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타이어로 신발 제조… 폭탄 수거해 액세서리로… 세계적 추세이지만 국내서는 이제 싹트기 시작
현수막 하이힐·커피콩 귀걸이… 쓸모없는 물건이 브랜드로
업사이클링 대표 주자들
‘프라이타크(Freitag)’는 스위스의 ‘국민 브랜드’로 불린다. 폐(廢)방수천을 활용해 만든 가방을 판다. 연매출은 700억원을 넘어선다. 1993년부터 20년 넘게 한길만을 걸어온 결과다. 국내에도 ‘제2의 프라이타크’를 꿈꾸는 업사이클링(Upcycling) 대표 주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업사이클링은 버려지는 소재를 다시 활용하는 ‘리사이클링’과 다르다. 버려진 물건에 디자인을 접목해 완전히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5년 전, 7개에 불과하던 브랜드도 지난해 말 68개까지 9배가량 늘었다. 빨리 만들고 빨리 버리는 패스트 패션 시대에 과연 업사이클링 열풍은 돌풍이 될 수 있을까. 편집자 주
“불 끄는 소방호스 아시죠? 그걸로 만든 신발이에요. 내구성이 뛰어나고 가벼워 소재의 완성도가 가죽 못지않죠. 밑창은 폐타이어고요. 소방호스가 영국은 주황색이고 미국은 검은색이에요. 우린 흰색이라 흰 신발밖에 못 만들어요(웃음).”
지난 14일, 서울 마포구 마을장터 ‘늘장'(공덕역 1번 출구)에 새롭게 문을 연 ‘업사이클링 트렌드 스토어’에서 천재용 리틀파머스 대표가 손님맞이로 분주했다. 늘장은 하루 1000여명이 찾는 시민 장터다. 이곳에 업사이클링 제품만을 모은 편집매장이 최초로 들어선 것이다. 13개 브랜드가 함께 힘을 모았다. 가방, 액세서리, 지갑, 유리컵, 셔츠와 방석 등 제품은 일반 매장과 다르지 않다. 다만 제품 하나마다 설명을 들어보면 ‘우와~’ 탄성이 나온다. 영자신문으로 만든 지갑, 폭탄으로 만든 팔찌들, 버려진 데님으로 만든 가방까지 상상치 못한 소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폐타이어는 처치에 애를 먹는 폐기물이에요. 20% 정도만 재활용돼요. 타이어 안에 굉장히 강한 철망이 들어있는데, 그걸 자르는 기술이 없거든요. 대부분 폐차장에서 통째로 갈아 버리거나, 태워 없애죠.”(천재용 대표)
특히 눈에 띄는 건 소방호스와 폐타이어로 만든 신발이다. 국내 패션 브랜드 ‘쌈지’가 2011년 론칭한 윤리적 패션 전문 브랜드 리틀파머스에서 만든 제품. 폐타이어가 신발 밑창으로 자리 잡기까지 무려 2년여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이리저리 잘라도 보고, 아예 갈았다가 다시 뭉쳐보기도 했다. 가죽 가공 기법을 활용해 타이어 겉면을 얇게 발라내는 기술을 익히기까지 1년, 이를 실제 공정에 적용하는 데 또 1년이 걸렸다. 갖은 고생 끝에 폐타이어로 밑창을 만들었는데, 공정 단가가 2만원이 넘었다.
천 대표는 “중국에서 밑창을 수입해오면 개당 4000원 정도”라며 웃었다. 첫해 소방호스 신발 가격은 7만9000원으로 책정됐는데(현재는 8만9000원) 마진이 0원이었다. 리틀파머스는 이후 타이어 회사와 협약을 맺고 폐타이어를 대량으로 공급받았다. 리틀파머스는 2011년 서울 홍대, 일산 킨텍스, 잠실 롯데월드 등 5곳에 업사이클링, 적정기술, 친환경 제품만을 판매하는 편집매장을 오픈했다. 첫해 매출은 4억4000만원. 지난해 19억8000만원까지 무려 4배 가까이 성장했다.
“삶 자체를 바꾸고 싶어 하는 트렌드가 생기고 있어요. 미국’파타고니아’라는 브랜드가 비싸도 인기 있는 이유가 죽은 오리 털만 골라서 옷을 만든다는 스토리 때문인 것처럼요. 디자인으로 승부하면 결국 달라질 겁니다.”
