향을 고르기 어렵다는 점에 착안해, 당도·산미·바디감 3가지 요소로 귤을 분류한 ‘테이스트 노트(Taste Note)’ 시스템을 도입했다. 현재 귤메달이 판매하는 모든 시트러스에는 이 세 가지 요소가 단계별로 표시돼 있다.

이후 ‘귤 MBTI 테스트’ 등 놀이형 콘텐츠를 통해 소비자 참여를 유도했다. 당도·식감 등 질문에 답하면 맞춤형 귤을 추천받는 방식으로, 도입 후 자사몰의 평균 체류 시간이 3배 이상 늘었다. 양 대표는 “이 데이터는 향후 품종 선호도 분석과 농가 유통 전략 수립에도 활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고객 중심 브랜딩은 디자인 혁신으로 이어졌다. 계절별 시트러스 4종을 담은 ‘귤 취향 분석 샘플러 키트’는 2024년 독일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RED DOT Design Award)’ 본상을 수상했다. 귤메달은 현대백화점·더현대서울 등 주요 백화점에서 팝업스토어를 열며 오프라인 브랜드 경험도 확장 중이다. 최근에는 농협중앙회 ‘엔하베스트 엑스(NHarvest X)’ 프로그램을 통해 하나로마트 양재점에서 착즙주스 팝업을 진행했으며, 유니클로 제주점과 협업해 귤메달 티셔츠를 한정 판매하는 등 IP 비즈니스 모델도 구축했다.

올해 11월에는 농가 상생 플랫폼 ‘시트러스 클럽(Citrus Club)’을 출범했다. 600여 농가의 재배·출하 정보를 시각화해 공급 과잉과 폐기율을 줄이는 데이터 허브다. “누가 언제, 어떤 품종을 재배하는지 알 수 있다면 폐기를 줄이고 소득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어 “농가 데이터의 양성화를 통해 최적의 유통 채널 연결, 컨설팅, 그리고 미수매 폐기율을 줄이는 허브가 되어 지속가능한 농업에 기여하는 것이 목표”라고 전했다.  

◇ 랩투보틀, 천안 배로 ‘K-로컬’ 양조를 실험하다

충남 천안에서는 또 다른 로컬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 KAIST 출신 공학도 이동헌 대표가 2022년 설립한 ‘랩투보틀(Lab to Bottle)’은 천안의 특산물인 ‘성환 배’를 원료로 오크 숙성 증류주 ‘피어펙트(Pearfect)’를 개발했다. 이 대표는 프랑스 유학 시절 유럽의 다양한 과일 증류주를 접하면서 “왜 한국에는 배로 만든 술이 없을까?”라는 의문을 품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피어펙트는 한 병(500㎖)에 배 여섯 개가 들어가는 고급 증류주로, 28도부터 40도까지 다양한 도수로 출시된다. 천안 지역 농가와 천안배원예농협 등을 통해 배를 공급받고, 세척·착즙·발효·증류·숙성·병입까지 모든 공정을 천안의 자체 양조장에서 수행한다.

이 술은 국제 식품 품질 평가 기관 ‘몽드 셀렉션(Monde Selection)’에서 올해 대상과 심사위원상을 동시에 받았고, ‘영국 국제 위스키 품평회(IWSC)’, ‘싱가포르 SWSC’ 등 세계 주요 주류대회에서 잇달아 수상했다.

핵심은 자체 개발한 ‘액티브 에이징(Active Aging)’ 기술이다. 오크통 내 화학 반응을 가속화해 단 1개월 만에 4년 숙성 위스키 수준의 풍미를 구현하는 숙성 시스템이다. 그는 “기술이 로컬의 시간을 단축시키면서도 품질은 유지시킨다”며 “이것이 우리가 제안하는 새로운 ‘농업의 기술화’”라고 했다.

브랜딩에서도 세심함이 엿보인다. ‘Pearfect’는 ‘배(Pear)’와 ‘완벽(Perfect)’의 결합어로, 로고에는 대나무와 배 잎을 형상화해 한국적 정체성을 담았다. 이 디자인으로 ‘IF 디자인 어워드’와 ‘아시아 디자인 프라이즈’에서 수상했다.

로컬의 실험은 이제 국경을 넘고 있다. ‘피어펙트’는 지난 6월 열린 제1회 한-과테말라 비즈니스 포럼 공식 건배주로 선정됐고, 과테말라·몽골 등으로 수출되며 글로벌 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랩투보틀은 농협중앙회와 소풍커넥트가 운영하는 ‘엔하베스트 엑스(NHarvest X)’ 프로그램에 참여해, 쌀을 원료로 한 프리미엄 증류주 개발에도 나설 예정이다.

이 대표는 “랩투보틀을 단순한 양조기업이 아니라, 지역 농산물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문화기업으로 키우겠다”고 말했다.

조유현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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