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팩트비즈니스 인사이트] 성공하는 실패의 딜레마, ‘프로젝트 파이낸싱’으로 푼다

임팩트 생태계에는 수많은 좋은 조직과 모델이 존재한다. 혁신적인 실험이 이어지고 있고, 의미 있는 성과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은 좀처럼 사회 시스템의 변화로 연결되지 않는다. 마치 ‘성공하는 실패’가 반복되는 듯한 양상이다. 이 같은 간극은 여러 요인에서 비롯된다. 대표적인 것이 단기 성과 증명의 함정이다. 대부분의 투자나 보조금은 3년 이내에 눈에 보이는 성과를 요구한다. 이에 따라 임팩트 조직들은 장기적 변화보다는 측정 가능한 단기 지표에 집중하게 된다. 확장성의 딜레마도 문제다. 뛰어난 모델조차 규모를 키우는 과정에서 효과가 희석되거나 비용이 급증하며, 결국 ‘복제’는 되지만 ‘시스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 결과, 개별 조직이 고군분투해도 그 노력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선순환 구조는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어떤 조직이 가장 혁신적인가?”, “누가 더 좋은 모델을 갖고 있는가?”에 집중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이 문제를 구조적으로 어떻게 끝낼 것인가?” 그 대답 중 하나가 프로젝트 파이낸싱(Project Financing, 이하 PF)이다. ◇ 전환의 키워드, PF PF의 핵심은 개별 조직의 수익성이나 신뢰도가 아니라, ‘프로젝트 자체의 목적과 수행 방식, 그리고 미래 수익 가능성’을 기반으로 자금을 조달한다는 점이다. 세계은행은 PF의 세 가지 특징을 제시한다. 첫째, ‘비소구 구조(Limited or No Recourse)’다. 프로젝트가 실패하더라도 대출기관은 프로젝트 자체의 자산과 현금흐름에만 상환 청구권을 갖는다. 이는 조직의 부담을 줄이고, 프로젝트의 타당성에 집중하게 만든다. 둘째, ‘계약 기반 구조(Contractual Arrangements)’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각 주체의 역할과 책임, 리스크 분담을 사전 계약을

이재현 NPO스쿨 대표
[사회혁신발언대] 비영리는 ‘스테이블 코인’을 준비하고 있나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미국은 스테이블코인 법제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대표 법안인 ‘GENIUS 법’이 지난 18일(현지 시각) 상하원을 통과해 공식 법제화 됐다. 국채와 암호화폐를 연계해 달러 패권을 지키겠다는 의도가 깔렸다. 민간 금융기관들도 이에 동참하겠다는 입장이다. JP모건, 시티그룹 등 주요 금융사들이 앞다퉈 참여를 선언하며 디지털 전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처럼 담보가 없는 ‘무담보 코인’이 아니라, 1코인을 1달러에 연동한 ‘담보 코인’이다. 변동성이 크고 가치 보장이 어려운 무담보 코인이 투자자산으로만 소비돼온 데 반해, 스테이블(stable)코인은 담보 기반의 안정성 덕분에 공식 통화의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통화 가치를 우선시한 암호화폐를 만든다면, 가장 적절한 형태는 국가가 보증하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이하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일 것이다. CBDC는 국가의 공식 화폐를 디지털화한 형태로, 중앙은행이 발행하고 관리한다. 때문에 정부의 통제가 필연적이며, 이 때문에 ‘감시 수단’이라는 비판도 뒤따른다. ◇ 스테이블코인 띄우는 美… 달러 패권의 새 무기 반면 스테이블코인은 비트코인·이더리움 같은 변동성 높은 무담보 코인과 달리, 달러나 국채 등 실물 자산을 담보로 삼아 가격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이런 구조 덕분에 정부 개입 없이도 안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어, ‘중앙통제 없는 대안 화폐’로 주목받아 왔다. 이미 미국을 위주로 사용되어 오다가 이번 법안을 통해 본격 궤도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디지털 자산 시장의 선두를 자처한 다양한 암호화폐가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이 자리하고 있다 수년간 CBDC는 암호화폐 시장의 안정적 대안으로 거론돼왔다.

