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없는 사회는 없습니다. 경중(輕重)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선진국에도 차별은 있습니다. 미국에서 살 때, 한국의 어린이집에 해당하는 ‘프리스쿨(preschool)’ 월 보육료가 3개월째 100불씩 추가 청구된 적이 있었습니다. 첫 달에 분명 수정을 요구했는데, “알았다” 하고선 반복됐습니다. 프리스쿨 행정실에 찾아가 항의하니, 처음 듣는다는 태도로 “지역 교육청에 가서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역 교육청 담당자는 “프리스쿨에서 잘못된 정보를 준 것이니, 그쪽에서 해결하라”고 싸늘하게 말했습니다. 양측의 핑퐁을 거친 끝에 다시 프리스쿨. 도로시라는 행정담당자는 경멸하는 듯한 투로 “알았어. 해주면 되잖아”라고 했습니다. 내 잘못도 아닌 일로 하루 종일 여기저기서 무시당하고 집에 오니, ‘한국의 결혼이주 여성 심정이 이렇겠지’ 하면서 억울하고 서러워 눈물이 났습니다.
최근 포스코에너지·프라임 베이커리·남양유업 사건, 뒤이은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을 지켜보면서 저는 ‘사람값’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모든 것에 값이 매겨지는 자본주의 사회에 익숙하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사람한테도 값을 매기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요. 포스코에너지 임원, 프라임 베이커리 사장, 남양유업 영업사원의 맘속에는 ‘나는 쟤들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을 겁니다. 윤창중 전 대변인 또한 스물한 살 여성인턴에 대해 ‘좀 함부로 해도 괜찮겠지’ 하는 무의식이 있었을 겁니다. 기념식 행사 내빈소개를 할 때, 사망자 위로금이나 이혼 위자료를 산정할 때 등등 서열과 사람값이 매겨지는 건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습니다. 갑을 관계의 ‘을’만이 아니라, 아동·청소년·장애인·여성·다문화 가정·노인 등 소위 ‘돈 안 되는’ 대상에 대한 차별은 뿌리 깊습니다.
헌법 제2장에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11조1항)’고 돼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돈과 권력, 명예. 세 가지 잣대에 따라 사람은 때로 ‘금값’이 되고 때로 ‘×값’이 됩니다.
내 몸값만 아무리 높인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금값이라고 해서 미국에서 금값 대접을 받지는 못하니까요. 오히려 값을 매기지 않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승자 아닌 패자, 강자 아닌 약자, 가해자 아닌 피해자의 입장을 더 배려해야 합니다. 내가 무시하는 그 누군가도 알고 보면 세상에서 단 한 명뿐인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