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재발견] 돌봄, 멈출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선종헌 루트임팩트 DEI 이니셔티브 팀장

2018년생 아이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식은 조용하고 단출했다. 백 명 남짓한 아이들과 가족들이 모여 치른 짧은 환영 행사였다. 운동장이 가득 차도록 어린이들이 모였고,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마이크를 타고 메아리치던 ‘국민학교’ 시절을 기억하는 내게는 낯선 풍경이었다. 전국 초등학교 입학생 수가 역대 최저를 기록한 올해, 폐교가 결정된 학교만 49곳에 이른다고 한다.

아이 수가 줄면 오히려 더 나은 교육 환경이 펼쳐질 줄 알았다. 작은 교실에서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 우리 세대보다 더 행복해질 것이라 기대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 아동·청소년의 행복지수는 여전히 OECD 최하위권이다. 교사들의 직업 만족도는 중간 수준에 머물고 있다. 2024년 기준 사교육비 총액은 39조 원. 역대 최고치다. 아이들은 줄었는데, 현장은 왜 더 힘들어졌을까. 우리는 지금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

◇ ‘돌봄’의 정의부터 다시

전문가들은 초저출산의 주된 원인으로 ‘돌봄 공백’을 지목한다. 특히 여성의 경력단절 문제는 반복적으로 지적돼 왔다. 정부는 ‘빈틈없는 돌봄’을 표방하며 각종 정책을 확대 중이다. 육아휴직 기간과 급여는 꾸준히 늘었고, 배우자 출산휴가 의무화, 가족돌봄휴가 도입 등 일·가정 양립 지원도 강화됐다. 2025년부터는 ‘늘봄학교’가 본격화됐다. 이제는 아동 돌봄을 넘어 노인, 일상 돌봄까지 정책의 외연이 넓어지고 있다.

하나금융그룹이 후원한 상생형 직장어린이집 ‘모두의숲’ 전경. /루트임팩트

사단법인 루트임팩트도 이 과제에 발맞춰 움직여왔다. 2017년에는 샤넬재단과 함께 ‘임팩트 커리어 W’를, 2020년에는 하나금융그룹과 함께 상생형 직장어린이집 ‘모두의숲’을 시작했다. ‘임팩트 커리어 W’는 육아로 유급노동시장을 떠났던 여성들이 다시 경력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이다. 2024년까지 97명이 수료했고, 이 중 60%는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했다.

‘모두의숲’은 직장어린이집을 독립적으로 운영하기 어려운 소규모 임팩트 지향 조직 구성원들을 위한 대안이다. 하나금융그룹 임직원 자녀뿐 아니라, 소셜벤처·비영리 스타트업 등 35개 조직의 구성원 자녀들이 함께 이용한다.

처음엔 돌봄을 단순히 ‘복귀를 위한 지원’으로 이해했다. 여성의 역량을 키우고, 믿고 맡길 장소만 마련되면 일이 이어질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7~8년에 걸친 현장 경험은 우리의 가정을 바꾸어놓았다. 돌봄은 단순한 과업이 아니라, 긴 여정이었다. 타인을 돌보는 일은 단 몇 가지 대책이나 인프라로 해결되지 않았다. 우리는 돌봄이 얼마나 복잡하고, 인지적 에너지를 요구하며, 생애주기 전반에 걸쳐 이어지는 과제인지 비로소 깨닫게 됐다. 현장에서 만난 수많은 이들의 고충은 그 사실을 여실히 보여줬다.

성수 소셜벤처밸리-공동직장 어린이집 ‘모두의숲’ 풀잎반 아이들과 선생님의 모습. /루트임팩트

유연근무제에 직장어린이집까지 갖춘 ‘가족친화적’ 조직에서 일하지만, 2월은 버거웠다.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챙길 것이 너무 많았다. 입학식, 준비물, 신청서… 마음은 늘 앞서고, 몸은 지쳤다. 돌봄교실, 방과후교실, 늘봄교실. 이름은 비슷하지만 운영방식과 신청 방법은 제각각이다. 하나라도 놓칠까 봐 ‘e알리미’를 수시로 확인하고, 신규 학원 상담 과정에서는 묘한 압박감마저 느껴졌다. 입학을 앞두고 긴장한 아이의 표정 변화 하나하나에 신경이 곤두섰고, 내 일은 뒷전이 됐다. 3월 초 업무 일정조차 자신 있게 잡을 수 없었다.

