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리더를 찾아서] ⑬ 대한적십자사 유중근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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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줄처럼 이어진 네트워크… 적십자만의 힘이죠”
헌혈 국한된 이미지 벗고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적십자의 가치 넓힐 것
자원봉사자와 취약 계층 일대일 결연 ‘희망풍차’
위기 가정 기금 마련 소외계층 진료비 지원
자원봉사자 35만 명 적십자의 혈액같은 존재 ‘희망나눔봉사센터’ 열어
획일적 나눔이 아니라 수혜자 입장 배려한 기부 개인의 나눔 참여 늘어야

107년 역사의 대한적십자사 최초 여성 수장인 유중근 총재. /조선일보 DB, 대한적십자사 제공
107년 역사의 대한적십자사 최초 여성 수장인 유중근 총재. /조선일보 DB, 대한적십자사 제공

107년 역사의 대한적십자사 최초 여성수장. 유중근(68) 총재는 인터뷰 전날, 기자의 프로필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대개 기자들은 취재원 사전조사를 꼼꼼히 하지만, 취재원이 기자의 신상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드물다. “만나는 분이 누구인지 아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라고 했다. 인터뷰 당일인 지난 5일, 단아한 갈색원피스 차림의 유 총재는 펜으로 꼼꼼하게 메모한 질문지를 들고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15년간 봉사위원으로 몸담아 왔을 때와 달리, 107년 역사의 국내 대표 구호기관의 첫 여성수장이라는 부담감도 만만찮았을 것 같다. 어떤 비전과 목표로 총재직을 수락했고, 가장 역점을 둘 사업은 무엇인가.

“매우 큰 조직이다. 직원만 3300명이다. 본사와 지사 14곳, 봉사관 50곳, 혈액원과 검사센터 관련 21개 기관, 헌혈의 집 131곳, 적십자병원이 6곳이다. 총재 임명을 받았을 때 부담이 컸지만, 이유와 소명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취임 후 살펴보니, 대한적십자사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헌혈’이나 ‘이산가족’으로 국한돼 있었다. ‘국민 속으로 들어가는 대한적십자사’를 모토로 세웠다. ‘희망풍차’ ‘희망진료센터’ ‘300만 헌혈캠페인’ 등 3가지를 중심사업으로 정했다.”

―지난 7월 ‘희망풍차’라는 브랜드 BI까지 새롭게 론칭했는데, ‘희망풍차’가 무엇인가.

“12만 성인 자원봉사자들이 4대 취약계층과 일대일 결연을 맺는 것이다. (희망풍차 브로셔를 꺼내 빨간색 네 깃발을 하나하나 가리키면서) 소외아동, 노인, 다문화 가정, 북한이주민이 그 대상이다. 자원봉사자들이 일주일에 최소 한 번 이상 결연가정을 방문한다. 수혜자의 욕구를 직접 들으며 통합적으로 서비스할 수 있다. 기초생활, 의료비, 주거환경개선, 교육비 등 4가지 분야를 지원한다. 올해 2만 세대를 시작으로, 향후 3만 세대로 확대할 계획이다. 월 3만원을 내면 ‘희망풍차 후원회원’이 될 수 있다.”

―얼마 전 ‘시리어스 리퀘스트(Serious request)’라는 모금행사가 성공적으로 치러져 화제가 됐는데….

“유리부스에 DJ들이 들어가 48시간 동안 먹지도 않고 잠도 안 자며 나눔 토크콘서트를 진행하고, KBS뉴미디어인 K-player를 통해 실시간 방송됐다. 5억1200여만원이 모금됐다. 여기에 얼마 전 서울 서교동의 80세 넘는 어르신이 기부해준 6억원을 시드머니(seedmoney)로 해서 ‘희망솔루션금고’를 만들었다. 이 성금은 ‘희망풍차’ 결연대상 중 위급한 상황이 생긴 위기가정을 돕는 데 쓰일 예정이다.”

―매년 국감 때면 적십자병원의 적자 문제가 거론된다. 지난 6월과 11월, 서울과 인천 적십자병원에 ‘희망진료센터’를 열었는데, 이 센터의 취지와 목적은 뭔가.

“적십자병원이 어렵다보니 그동안 문을 닫거나 팔아야 한다는 지적도 많았다. 하지만 저소득층이 증가하면서 의료분야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비용 때문에 병원을 찾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공공의료야말로 적십자병원만이 할 수 있는 길이다. 간절하니 길이 보였다. 올해 초부터 서울대학교병원이 적십자병원의 공공의료 활동에 함께 나섰고, 현대차정몽구재단이 후원자로 나타났다. ‘희망진료센터’에서는 의료 소외계층이 방문할 경우 진료비의 50%를 부담해주고, 비급여항목 전액을 지원한다. 혹 사정이 어려워 의료비 지원이 필요한 분이 있으면, 언제든 적십자사로 연락해주면 좋겠다.”

―10일부터 ‘적십자 회비 집중모금’이 시작됐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회비의 강제성이 없어지면서 회비 모금이 어렵다고 들었다. 어떤 해결 방안이 있는가.

