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기업가 재단이 바꾼 세상의 지도 <1> 카네기 재단
자선의 목표는 ‘빈곤 구제’ 아닌 ‘구조 개혁’
교육·법률로 사회 안전망 깔아, 극단적 분열·전쟁 위기 속 ‘지식 민주화’ 실험 중
오늘의 사회문제는 어느 한 기관이나 정부의 힘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기후위기와 불평등, 민주주의의 균열처럼 구조적 난제가 겹치면서 공공 재정도 한계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미국의 주요 기업가 재단들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민간 자본이 사회에 기여하는 방식’을 실험해온 조직들입니다. 단순 기부를 넘어 문제의 원인을 찾고, 제도를 설계하며, 때로는 사회의 규칙까지 바꿔온 곳들입니다. <10대 기업가 재단이 바꾼 세상의 지도> 시리즈는 카네기·록펠러·포드 등 주요 재단의 궤적을 따라가며, 복합위기의 시대에 민간 자본이 어떤 책임과 가능성을 가질 수 있는지 살펴봅니다. 이번 기획은 더나은미래와 현대차정몽구재단이 함께 추진하는 ‘K-필란트로피 이니셔티브’에서 제기된 핵심 질문, ‘한국 기업재단의 다음 방향은 무엇인가’에서 출발했습니다. /편집자 주
미국의 공공도서관, 어린이 프로그램 ‘세서미 스트리트’, 저소득층 대학생을 돕는 장학금, 그리고 SAT 시험까지… 전혀 다른 분야처럼 보이는 제도 뒤에는 공통된 출발점이 있다. 바로 1911년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가 1억3500만달러(약 1970억원)를 내놓아 만든 ‘카네기 코퍼레이션 오브 뉴욕(이하 카네기 재단)’이다. 현재 약 45억달러(6조5700억원) 규모의 기금을 굴리며 해마다 1억7000만달러 넘는 자금을 집행하는, 미국을 대표하는 ‘사적 재단(private foundation)’이다.

◇ ‘부의 복음’에서 출발한 ‘사회 설계자’
카네기는 1835년 스코틀랜드 던펌린에서 태어나 1848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자 출신 사업가다. 면방직 공장의 심부름 소년(bobbin boy)에서 시작해 철강 산업으로 부를 쌓았고, 1901년 회사를 매각한 뒤에는 생애 동안 약 3억5000만달러(약 5100억원)를 교육·과학·평화 분야에 쏟아부었다.
전 세계 2500여개 공공도서관을 세워 ‘도서관의 수호성인’으로 불렸고, 1889년 발표한 에세이 ‘부의 복음(The Gospel of Wealth)’에서는 “부자가 가진 여윳돈은 사회가 잠시 맡겨둔 돈이며, 그 돈은 살아 있는 동안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 쓰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빈곤의 ‘증상’을 덜어주는 자선이 아니라, 무지와 불평등의 ‘원인’을 줄이는 구조 개입이 목표여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이 철학은 재단 설립 초기 ‘과학적 자선(Scientific Philanthropy)’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됐다. 사회를 공학적 문제처럼 보고, 먼저 연구와 데이터를 통해 문제를 진단한 뒤 제도·정책을 설계해 해법을 제시하는 방식이다. 카네기 계열 재단 가운데 교수진진흥 카네기재단(CFAT)은 미국 최초의 교직원 연금 제도(TIAA의 전신)를 직접 설립했고, 미국 고등학교·대학의 학업 단위와 분류체계를 만드는 등 교육 표준화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카네기 코퍼레이션은 NBER, 브루킹스연구소 등 주요 싱크탱크에 초기 연구비를 지원하며 ‘지식 기반 정책’이 자리 잡는 데 재정적 토대를 제공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재단은 물리적 인프라 지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법과 제도를 고치는 ‘시스템 설계자’로 방향을 틀었다. 전환점은 1938년 스웨덴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에게 의뢰한 ‘미국 흑인 문제 연구’였다. 이 연구는 1944년 ‘미국의 딜레마(An American Dilemma)’로 출간돼 인종 차별의 구조를 해부했고, 1954년 연방대법원이 공립학교 인종 분리를 위헌으로 판단한 ‘브라운 판결’의 핵심 근거로 인용됐다. 인종분리 교육의 위헌성을 인정한 이 판결은 이후 미국 시민권 운동의 출발점이 됐다. 한 민간재단이 후원한 연구가 헌법 해석과 권리 체계를 뒤흔든 상징적 사례다.