이런 내면의 고군분투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누군가는 ‘예민하다’고, ‘극성스럽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약 내가 고뇌 끝에 직장을 그만두었다면, 통계에는 ‘여성 경력단절 1건’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그 숫자 뒤에 숨은 복잡한 현실과 인지적 부담은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다.

돌봄의 진짜 얼굴은 개인의 일상 속에 숨어 있다. 그래서 더 드러나지 않고, 더 설명하기 어렵다. 돌봄을 숫자로만 판단할 수 없는 이유다. 국제사회가 ‘돌봄 통계 너머의 이야기들’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그래서다.

◇ 통계 뒤에 숨어 있는 돌봄의 얼굴

작년 가을, UN Women이 주관한 ‘2024 아시아·퍼시픽 케어 포럼’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아시아 각국에서 모인 참석자들은 입을 모아 외쳤다. 돌봄은 단지 가정 내 누군가의 몫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나서야 할 과제라는 것이다. 돌봄은 전 세계 고용의 11.5%, GDP의 8.7%를 차지하는 거대한 경제 영역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허드렛일’로 여겨지고 있다. 국제사회는 이제 그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제안은 ‘숫자 너머의 이야기’였다. 통계로는 설명되지 않는, 개인의 서사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전파하자는 목소리였다. 생애주기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돌봄은 물리적 수치나 제도로만 설명될 수 없다는 점에 깊이 공감했다. 지난 2월, 나의 고군분투 역시 통계 한 줄로 정리될 뻔했다. 출산 포기 1건, 혹은 경력단절 1건.

이 같은 흐름에 발맞춰, 루트임팩트도 새로운 시도를 시작한다. ‘임팩트 커리어 W’와 ‘모두의숲’을 운영하며 만나온 수많은 돌봄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숫자 뒤에 숨은 복잡한 현실을 조명할 계획이다. 돌봄의 정성적 측면, 그리고 그것이 요구하는 인지적 부담과 감정 노동을 다시 들여다볼 것이다.

초고령 사회를 앞두고 있는 지금, 기업들이 살펴야 할 돌봄 책임의 범위도 넓어지고 있다. 가족 구성과 생애 주기에 따라 변화하는 다양한 돌봄 니즈를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조명할 예정이다. 돌봄의 복잡성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조직으로 나아갈 때, 내부에서 어떤 저항과 갈등이 발생할 수 있는지도 짚어본다. ‘돌봄은 누구의 책임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에 두고, 해외에서 같은 고민을 먼저 마주한 루트임팩트의 동료들이 전해준 이야기들도 함께 소개할 계획이다.

◇ 멈출 수 없는 돌봄, 함께 짊어질 시간

팬데믹 기간, 문득 ‘하이버네이션(hibernation·겨울잠)’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필요 최소한의 기능만 남기고 모든 것이 잠시 멈춘 상태. 생존을 위해 핵심 서비스만 유지하고 나머지는 동면에 들어간 사회를 상상했다.

그런 사회에서 과연 ‘절대로 멈추어서는 안 되는 일’은 무엇일까. 돌봄이었다. 아픈 이를 보살피고, 아이를 기르고, 노인을 돌보는 일. 타인의 삶을 지탱하는 이 노동은 멈출 수 없었다. 그 중요성에 비해, 책임은 지나치게 단순하게 분배돼 있다. 누군가가 묵묵히 떠맡아 왔고, 사회는 이를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출산율 0.7이라는 현실과 마주하게 됐다. 더는 미룰 수 없는 문제다.

이제는 인식을 바꿔야 할 때다. 돌봄은 개인의 희생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짊어져야 할 과제다. ‘멈출 수 없는 것들’의 맨 앞자리에 돌봄을 놓고, 그 안에 숨은 이야기들을 하나씩 들여다보자. 돌봄의 고통을 나누는 것을 넘어, 돌봄의 행복까지 함께 나누는 사회.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

선종헌 루트임팩트 DEI 이니셔티브 팀장

루트임팩트의 <돌봄의 재발견>

‘포용’이라는 말은 낯설지 않지만, 많은 조직들이 여전히 이를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포용적인 조직이란 결국 ‘돌볼 줄 아는 조직’이라고 믿습니다. 루트임팩트는 돌봄이 더 이상 개인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조직이 함께 책임져야 할 과제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돌봄은 너그럽고 여유로운 조직의 선택이 아니라, 국제사회가 주목하는 필수 전략이자 미래를 위한 투자입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독자들은 ‘돌봄’을 자신과 조직의 일로 다시 생각해보고, 포용적 조직을 위한 돌봄의 범위와 정의, 그리고 그 실천을 위해 누구의 어떤 역할이 필요한지 함께 고민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