[논문 읽어주는 김교수] CSR 피라미드에 대한 심각한 오해

얼마 전 ESG 경영 포럼에서 한 교수가 캐롤(A. B. Carroll) 박사의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이론을 소개하며 ‘CSR 피라미드’ 모형을 설명했다. 그는 피라미드의 맨 아래에 위치한 ‘경제적 책임’을 가장 중요한 기업의 책임으로 강조했다. 그러나 이는 ‘CSR 피라미드’를 오해한 대표적 사례다. 캐롤의 CSR 피라미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경제적 책임, 법적 책임, 윤리적 책임, 자선적 책임의 네 범주로 나눈 개념이다. 1991년 발표된 논문 ‘CSR 피라미드: 조직 이해관계자들의 도덕적 관리를 향해’에서 제시된 이 모형은, 이후 경영학과 사회책임 논의에서 교과서처럼 인용됐다. CSR 또는 ESG 경영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캐롤의 이름을 피해 가기 어렵다. 그는 1979년에 CSR의 네 가지 범주를 처음 제시했고, 1991년 ‘CSR 피라미드: 조직 이해관계자들의 도덕적 관리를 향해’라는 논문을 통해 해당 모형을 대중화시켰다. 이 논문은 CSR을 ▲경제적 책임(이익 창출) ▲법적 책임(법규 준수) ▲윤리적 책임(사회적 기대) ▲자선적 책임(좋은 기업 시민)으로 구분하며, 이후 수많은 교과서와 기업 전략 문서에서 활용됐다. 그러나 문제는 이 구조가 ‘피라미드’라는 이름과 형태 때문에 오독을 불러왔다는 점이다. 경제적 책임이 피라미드 아래에 있으니 ‘가장 중요하다’는 해석이 일반화된 것이다. 특히 “기업은 무엇보다 이익을 내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주장이 피라미드 구조에 기대며 널리 퍼졌다. 하지만 캐롤 자신은 이런 해석을 경계했다. 그는 2016년 ‘캐롤의 CSR 피라미드: 다시 보기(CSR Pyramid: Revisited)’라는 논문을 통해 오해를 직접 정정했다. 캐롤은 명확히 밝혔다. “CSR 피라미드는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순차적, 위계적으로 이행하라는 뜻이

[사회혁신발언대] 임팩트 투자사 인턴십이 내게 남긴 것

대학 졸업을 앞두고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막연한 불안감 속에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만 되풀이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미래내일 일경험 인턴’ 공고를 보게 됐다. ‘재무적 이익과 사회적 가치를 함께 추구한다’는 MYSC의 소개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선행의 선순환에 기여하는 일을 찾고 싶었던 나는 자연스레 MYSC의 투자밸류업팀 인턴에 지원했다. MYSC에서의 인턴 생활은 낯선 여행과 비슷했다. 3개월 동안 매일 새로운 경험을 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점심이나 커피를 함께하며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평적인 문화 덕분이었다. 내부 워크숍, 사내기업가 인터뷰, 워크숍, 잦은 미팅은 마치 새로운 도시의 골목골목을 탐험하는 느낌이었다. 특히 사내기업가 인터뷰는 인생의 시점마다 고민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사회 초년생인 나는 지금이 가장 중대한 선택의 순간이라 생각했지만, 나보다 앞선 선배들은 여전히 다음 선택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직 내게는 수많은 길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내가 맡은 첫 과제는 투자밸류업팀의 업무 데이터를 정리해 모두가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었다. MYSC 내부에서는 투자밸류업팀의 정보가 익숙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각 팀이 필요한 정보를 따로 요청하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에어테이블을 선택했고, 나는 데이터를 정리하고 사용자 친화적인 인터페이스를 구현했다. 이를 통해 각 부서가 투자 절차별로 어떤 정보가 필요한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업무 자동화와 디지털 전환의 현실을 몸소 체감했다. 데이터를 입력하고 가공하는 시간과 노력이 만만치 않았다. 반면, 자동화를 통해