◇韓업사이클링 1세대, 터치포굿·에코파티메아리
업사이클링 트렌드는 이미 세계적인 추세다. 기존 주류 패션도 주목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 ‘펜디(Fendi)’는 지난 2006년 자투리 가죽이나 천 등 재활용 소재로 핸드백을 제작하는‘카르미나 캠퍼스’를 론칭했고, 패스트 패션을 대표하는 글로벌 브랜드인 ‘유니클로’나 ‘베네통’ ‘에이치앤엠’ 등도 자체 수거·재활용 캠페인을 활발히 펼치며 흐름에 발맞추고 있다. 국내에서는 코오롱이 지난 2012년 대기업 최초의 업사이클링 브랜드 ‘래;코드’를 론칭했다. 박미현 한국업사이클링디자인협회 회장(터치포굿 대표)은 “60개가 넘는 업체 중 절반 이상이 지난해 생겼을 만큼 최근 급격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
국내에서 1세대 업사이클링 대표 주자로 불리는 곳은 ‘터치포굿’과 ‘에코파티메아리’다.
“폐기물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을 때였어요. 구청 같은 데 현수막을 얻으러 가면 ‘도대체 뭐에 쓰려고 그러느냐’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죠.”
박미현 대표의 말이다. 2008년 설립된 사회적기업 ‘터치포굿’은 명실상부 국내 업사이클링 문화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곳이다. 선거 현수막을 활용해 가방·지갑 등 패션 소품을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지만 시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박미현 대표는 “외부 판매 행사에서 다들 ‘예쁘다’는 반응이었는데, 폐현수막으로 만들었다고 하니까 표정이 확 바뀌었다”며 “갑자기 굉장히 더러운 물건을 대하듯 했다”고 말했다.
터치포굿은 소비자 인식을 바꾸기 위한 시도를 꾸준히 펼쳤다. 설립 후 지난해까지 업사이클링 제품을 약 13만개 생산·판매했고, 아동 및 성인 5만5000여명에게 환경교육을 진행했다. 최근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도 개발했다. 정부와 기업, 개인을 대상으로 재활용 원자재를 제공받은 후 이를 기념품, 사내 캠페인 물품 등으로 만들어서 되돌려주는 ‘리싱크(Re-sync)’ 서비스다. 지난해 매출액은 5억원으로, 사업은 어느덧 궤도에 올랐다.
‘에코파티메아리’는 터치포굿보다 2년 앞선 2006년 봄, 아름다운가게에 소속된 재활용 디자인 사업부로 첫선을 보였다. 이 브랜드의 대표 상품이 가죽 소파 조각을 모아 만든 ‘패치 가죽 클러치’인 데에도 사연이 있다. 김태은 에코파티메아리 디자이너는 “기증받은 가죽은 대부분 자투리인데 사이즈가 제각각이다 보니 이들을 붙여 패치 가죽 제품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면서 “구할 수 있는 소재에 맞춰야 하는 게 업사이클링 디자인”이라고 말했다.
◇2세대 청년 그룹, 대거 업사이클링에 도전장
최근 국내 업사이클링 시장에는 주류 패션 시장과 경쟁하는 디자이너 브랜드도 등장했다. 디자인과 소재가 독특해, ‘남들이 갖지 못한 나만의 독특한 브랜드’를 원하는 젊은 층에게 인기를 끈다. 버려진 데님(청바지 원단)을 활용해 가방과 지갑을 만드는 ‘젠니클로젯’이다. 지난해 초 온라인을 통해 제품이 처음 소개된 이후, 소문만으로 굳건한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작년 6월엔 동대문의 복합쇼핑몰 ‘롯데피트인’에 입점해 1층 평효율(3.3㎡당 판매액)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현재 ‘골프존’ 본사와 협약을 맺어 골프존 매장에 데님 미니 파우치 백을 납품하고 있으며, CJ홈쇼핑, 롯데몰, 국립현대미술관 등의 입점 제안도 받고 있다.
청년 소셜 벤처 그룹도 이 흐름에 대거 가세하고 있다. 피스밤(Peacebomb)은 세계 25개국 이상에서 사랑받는 브랜드인데, 소재가 독특하다.
“월남전으로 고생했던 라오스 땅은 전 세계에서 폭탄이 가장 많이 박혀 있는 곳으로 , 모두 제거하는 데 800년이 걸릴 정도라고 해요. 현지인들의 생계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죠. 2005년 미국의 소셜 벤처 ‘아티클(Article)22’가 시작한 피스밤은 이를 제거해 마을 재생을 돕고, 수거한 폭탄은 팔찌 등 액세서리로 탈바꿈시키는 일을 합니다.”
뉴욕 거주 당시 이 회사와 맺었던 인연으로 지난해 초 ‘피스밤 코리아’를 맡게 된 양선이 대표는 “미국에 비하면 아직 국내에선 거부감이 조금 있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아직 우리나라는 시장이 작아, 완제품을 들여온다. 수익금의 절반 이상이 베트남에서 폭탄을 치우는 데 기부되는 시스템이라 제품 가격이 다소 높은 편이다.