◇ 교육·법률·이민, 제도 틀을 바꾼 카네기식 처방
교육 시스템에 대한 개입은 더욱 과감했다. 1947년 카네기 계열 재단인 ‘교수진진흥 카네기 재단’이 주도하고 카네기 코퍼레이션 등이 힘을 보태 교육평가서비스(ETS)를 출범시켰다. SAT·GRE·TOEFL을 만든 ETS는 미국 표준화 시험 체계의 근간이 됐다. 1960년대에는 카네기 고등교육위원회가 “대학은 소수 엘리트의 특권이 아니라, 계층 이동의 사다리여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기본교육보조금(BEOG)을 제안했고, 이는 오늘날 저소득층 대학생 최대 장학제도인 ‘펠 그랜트’의 설계에 중요한 밑그림이 됐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재단은 보다 직접적인 사회문제 해결자로 나섰다. 1972년에는 NAACP 법률기금과 손잡고 ‘얼 워렌 법률 훈련 프로그램(Earl Warren Legal Training Program)’을 지원해 차세대 흑인 변호사 양성에 나선 것이 출발점이었다. 이 흐름 속에서 인권 변호사 마리안 라이트 에델먼(Marian Wright Edelman)이 아동 권익 단체 ‘칠드런스 디펜스 펀드(Children’s Defense Fund)’를 설립했고, 저소득층·장애아동을 위한 교육 및 복지 정책을 강화하는 입법 운동을 이끌었다. 1975년 제정된 장애아동 교육법(Education for All Handicapped Children Act) 등 굵직한 제도 개선에 영향을 미치면서, 재단의 장학·법률 투자가 인권·복지 개혁을 견인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같은 시기 재단은 멕시코계·푸에르토리코계·원주민 등 소수 인종을 위한 법률옹호기금도 지원하며, 인종·출신 배경에 따라 권리가 갈리지 않도록 제도적 안전장치를 넓혀 갔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선 ‘응용법률연구센터(CALS)’ 설립을 도우며 인종분리 정책을 국제적 인권 의제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냉전 종식 이후에는 스포트라이트를 국제 정치로 돌렸다. 러시아에는 첫 독립 민간 싱크탱크 ‘카네기 모스크바센터’(1993)를, 중국에는 ‘카네기 차이나 프로그램’(2007)을 세워 학술 외교의 교두보를 놓았고, 포드재단·오픈소사이어티와 함께 이민자 권리 옹호 펀드인 ‘포 프리덤즈 펀드(Four Freedoms Fund)’를 설계하며 미국 내 이민·난민 이슈에도 장기적인 대응 틀을 만들었다.
◇ “도서관에서 투표소까지”…민주주의 지형 겨냥한 양극화 연구 지원
최근 몇 년간 카네기 재단의 전략이 가장 급격하게 재편된 분야는 ‘민주주의 프로그램’이다. 과거 이민자 통합, 선거권 확대, 시민교육 등 여러 주제를 병렬적으로 다뤘다면, 지금은 ‘정치적 양극화(Political Polarization)’라는 단일 의제에 자원을 집중한다. 미국 사회의 분열 구조를 직접 겨냥해 민주주의의 ‘지형’ 자체를 되돌려 세우겠다는 취지다.
2015년 시작된 ‘앤드루 카네기 펠로우십(Andrew Carnegie Fellows Program)’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를 선정해 1인당 최대 20만달러(약 3억원)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2024년부터 선정 주제를 ‘정치적 양극화’ 연구로 한정했다. 향후 3년간 최대 1800만달러(약 263억원)를 투입해 양극화의 원인과 해법을 파고드는 60여명의 연구자를 지원하기로 했다.

