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재발견] 밥은 밥솥이 하지만, 돌봄은 머리가 한다

선종헌 루트임팩트 DEI 이니셔티브 팀장

그날도 머리를 너무 덜 쓴 게 문제였다.

평소보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이던 13개월 아이를 두고 출근한 날이었다. 절대 빠질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미팅을 마치고 나서야 아이의 열이 높아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급히 동네 소아청소년과로 향했다. 북새통인 대기실에서 울며 보채는 아이를 안고 한 시간 넘게 기다리는 동안, 아이는 결국 열경기를 일으켰다. 공포에 휩싸인 그 순간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아이를 겨우 안정시킨 뒤에서야, 병원에 오기 전 해열제를 먹였어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그날의 모든 결정이 안일했다. 미팅이 정말 중요했을까. 조금 멀더라도 더 한산한 병원을 찾아갔어야 하지 않았을까. 친정엄마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는데. 돌봄이란 거창한 단일 결정이 아니라, 크고 작은 판단의 연속이다. 그 긴장이 풀리는 순간 후회는 언제든 찾아온다. ‘머리를 덜 썼다’는 자책은 육체적 피로보다 오래 남는다.

◇ 밥보다 힘든 건, 머리로 하는 돌봄

돌봄을 단순한 신체 노동으로만 인식한다면, “밥은 밥솥이 하지 않느냐”는 말도 완전히 틀린 얘기는 아니다. 문제는 돌봄 노동자의 머릿속이다. 냉장고에 어떤 식재료가 있는지, 누가 무엇을 먹고 싶어하는지, 언제 장을 볼 수 있을지, 식사 시간을 어떻게 조율할지, 업무 스케줄과 식사 준비를 동시에 고려하며 움직이는 ‘인지적 노동’이야말로 돌봄의 본질이다.

조직과 사회는 돌봄의 복잡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루트임팩트는 이 복잡한 머릿속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정량 지표나 단편적 현상 이면에 있는 돌봄의 서사를 파악하고, 돌봄이 우리의 심리와 정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분석하기 위해 연구자들과 함께 다양한 협력 연구를 진행했다. 특히 직장생활과 육아를 병행하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돌봄의 심리적 부담을 조명하고자 했다.

◇ ‘양육 죄책감’이라는 심리적 비용

임혜빈 광운대 산업심리학과 교수와 이수란 서울사이버대 군경상담심리학과 교수의 연구는 공통적으로 ‘양육 죄책감’을 중심 주제로 삼는다. 이는 부모가 이상적인 양육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느끼는 내적 평가이며, 육아 방식과 무관하게 거의 모든 부모에게 나타난다. 특히 워킹맘의 경우 업무 환경이 고강도일수록 그 죄책감이 심화되고, 이는 경력 몰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임혜빈 교수는 사회가 요구하는 ‘슈퍼맘’의 이미지가 워킹맘에게 과도한 심리적 부담을 준다고 지적한다. 육아에 대한 정답은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쏟아지고, 이들은 대개 어머니의 언행에 대한 기준을 높인다. 임 교수는 ‘알파걸’에 이어 ‘슈퍼맘’을 그리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워킹맘의 양육 죄책감에 일조한다고 설명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다들 어느 정도의 죄책감을 견뎌내며 이 시대의 부모로서 살아가고 있다.

이수란 교수는 ‘부모 소명’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 문제를 들여다봤다. 부모 소명이란 양육을 단순한 돌봄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으로 인식하는 태도다. 이 소명이 높은 워킹맘일수록, 자녀와 보내는 시간이 부족해도 죄책감은 덜하다. 이 교수는 이를 ‘전략적 사고방식’이라고 부른다. 단기적인 시간 배분이 아닌, 장기적인 삶의 균형과 의미를 고려한 판단이라는 것이다.

임 교수는 또 하나의 주목할 개념으로 ‘자원 관리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는 돌봄과 업무를 병행하는 가운데, 필요한 자원을 제때 동원할 수 있다는 믿음을 뜻한다. 예컨대, 갑작스러운 상황이 생겨도 도움을 줄 사람이나 시스템이 있다고 믿는 것만으로도, 인지적 부담은 줄어든다. 이는 곧 정신적 피로 완화로 이어지고, 결과적으로 워킹맘의 경력 몰입도 향상시킨다.

재택근무가 되는데 왜 육아휴직을 하느냐는 말은 돌봄을 물리적 시간만의 문제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나온다. 그러나 돌봄은 시간을 넘어 ‘머리 공간’을 점유한다. 돌봄의 핵심은 인지적, 정서적 긴장의 연속이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 돌봄의 가치, ‘인지적 노동’에서 ‘사회적 자산’으로

이제는 돌봄을 더 이상 ‘단절’과 ‘희생’의 서사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루트임팩트는 이번 연구를 통해 돌봄이 요구하는 인지적 노동, 정서적 부담을 사회가 제대로 이해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다.

돌봄을 통해 축적되는 조정 능력, 시간 관리력, 복잡한 변수에 대응하는 문제 해결 능력은 충분히 ‘사회적 자산’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한, 돌봄은 언제까지나 여성 개인의 몫으로만 남게 된다.

워킹맘들이 느끼는 인지적 피로를 줄이기 위해서는 그들이 계획한 일이 현실에서도 실행될 수 있다는 믿음, 즉 ‘자원 동원 효능감’이 중요하다. 돌봄을 ‘긴 호흡의 여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일과 가정 사이에서 겪는 갈등 역시 수월하게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보였다. 우리 조직과 사회가 돌봄의 인지적 노동을 개인의 사적 고민이 아닌 존중받아야 할 사회적 책임으로 재인식함으로써, 그 피로감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선종헌 루트임팩트 DEI 이니셔티브 팀장

※ 참고
– 직장과 가정에서의 자원 관리 가능성 여부가 워킹맘의 경력 몰입에 미치는 영향, 임혜빈 (광운대학교 산업심리학과)
– Greedy work 환경이 이공계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 부모소명의 조절효과, 이수란&김성두 (서울사이버대학교 군경상담학과)

루트임팩트의 <돌봄의 재발견>

‘포용’이라는 말은 낯설지 않지만, 많은 조직들이 여전히 이를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포용적인 조직이란 결국 ‘돌볼 줄 아는 조직’이라고 믿습니다. 루트임팩트는 돌봄이 더 이상 개인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조직이 함께 책임져야 할 과제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돌봄은 너그럽고 여유로운 조직의 선택이 아니라, 국제사회가 주목하는 필수 전략이자 미래를 위한 투자입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독자들은 ‘돌봄’을 자신과 조직의 일로 다시 생각해보고, 포용적 조직을 위한 돌봄의 범위와 정의, 그리고 그 실천을 위해 누구의 어떤 역할이 필요한지 함께 고민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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