[공익이 이끄는 데이터 과학] 공짜 규정은 없다

우리는 ‘규제’라고 하면 보통 정부가 시장을 통제하는 것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규제는 시장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도 스스로 규제를 받으며, 시민도 정부를 상대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규제를 경험한다. 이를 ‘규정’이라 부른다. 법이 추상적인 명령이라면, 규정은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는 구체적 원칙이다. 문제는 이 규정이 복잡해질수록 시민이 감당해야 할 행정부담이 커진다는 점이다. 미국 미시간대 포드정책대학원의 파멜라 허드(Pamela Herd) 교수와 도널드 모이나한(Donald Moynihan) 교수는 이를 ‘행정부담(administrative burden)’이라 부른다. 행정부담이란 정책을 이용하기 위해 시민이 감내해야 하는 시간적·심리적·금전적 비용이다. 규정이 어려울수록, 절차가 까다로울수록 시민은 더욱 큰 부담을 진다. 규정은 본래 적법절차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과거의 사건이나 사고를 계기로 규정이 추가된다. 문제는 소수의 사례를 막으려 만든 규정이 모든 시민에게 일괄 적용되면서 오히려 불필요한 비용을 낳는다는 점이다. 정부의 규정은 강제력을 갖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다. 사회적 비용이 결코 적지 않다. ◇ 디지털 정부의 역설…모두가 스마트폰을 가진 세상? 대표적 사례가 한국의 디지털 공공서비스다. 지금 대부분의 온라인 민원은 본인 명의 휴대폰 인증을 요구한다. 겉보기에는 편리하지만, 스마트폰이 없거나 익숙하지 않은 이들, 재외국민, 외국인에게는 높은 벽이다. 실제로 미국 교민인 필자는 지난해 말 미국에서 운전면허증을 갱신하면서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까지 직접 가야 했다. 온라인으로 수수료를 내야 했는데, 결제 과정에서 본인 명의 휴대폰 인증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한국 휴대폰이 없는 상황에서는 선택지가 없었다. 신분증 사본 제출이나 이메일 인증 같은 대안도 있었지만, 시스템은 애초에 그런 방식을

[돌봄의 재발견] 돌봄, 모두의 삶을 관통한다

“기혼자들의 워라밸을 위해 청년들의 워라밸이 희생됐다.”  경력보유여성 인턴십 프로그램을 통해 채용을 시도했던 한 조직의 피드백이었다. 기혼자이자 부모로서, 그리고 인사·조직문화를 담당하는 입장에서 이 한마디는 오랫동안 마음을 짓눌렀다. “우리 회사의 모든 축하와 인정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선택을 해야만 받을 수 있는 것 같다”는 한 동료 구성원의 말에도 오랫동안 마음이 시렸다. ‘자녀가 없는 직원에 대한 역차별 우려’로 직장 어린이집 설치를 포기했다는 한 글로벌 기업의 기사도 역시 쓰린 마음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누군가의 고단함을 살피는 일이 다른 이를 소외시키는 일은 아닐까. 그런 우려 속에서도 우리는 직장 어린이집을 설치했다. 모성 보호 관련 취업규칙을 꾸준히 업데이트하고, 육아 중인 직원들을 위한 슬랙 채널을 열었다. 방학 중 자녀 대상 프로그램도 마련해 작은 공동 육아 실험도 시도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기 좋은 회사를 만들자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일하기 좋은 조직을 만들고자 했다. 가족과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큰 동료들이 돌봄을 이유로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을 막고자 했다. 육아라는 특정한 사례를 우대하기보다, 구성원 각자의 삶을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고자 했다. 정책 과정도 모두에게 투명하게 공유했다. 리더들은 반복해서 철학과 방향을 설명하며, 이 정책이 특정 그룹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렸다. ◇ 우리 모두에게 흐르고 겹치는 ‘돌봄’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돌봄이 특정 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시기와 형태는 다르지만 모든 구성원이 저마다 돌봄의 책임을 안고 있었다. 스스로를 돌보는 일부터