연구 주제는 다양하다. 온라인에서 여성혐오를 퍼뜨리는 집단과 남성 우월주의 커뮤니티(일명 ‘매노스피어’)가 어떻게 정치적 극단주의로 이어지는지, 쇠락한 두 석탄 마을이 왜 전혀 다른 정치 성향을 띠게 됐는지, 투표라는 행위 자체가 유권자의 당파적 인식을 어떻게 굳히는지 등 미국 사회의 갈등 구조를 정면으로 겨냥한다. 카네기 재단은 이렇게 나온 연구를 책과 강연, 정책 제안으로 확산해 시민의 정보 소비 방식과 정치 참여의 규칙을 다시 짜는 데까지 목표를 두고 있다. 단순한 여론 진단이 아니라, 공공 담론과 선거제도 설계에 영향을 미칠 ‘지식의 구조’를 새로 만드는 작업이다.

이 전략의 중심에는 2023년 1월 취임한 루이즈 리처드슨(Dame Louise Richardson) 총재가 있다. 카네기 재단 역사상 첫 여성 총재이자 옥스퍼드대 900년 역사상 첫 여성 총장 출신인 그는 국제 테러리즘과 안보 연구의 권위자다. 리처드슨 총재는 “오늘날 미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위협은 정치적 양극화와 ‘진실의 위기(truth crisis)’”라며 재단의 국내 프로그램을 사실상의 ‘민주주의 방어 프로젝트’로 재정렬했다. 동시에 재단의 출발점이었던 도서관 지원으로 돌아가 뉴욕의 세 공공도서관에 400만달러(약 58억원)를 기부하며 “도서관은 분열의 시대에도 신뢰받는 공동체 공간”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인의 일상 경로 속, 도서관에서 투표소까지 이어지는 ‘민주주의 인프라’를 다시 단단히 잇겠다는 메시지다.
국제 평화·안보 프로그램은 카네기의 평화 철학을 잇되, 냉전과는 다른 ‘신기술 리스크’에 초점을 맞춘다. 재단은 핵무기 확산뿐 아니라 AI·사이버 공격·극초음속 미사일 등이 핵 억지 체계를 어떻게 불안정하게 만드는지를 분석하며, 기술 오류가 확전으로 번질 수 있는 경로를 새로 그려보고 있다. 프린스턴대·호주국립대·미국과학자연맹(FAS)과 진행 중인 ‘AI-핵 연계 위험’ 프로젝트도 그 일환이다. AI가 조기경보·지휘 시스템에 투입될 때 어떤 오작동이 발생하고, 어떤 통제 규범이 필요한지를 시뮬레이션하는 작업이다. 동시에 이러한 연구를 전문가 집단 밖으로 확장하는 ‘지식 민주화’ 전략을 통해, 핵·기술 위험을 공공 의제로 끌어올리고 있다.
◇ “판 그 자체를 설계하라”…1세기 넘은 재단의 현재형 실험
카네기 재단이 1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창립자의 ‘영속성 설계’도 한몫했다. 앤드루 카네기는 “이사들이 내 뜻을 가장 잘 따르는 방법은 그들의 판단을 사용하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설립자의 유언을 절대화하기보다, 이사회가 시대 변화에 맞춰 전략을 바꾸도록 권한을 위임한 셈이다. 이 유연성이 있었기에 도서관 건립 재단이 핵·AI 위험과 정치적 양극화를 다루는 재단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오늘날 카네기 재단은 미국 교육 체계에서 핵무기 통제 시스템과 인공지능 알고리즘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공공도서관·표준화 시험·장학금·시민권·핵 통제·평화 프로세스 등 카네기가 남긴 자선 실험의 궤적을 따라가면, 한 재단이 한 세기 넘게 ‘세상의 지도를 어떻게 고쳐왔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단순한 자선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현대 사회의 난제를, 지식과 이해를 통해 풀어보겠다”는 이 재단의 실험은 자선 자본이 어디까지 사회 구조에 개입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지에 대한 거대한 시험대이기도 하다.
앤드루 카네기는 생전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이 재단은 인류에게 혜택을 주는 기관으로 세대를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도서관을 짓던 ‘철강왕’의 유언은, 정치적 양극화와 핵·AI 위기를 상대하는 21세기 카네기 재단의 손끝에서 여전히 현재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김경하·조유현 더나은미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