“올해의 캐치프레이즈는 ‘기적을 만드는 30㎝ 종이’다. 30㎝ 조그만 지로용지, 국민이 내준 회비 덕분에 다문화 가족의 언어교육을 돕고, 노인을 위한 도시락을 배달하고, 저소득층 아이들의 학습을 도울 수 있다. 회비모금을 독려하고 알리기 위해 적십자 직원들도 1월 4일부터 고속도로 톨게이트와 휴게소에서 모금을 실시하기로 했다. 12월 30일에는 본사 식구들 모두 헌혈을 하고, 나도 직접 톨게이트에 나갈 생각이다. 춥고 차들이 많아서 꽤 고생스럽다고 하더라(웃음).”

① 지난 2월 23일 적십자사와 백석대가 세계 헌혈자의 날을 맞아 벌인 '세계에서 가장 큰 인간 핏방울 만들기' 기네스 도전 이벤트. 3006명이 참가해 도전에 성공했다. ② 지난 11월 30일부터 12월 2일까지 서울 홍익대 '걷고 싶은 거리'에서 '위기가정에 희망을'이란 주제로 진행된 '시리어스 리퀘스트' 모금 캠페인. /조선일보 DB, 대한적십자사 제공
① 지난 2월 23일 적십자사와 백석대가 세계 헌혈자의 날을 맞아 벌인 ‘세계에서 가장 큰 인간 핏방울 만들기’ 기네스 도전 이벤트. 3006명이 참가해 도전에 성공했다. ② 지난 11월 30일부터 12월 2일까지 서울 홍익대 ‘걷고 싶은 거리’에서 ‘위기가정에 희망을’이란 주제로 진행된 ‘시리어스 리퀘스트’ 모금 캠페인. /조선일보 DB, 대한적십자사 제공

―풀뿌리 자원봉사자들은 대한적십자사의 힘이 아닐까 싶다. 이들을 이끄는 비결은 뭔가.

“성인 봉사자와 RCY(Red Cross Youth ·청소년 적십자) 봉사자 합쳐서 35만명이다. 이들의 가치를 시간으로 계산해보니, 연간 736만 시간이었다. 돈으로 계산하면 670억원에 달한다. 나는 자원봉사자들을 볼 때마다 ‘적십자사라는 생명체를 유지시켜주는 혈액과 같은 분들’이라고 말한다. RCY 출신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각 국가가 할 수 없는 것을 유엔이 하지만, 유엔도 못하는 것을 적십자가 한다’며 적십자 봉사원의 힘을 표현했다. 최근 국민 누구나 지역에서 자원봉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50개의 봉사관을 새로 단장하고 있다. ‘적십자봉사관’이란 이름 대신 ‘희망나눔봉사센터’로 바꾸고, 센터마다 빵굼터와 국수나눔터 등을 만들었다. 전국은행연합회 소속 은행장님들을 모시고 직접 봉사활동에 참여해봤는데, 남자분들도 즐겁게 봉사한다.”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다른 NGO에 비해, 사업규모가 크고 방대하다 보니 조직의 유연성이 떨어지는 적십자사를 운영하는 데 대한 고민도 있을 법하다.

“적십자의 정신과 가치가 나는 너무 좋다. 인간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일을 한다. 오랜 역사 속에서 대한민국 내의 조직망이 생명줄처럼 연결돼 있고, 국제적으로도 적십자 네트워크가 이뤄져 있다. 적십자사의 역사가 오래됐기 때문에 굳어진 요소도 있겠지만, 앞으로 새로워질 것이다. 우리도 해외 어린이를 돕는 유행을 따라가볼까 생각했지만, 적십자의 가치를 지키면서 점점 넓히기로 했다. 북한 이주민 한 명을 돕는 것은, 결국 통일 한국의 1000명 북한주민을 돕는 것과 같다. 자원봉사자라는 인적인 나눔, 후원자라는 물적인 나눔, 병원과 헌혈이라는 생명의 나눔을 통합적으로 할 수 있는 곳은 ‘적십자사’밖에 없다.”

―남편인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도 나눔과 기부에 적극적이다. 부부가 함께 의논을 많이 하는가.

“총재가 되기 전, 고민되는 일이 있을 때면 남편과 의논했다. 의논을 하면 남편이 질문을 20개쯤 던진다.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 부부는 ‘남을 돕는 게 자기를 돕는 것이다. 물은 고여 있으면 안 되고, 흘러야만 샘물이 나오고 건강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15년 넘게 봉사활동을 해오면서, 이 분야에서 안타깝거나 개선해야 할 점이 있다고 느낀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나눔이 획일적이고 일률적이다. 수혜자에 대한 조사나 전략이 없이, 기부자 입장에서만 돕는 경우가 많다. 해외원조를 받아본 경험이 있는 우리가 주는 경험까지 합쳐지면 더 좋은 구호전략이 나오지 않겠는가. 또 국가 전체의 틀에서, 행정기관과 기업, NGO의 역할이 명확하게 분담되어야 할 것 같다. 재난구호가 났을 때에도 구호창고를 공유한다든지 효율적으로 큰 틀이 짜였으면 좋겠다. 기부가 많이 늘어났지만, 외국에 비하면 참여도가 낮다. 나눔은 남의 일이 아닌, 나부터 참여해야 하는 일이다. 공동체가 중요하다. 한 사람은 부분인데, 이게 모이면 전체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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