김진아 아름다운재단 사무총장 썸네일 가로형
[영리한 비영리] 운영비의 재발견…‘불필요한 비용’에서 ‘가치를 만드는 동력’으로

지난 6월 12일, 아름다운재단 대회의실에서 매우 특별한 협약식이 열렸다. 이름하여 ‘마중물기금 협약식’. 아름다운재단 구성원들의 성장과 미래를 위한 운영비 전용 기금으로, 기부자는 김강석 님이다. 김강석 님은 온라인 게임 ‘배틀그라운드’를 개발한 블루홀(현 크래프톤)의 창업자이자 대표적인 자산가다. 그는 청소년부모와 자립준비청년을 위한 ‘바오밥나무기금’을 가족과 함께 출연했고, 지난해부터 아름다운재단 이사로 활동 중이다. 이밖에도 루트임팩트에 소셜섹터 육성을 위한 ‘조건없는 기금’ IP1기금(36억 원)을 출연했고,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도 10억 원을 기부하는 등 국내 비영리 혁신을 이끄는 리더로 평가받고 있다. 이번 ‘마중물기금’은 아름다운재단이 창립 25주년을 맞아 새롭게 개발한 기부금에 매칭 기부 방식으로 작동한다. 말 그대로 ‘원플러스원(1+1) 기부’다. 그는 협약식에서 “두 번의 창업을 거치며 사람이 전부라는 것을 절감했다”며 “아름다운재단은 신뢰할 수 있는 조직”이라고 밝혔다. 이 협약식을 칼럼을 통해 전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수억 원에 달하는 금액을 ‘운영비’로 기부하는 일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 운영비에 대한 오해와 현실 운영비는 종종 ‘불필요한 간접비’로 인식된다. ‘적을수록 좋다’고 여겨지는 이 비용에는 인건비, 교육비, 회의비, 교통비 등 조직 운영의 핵심 비용이 포함된다. 이러한 비용은 단순한 소모가 아니라, 조직이 사회적 미션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기반이자 인프라다. 특히 인건비는 단순한 인력 유지가 아니라,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고 전략을 설계할 수 있는 역량의 핵심이다. 운영비 부족은 곧 생존력 저하로 이어진다. 급여가 적정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이직률이 높아지고, 전문 인력의 유입도 어려워진다. 인재 육성은 항상 후순위로 밀린다. 겉으로는 비용을 아끼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기후 유니버스] 기후 용어가 기후 인식을 바꾼다

‘기후위기’는 더 이상 관료나 전문가들만의 주제가 아니다. 이제는 밥상머리에서, 날씨를 묻는 일상 인사에서, 거실의 TV 앞에서 누구나 언급하는 공통의 화두가 됐다. 2022년 구글코리아가 발표한 ‘올해의 검색어’ 1위가 ‘기후변화’였다는 사실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문제는, 이렇게 모두가 이야기하는 주제일수록 그 언어를 정확히 이해하고 사용하는 일이 중요해진다는 점이다. 미국 언어학자 벤자민 리 워프는 “언어는 사고의 본질과 내용을 규정한다”고 했다. ‘기후위기’와 관련된 단어 하나에도 생각의 방향과 세계관이 담긴다. 그 단어를 어떻게 선택하고 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관점이 읽힌다. 예를 들어보자. 흔히 ‘신재생에너지’와 ‘재생에너지’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신재생에너지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용어다. 신재생에너지는 3종류(수소에너지, 연료전지, 석탄 액화∙가스화 에너지)의 신에너지와 태양광, 풍력을 비롯한 9종류의 재생에너지로 구분한다. ‘신재생에너지’는 ‘재생에너지’ 보다 더 넓은 개념으로 화석연료 기반의 에너지를 일부 포함하고 있어 친환경으로 보기 어렵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서 ‘재생에너지’를 ‘소비되는 속도보다 빠른 속도로 재생되는 자연적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로 정의한다는 것을 참고하자. ‘무탄소’와 ‘탈탄소’,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맥락은 다르다. 영어로는 각각 ‘Carbon-free’와 ‘Decarbonization’으로 번역된다. 전자는 단순히 탄소 배출이 없다는 ‘상태’를 뜻하고, 후자는 탄소를 줄여나가는 ‘과정’에 방점을 찍는다. 다시 말해, 결과 중심이냐 과정 중심이냐의 차이다. 수학으로 치면 스칼라와 벡터의 관계와 비슷하다. ‘무탄소’는 기술중립적 개념이지만, 국내에서는 주로 원자력 발전을 설명할 때 사용된다. 탄소를 배출하지 않으니 ‘괜찮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기술낙관론과 결과 중심 사고를 경계해야 한다. 기후위기 대응은 단지 탄소 배출을

