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푸드’의 세계적 인기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분명합니다. 미국 대형마트의 선반 한 줄을 한국 식품이 차지하고, 동남아에서는 한국식 양념과 발효식품이 일상 소비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거대한 흐름이 실제 농식품 기업, 특히 지역 기업들의 성장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분위기는 달라집니다.
농림축산식품부 자료에 따르면 2023년 농식품 수출액은 96억 달러로 최근 5년간 연평균 7%대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관세청 통계는 다른 현실을 보여줍니다. 전국 5만여 개 식품 제조업체 중 지속적으로 수출을 이어가는 기업은 2%대에 불과합니다. 즉, 세계의 수요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 수요를 지역 기업이 실제 성장으로 전환하지 못하는 구조적 단절이 존재합니다.
◇ 지역 산업의 강점과 글로벌 연결의 부재
한국의 농식품 기업들은 대부분 지역에서 시작되어 지역에서 사업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지역성은 제품의 이야기, 원료의 우수성, 전통 기술 등 뚜렷한 강점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글로벌 시장의 기준과 연결되는 순간 그 강점이 제약으로 전환되기도 합니다.
전남의 전통 장류 기업은 맛과 기술로 해외 구매자의 관심을 끌지만, FDA·EU 기준에 맞춘 설비와 안전성 체계를 갖추기 어렵습니다. 강원의 간편식 기업들은 지역 농산물 기반의 제품력은 높지만, 생산 확장과 해외 규제 대응이 요구하는 자본과 인력이 부족합니다. 제주의 기능성 식품 기업들은 꾸준한 해외 관심에도 불구하고 섬 지역의 물류비용과 계절성 생산 구조라는 구조적 제약을 넘기 어렵습니다.
지원은 존재하지만 대체로 ‘점’으로 흩어져 있어, 해외 시장까지 이어지는 ‘선’과 ‘면’이 비어 있는 성장 경로를 제공하지 못합니다. 이 문제를 구조적으로 보면 더 명확합니다. 전방(생산·기술 기반)에서는 스마트팜·품종개량 등 혁신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후방(가공·유통·글로벌 수요)에서는 K-푸드 열풍이 확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흐름이 정작 지역 기업에서 만나지 못하는, 즉 연결 구조가 부재한 산업이라는 현실이 본질적 문제입니다.
◇ 지역과 지속가능성을 잇는 투자 모델이 필요하다
K-푸드의 글로벌 모멘텀을 지역 기업의 성장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개별기업에 대한 단순한 수출 지원이 아닌 글로벌 시장에서 사업이 가능케 하는 통합적 지원이 필요합니다. 이는 특정 방식의 정책이나 단일 형태의 지원을 뜻하지 않습니다.
첫째, 지역 기업이 글로벌 기준을 함께 충족할 수 있도록 하는 ‘기준 인프라’가 필요합니다. 안전성·표준화·지속가능성·인증 등 해외 진입의 필수 요소는 지역 단위에서 공동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둘째, 지역 단위의 공동 생산·가공·물류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개별 기업이 아니라 지역 전체가 하나의 공급 단위처럼 움직여야 글로벌 시장의 ‘안정적 공급’ 요구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셋째, 지역 단위의 시장 접근과 장기적 해외 네트워크가 필요합니다. 일회성 전시·홍보 중심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파트너십과 유통 구조가 뒷받침돼야 합니다.
이 세 가지는 ‘정책’의 영역일 수도 있고, ‘민간 투자’의 영역일 수도 있으며, ‘임팩트 투자’의 영역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조건들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본이 단순한 수익 추구형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지역의 지속가능성과 산업의 연결성을 고려하는 자본, 바로 이러한 성격의 투자가 지역 농식품 산업을 글로벌 가치사슬로 연결하는 핵심 축이 될 수 있습니다.
지역 기업은 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강력한 원료, 기술, 이야기가 지역에서 시작됩니다. 부족한 것은 이 강점이 세계까지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길의 설계입니다. 전방의 생산 혁신과 후방의 글로벌 수요, 그리고 그 사이에 서 있는 지역 기업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지속가능한 연결 구조. 그 구조를 설계하는 데 필요한 자본이 바로 ‘지역과 지속가능성을 연결하는 투자 모델’입니다. 이 길이 만들어지는 순간, 한국 농식품 산업은 지역에서 시작해 세계로 이어지는 완전한 가치사슬을 갖춘 산업으로 도약할 것입니다.
이순열 한국사회투자 대표
| 한국사회투자의 <임팩트의 좌표> ‘임팩트 투자’라는 개념이 한국 사회에 공식적으로 도입된 지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단순히 자본을 임팩트 기업에 전달하는 것을 넘어, 우리는 과연 ‘진짜 임팩트’를 만들어내고 있을까요? 임팩트 투자가 일반적인 벤처 투자와 구별되는 지점은 무엇이며, 자본의 출처는 어떤 철학을 담고 있고, 그 자본은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게, 어떤 시선으로 도달하고 있을까요? 이제는 ‘임팩트’라는 단어의 무게에 걸맞은 실천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냉정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임팩트의 좌표> 시리즈는 한국 임팩트 투자의 현재 위치와 그 좌표계를 진단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경로를 함께 모색합니다. 기술, 환경, 사회서비스, 농식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험되고 있는 임팩트 자본의 흐름을 추적하며, ‘임팩트’라는 단어가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라, 전이 가능한 사회적 변화의 수단으로 자리 잡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