인하대 창업 동아리로 시작, 2011년부터 업사이클링 브랜드 ‘쏘리(SSORRY)’를 선보이고 있는 사회적기업 ‘최고의환한미소’. 의류 디자인을 전공한 최환 대표는 현수막으로 하이힐을 만든다. 2011년 겨울, 최 대표는 경기도 포천의 한 원단 공장으로 들어갔다. “공장에서 허드렛일 도우면서 원단에 대해 배우고, ‘수퍼 현수막’을 만들어보겠다”는 각오였다.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였던 공장 일꾼들 사이에서 돈 한 푼 안 받고 6개월을 보냈다. 공장에서 남는 각종 원단 자투리를 조금씩 모아서 닥치는 대로 현수막에 붙여봤다. 2013년, 최 대표의 노력은 ‘현수막을 인조가죽으로 만드는 기술특허’라는 결실로 나타났다. 이후 현수막 하이힐은 쏘리의 대표 상품이 됐다.
◇업사이클링 패션 넘어 인테리어까지 등장
다양한 소재를 활용한 청년 그룹들이 동참하면서 소재를 수거하는 현장에서도 사투가 벌어진다. “버려진 종이를 주 재료로 쓰는데, 실제로 버린 종이를 주워 쓰진 않아요(웃음). 소비자들이 싫어하거든요. 영화관을 돌아다니며 상영 기간 끝난 영화 포스터를 받아오거나, 아는 지인들 집에 전화를 돌려 지도책을 받기도 하죠. 요즘엔 ‘내비게이션’이 있어 지도는 잘 안 보니까요.”
지난해 6월에 업사이클링 소셜 벤처 ‘빌로우1도씨’를 설립한 김유화·조상아 공동대표의 말이다. 최근엔 몽당연필, 커피 원두, 솔방울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한 실험적인 제품도 선보이고 있는데, 커피 원두를 코팅해 만든 귀걸이가 가장 큰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업사이클링 인테리어 제품까지 등장했다. 지난해 2월 설립된 ‘세컨드비’는 자전거 소모품을 재활용해 인테리어 소품 등을 만든다. 2013년 ‘루미나리에 갤러리’에서 첫선을 보인 후 마니아층을 확보했고, 창업까지 연결됐다. 대표 제품인 휠시리즈(Wheel Series) 조명은 오는 5월부터 서울시립미술관에도 들어갈 예정이다. 정지은 세컨드비 대표는 “체인이나 휠 같은 자전거의 폐소모품은 집 주변의 자전거 매장을 수시로 다니며 수집하고 있다”며 “최근엔 안정된 수급을 위해 공급망을 넓히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이 밖에 ‘프롬빈’은 폐기 처분된 타폴린(Tarpaulin·방수천의 일종)과 안전벨트를 조합해 가방을 만들고, ‘저스트프로젝트’는 빨대·과자·라면봉지 등 비닐 소재를 활용해 가방이나 명함 지갑 같은 ‘트라이앵글 백(Try Angle Bag)’을 만든다.
한편, 2011년부터 서울 종로구 창신동 봉제공장 지역에서 마을 재생 활동을 하는 사회적기업 ‘000간’도 업사이클링 패션에 도전장을 냈다.
“창신동이 동대문 시장의 배후기지 역할을 하는 곳이다 보니 잉여 옷감이 많이 나왔어요. 이를 활용해 지역에 도움을 주고자 ‘제로웨이스트’라는 브랜드를 만들었죠.”
자투리 원단으로 만든 제로웨이스트 셔츠, 방석, 마우스 패드 등은 2년 새 ‘000간’ 매출의 30%를 넘을 만큼 성장했고, 이는 다시 지역으로 재투자됐다.
◇업사이클링, 진짜 돌풍이 되려면
업사이클링 바람이 돌풍이 될 수 있을까. 관계자들은 “아직 걸림돌이 많다”고 입을 모았다. 소비자의 인식은 여전한 장벽이다. 업사이클링 업체의 한 대표는 “수거나 제조 과정에서 일일이 손작업을 거치는 등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도 ‘쓰레기로 만들었는데 왜 이렇게 비싸냐’는 말을 들을 땐 힘이 쭉 빠진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생산과 제조, 판매 과정에 ‘계산이 서지 않는다’는 점도 애로사항이다. 장은영 ‘프롬빈’ 대표는 “판매량이 일정치 못하다 보니, 수거하는 원자재의 양도 들쑥날쑥할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원자재를 수거하는 공장과 정식으로 협약을 맺기도 모호하다”고 했다. 박미현 회장은 “업사이클이 더 발전하기 위해선 이를 하나의 산업으로 보고, 이에 대한 투자와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며 “재활용의 특성상 표준화가 어렵긴 하지만, 기존 산업과는 다른 개념으로 표준화를 발전시켜 나가면서 생산 및 품질관리의 일관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