정태은 비랩코리아 선임매니저
[사회혁신발언대] 1만개 기업이 참여하는 새로운 비즈니스의 미래

지난해 만난 한 스타트업이 흥미로운 경험을 들려줬다. 미국의 한 보험사와 협업을 논의하던 중, 예기치 않게 ‘비콥(B Corp) 인증을 받았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는 것이다. 해당 스타트업은 인증을 받지 않은 상태였지만, 상대 기업은 ‘한국 스타트업과의 첫 거래’라는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신뢰 지표로 비콥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비콥이 글로벌 기준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비콥 운동은 처음엔 작고 다소 무모한 시도에서 시작됐다. 비콥 운동의 여정을 보여주는 책 ‘비즈니스 혁명, 비콥’에는 19년 전 비랩(B Lab)의 공동 설립자들이 약속 없이 회사를 무작정 찾아가거나, 콜드 메일을 보내고 음식점에서 답장을 기다리면서 기업 리더들을 설득하던 모습이 담겨있다. 순진해 보일 수도 있는 이런 시작이 오늘날의 글로벌 운동으로 이어진 셈이다. 기업의 책임있는 변화를 이끌어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점을 해결한다는 이상주의자의 믿음 같았던 비콥 운동은 이제 전 세계 100여 개국, 1만 개의 인증 기업, 100만 명의 기업 구성원이 참여하는 글로벌 운동으로 성장하는 모멘텀을 맞이하고 있다. 비콥은 재무적 이익과 사회환경적 목적을 균형있게 추구하는 기업에게 성과를 검증하고 부여하는 인증이자, 기업 리더 커뮤니티가 참여하는 기업 문화 운동이다. 이번달 비랩 글로벌이 발표한 2024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11곳에 불과했던 상장 비콥 기업은 2024년 말 75곳으로 늘었다. 시장은 이제 ‘목적 중심 기업도 성장할 수 있다’는 명제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소비자와 직접 맞닿아 있는 식품, 화장품, 의류 업계가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비콥의 인지도 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56%가

[논문 읽어주는 김교수] 대한민국의 ESG 정책, 지금이 ‘골든타임’

2025년 6월 3일, 이재명 대통령의 당선은 한국 기업 환경에 중대한 전환점을 예고하고 있다. 새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기업 지배구조 개선, 기후·환경 위기 대응, 청년세대의 가치 변화, AI 등 기술혁신을 아우르는 정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경제성장과 민생 회복, 사회 질서 구현이라는 거시 목표 아래 기업 생태계도 다시 설계되는 흐름이다. 기업 ESG(환경, 사회, 거버넌스)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일반적으로 새 정부 출범 직후 1년은 국정 운영의 ‘골든타임’으로 불린다. 강한 정책 추진력과 실행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 시기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향후 수년간의 방향성이 결정된다. ESG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기업과 정부 모두 이 골든타임을 놓쳐선 안 된다. 첫째, 이해관계자 간 갈등 조정과 사회적 합의를 형성해야 한다. ESG 정책이 본격화될수록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장벽은 이해관계자 간의 첨예한 입장 차이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과 함께 파리협정 탈퇴 등 반(反) ESG 흐름이 고개를 들고 있다. 유럽연합(EU) 역시 올해 2월 옴니버스 패키지 제안 이후 기업의 지속가능성 경쟁력과 현실적 규제 수준을 놓고 내홍이 거세다. 한국도 상황은 비슷하다. 정부, 대기업, 중소기업, 시민단체, 주주 등 각 주체가 ESG 정책에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대기업은 비교적 여유 있는 대응이 가능하지만, 중소기업은 인력과 자금, 기술 측면에서 압박을 받고 있다. 환경단체는 규제 강화를 촉구하고, 산업계는 성장 저해를 우려한다. 이처럼 복잡하게 얽힌 상황에서 정부는 민관협의체와 공청회 등 공식적인 논의 구조를 통해 실질적 갈등 조정의

