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팩트의 좌표] 사회서비스 혁신 스타트업은 누가 돌볼 것인가

이순열 한국사회투자 대표

추석 연휴에 오랜만에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늘 건너던 다리의 풍경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난간 위로 높게 세워진 철제 구조물은 장식이 아니라 자살 방지용 안전 펜스였습니다. OECD 자살률 1위를 20년째 이어가고 있는 현실이, 그렇게 일상 속 풍경으로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초, 그 문제를 기술로 풀어보려던 한 스타트업이 조용히 문을 닫았습니다. AI와 심리치료 이론을 결합한 디지털 멘탈 테라피 플랫폼을 개발하던 팀이었습니다. 데이터 기반으로 우울과 불안을 조기에 감지하고 회복을 돕는 시스템이었지만, 마지막 시리즈 투자 유치에 실패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서비스’는 오랫동안 ‘돌봄’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돼 왔습니다. 그러나 법적 정의는 훨씬 넓습니다. 사회서비스는 복지·보건의료·교육·고용·주거·문화·환경 등 전 영역에서 상담, 재활, 정보제공, 역량개발 등을 통해 삶의 질을 높이는 제도입니다. 즉, 복지의 세부사업이 아니라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사회 인프라입니다.

정신건강, 장애인 재활, 청년의 사회복귀, 주거 취약계층의 자립, 시니어의 일자리와 디지털 접근성, 교육격차 해소까지, 이 모든 영역이 사회서비스의 스펙트럼 안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의 시선은 여전히 ‘대면 돌봄 서비스’에 머물러 있습니다.

◇ “복지부는 돌봄, 창업은 중기부”라는 경계가 만든 사각지대

이 구조적 한계는 부처 간 역할 구분의 경직성에서 비롯됩니다. 보건복지부는 바우처와 복지시설 중심의 사회서비스를 담당하고, 창업 초기 기업 지원은 중소벤처기업부의 영역이라는 암묵적 원칙이 작동합니다. 복지부는 ‘현장 돌봄’ 중심으로, 중기부는 ‘시장성’ 중심으로 지원체계를 설계합니다. 결국 두 부처 사이에서 사회서비스 혁신 스타트업들은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입니다.

예를 들어 복지부의 스마트 사회서비스 시범사업은 AI·로봇 등 기술을 결합한 복지서비스 실증을 목표로 하지만, 실제 선정 기업은 대부분 노인·아동·요양시설 중심의 돌봄기업입니다. 반면 중기부의 창업지원사업은 시장성과 수익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사회적 성과 중심의 기업들은 투자 우선순위에서 밀립니다. 정부의 두 부처가 서로 다른 ‘언어’로 혁신을 정의하는 사이, 현장에서 삶의 문제를 기술로 해결하려는 창업자들은 공공도, 시장도 아닌 공간에서 버티고 있습니다.

보건복지부가 조성한 사회서비스 투자펀드는 의미 있는 시도입니다. 그러나 운용지침에는 “노인·장애인 등 돌봄 관련 기업에 약정총액의 20% 이상 투자”라는 조항이 있습니다. 사회서비스 혁신의 초점을 여전히 돌봄에만 맞춘 셈입니다.

그 사이 정신건강, 디지털 재활, 청년 고립 문제, 장애인의 자립 기술 등 새로운 사회서비스 분야는 제도적 문턱 밖에 머물고 있습니다. 사회서비스의 본질은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복원하는 일입니다. 주거, 고용, 교육, 건강, 관계망—이 모두가 서비스의 재료이자 혁신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이 다양성을 반영하지 못하는 정책 구조에서는 사회서비스가 하나의 산업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사회서비스 혁신기업은 시장 논리로 보면 비효율적입니다. 수혜자와 지불자가 다르고, 공공제도와 연계되지 않으면 수익 구조가 불안정합니다. 그러나 그 느린 속도 안에는 사회문제를 지속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구조적 혁신이 숨어 있습니다. 디지털 멘탈 테라피를 통해 심리치료의 접근성을 높이고, 실시간 청각장애인 통역 AI 서비스로 누구나 소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며, 몇 달씩 기다려야 했던 재활훈련을 스마트 디바이스 하나로 집에서도 지속할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사회서비스 혁신기업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기술’입니다.

‘돌봄의 산업화’가 아닌 ‘삶의 혁신 산업화’로

이런 기업들은 지금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기부의 성장 로직에서도, 복지부의 서비스 로직에서도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사회서비스를 복지 예산의 세부 항목으로 보는 관점을 벗어나, 하나의 사회 인프라 산업으로 재정의하는 일입니다. 사회서비스 혁신기업은 복지의 수혜자가 아니라 복지 체계를 재설계하는 혁신의 주체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복지부와 중기부 간 공동정책 협력체계 구축 ▲사회서비스 펀드 내 비(非)돌봄 분야 전용 트랙 신설 ▲사회서비스 실증사업과 창업지원의 연계 평가체계 마련이 필요합니다. 임팩트 자본은 이 구조를 메워줄 수 있습니다. 단기 수익 대신 장기 사회성과를 보상하는 금융 구조—그것이 사회서비스 혁신이 살아남을 유일한 길입니다.

결국 사회서비스는 더 이상 복지의 하위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과 몸, 관계와 일, 주거와 배움을 하나의 생태계로 엮는 ‘삶의 산업’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의 문제는 사회서비스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 서비스를 새롭게 설계하려는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정부는 부처 간 경계를 넘어야 하고, 민간 임팩트 자본은 장기 리스크를 감수해야 합니다. 사회서비스 혁신기업이 자본과 제도의 틈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복지를 넘어, 삶 전체를 설계하는 산업으로—사회서비스를 다시 정의하는 일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다음 10년을 바꾸는 진짜 혁신이 될 것입니다.

이순열 한국사회투자 대표

한국사회투자의 <임팩트의 좌표>

‘임팩트 투자’라는 개념이 한국 사회에 공식적으로 도입된 지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단순히 자본을 임팩트 기업에 전달하는 것을 넘어, 우리는 과연 ‘진짜 임팩트’를 만들어내고 있을까요? 임팩트 투자가 일반적인 벤처 투자와 구별되는 지점은 무엇이며, 자본의 출처는 어떤 철학을 담고 있고, 그 자본은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게, 어떤 시선으로 도달하고 있을까요? 이제는 ‘임팩트’라는 단어의 무게에 걸맞은 실천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냉정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임팩트의 좌표> 시리즈는 한국 임팩트 투자의 현재 위치와 그 좌표계를 진단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경로를 함께 모색합니다. 기술, 환경, 사회서비스, 농식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험되고 있는 임팩트 자본의 흐름을 추적하며, ‘임팩트’라는 단어가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라, 전이 가능한 사회적 변화의 수단으로 자리 잡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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