[투자자, 연금술사가 되다] 소 한마리와 테슬라, 그리고 혼합금융

예상보다 20분 이상 더 걸렸다. 구글 지도가 안내한 시간은 이미 한참 넘긴 상태. 약속한 미팅 시간에도 늦었고, 차는 좀처럼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초조함을 삼키며 차창 밖을 내다보던 순간, 대로변 한복판에 멈춰선 소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차들은 그 소를 피해 조심스레 움직였고, 같은 시야 안에는 테슬라 전기차와 수십 명이 탄 릭샤도 보였다. 그렇게 필자에게 인도의 첫인상은 ‘예상 밖의 것들이 공존하는 풍경’으로 남았다. 그리고 이 인상은 곧 ‘혼합금융(Blended Finance)’이라는 개념과 겹쳐졌다. 벵갈루루에서 만난 초기 투자사와 비영리 기관들이 수행하는 프로젝트 역시, 이질적인 요소들이 뒤섞여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 벵갈루루에서 겪은 ‘혼합금융’의 현장 ‘혼합금융’은 말 그대로 여러 재원을 혼합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글로벌 조직 ‘컨버전스(Convergence)’는 이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민간 투자를 유도하고자 공공이나 자선 재원을 촉매자본으로 활용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이 과정에는 민간 투자자, 공공기관, 재단, 수혜 기업 등 적어도 세 주체 이상이 개입한다. 인도 벵갈루루에서 방문한 ‘카본 마스터스(Carbon Masters)’는 음식물 쓰레기를 발효시켜 바이오가스를 생산하는 기업이다. 한국의 과거 LPG처럼 가스를 통에 주입해 현지 식당 30여 곳에 납품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공장까지 둘러보게 된 뒤, 인큐베이터 ‘빌그로(Villgro)’와 대출 지원 기관 ‘유누스 소셜 비즈니스(Yunus Social Business)’ 관계자를 연이어 만났는데, 공통적으로 이 기업을 언급했다. 한 기업의 이름이 이토록 반복해서 언급되는 건 우연이 아니다. 18억 명 이상이 거주하는 인도처럼 인구 밀도가 높은 국가에선 폐기물 처리가 중대한 사회문제이기에,

[공익이 이끄는 데이터 과학] 이재명 정부가 ‘리오넬 메시’에게 배워야 할 것

리오넬 메시는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이다. 디에고 마라도나와 함께 아르헨티나가 배출한 최고의 선수로 꼽힌다. FC 바르셀로나에서만 34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을 월드컵 우승으로 이끌었다. 메시의 경기 스타일을 보면 그의 재능, 기술과 함께 정보력이 눈에 띈다. 메시는 공을 받기 전에 이미 수차례 주변을 스캔하며 다음 행동을 준비한다. 남보다 넓게, 자주, 그리고 일찍 보는 능력. 이 스캔 능력이 메시를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하나로 만들었다. 이제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한국의 공공 서비스를 새롭게 혁신할 수 있는 기회를 마주하고 있다. 대통령은 지난 대선 과정에서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을 통한 사회 혁신을 국정 최우선 과제로 강조해 왔다. 이 혁신에는 공공 혁신도 포함된다. 그러나 공공 영역에서 인공지능, 혹은 더 넓게는 첨단 기술을 잘 활용하려면, 도구보다 문제를, 해결책보다 원인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메시처럼 경기장을 ‘스캔’할 줄 아는 능력이 중요하다. 공공 서비스를 국민 모두가 더 쉽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게 만들려면, 먼저 행정 시스템 전반을 넓게 들여다보고, 어디에서 고충이 발생하는지를 정확히 감지해야 한다. 어두운 밤길에서 열쇠를 잃어버리고는, 단지 가로등 아래가 밝다고 그곳만 찾아보는 어리석음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의 정부 행정 시스템은 종종 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행정 조직은 지나치게 분절돼 있고, 각 부처와 팀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처리한다. 서로 연결되지 않다 보니, 시민의 실제 공공 ‘서비스 경험’은 포착되지 못한다. ◇ 콜센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