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중립 위해선 분산형 전력체계 전환 필수
한국 전력정책이 가스발전 확대와 가상발전소(이하 VPP·Virtual Power Plant) 도입 사이에서 기로에 서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국제사회가 이미 수십GW 규모의 VPP를 가동하며 전력 피크와 탄소 감축을 동시에 해결하고 있는데, 한국은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에너지·기후 분야 싱크탱크 기후솔루션은 28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탄소중립을 위해 화력발전 중심의 중앙집중형 전력시스템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대규모 가스발전 확대를 중단하고 가상발전소 중심의 분산형 전력체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경제성·탄소감축 동시에 가능한 VPP
보고서에 따르면 VPP는 태양광·풍력 같은 재생에너지와 전기차 배터리, 가정 내 전기기기 등을 묶어 단일 발전소처럼 운영하는 시스템이다. 새 발전소를 짓지 않고도 전력을 모으고 분배할 수 있어 비용과 배출량을 줄이는 동시에 재생에너지 변동성에도 대응할 수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50년 탄소중립 시나리오에서 전력 유연성의 절반 이상을 ESS(에너지저장장치)와 DR(수요반응)이 담당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 자원들을 연결해 운영하는 VPP야말로 미래 전력시스템의 핵심 축이라는 분석이다.
실제 미국은 현재 30GW 규모 VPP를 운영하며 2030년까지 160GW로 확대, 전력 피크의 20%를 담당할 계획이다. 호주와 유럽도 유사한 제도를 운영 중이다. 비용 면에서도 신규 가스발전소(㎾당 99달러)의 절반인 43달러 수준에 400MW 전력 확보가 가능하다. 구축 기간도 수개월이면 충분해 수년이 걸리는 가스발전소보다 훨씬 빠르다.
◇ 한국, 제도 걸림돌에 ‘걸음마 단계’
반면 한국은 걸림마 단계에 머물러 있다. 제주도에 약 200MW 규모의 VPP 기반이 마련됐지만, 전국적 확산은 요원하다. 보고서는 그 원인으로 파편화된 제도와 미비한 인프라를 꼽았다.
현재 DR은 전력거래소의 별도 시장에서만 운영돼 VPP와 통합 입찰이 불가능하다. 한국전력의 부하차단 제도는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에 머물러 있고, 산업부 고시에도 전기차가 소규모 전력자원으로 포함되지 않아 전국 40만기 이상 깔린 전기차 충전기를 활용하기 어렵다. 충전기도 대부분 단방향이고, 스마트 계량기(AMI)도 구형이 많아 실시간 데이터 수집이 힘들다. 무엇보다 독립적 배전망운영자(DSO) 부재가 시장 참여를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기후솔루션은 ▲대규모 가스발전 확대 정책 중단 ▲가상발전소 자원의 가치를 반영하는 시장 보상체계 개편 ▲양방향 충전기 및 고도화된 계량기 보급 ▲독립적 DSO 설립 등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보고서 저자인 임장혁 기후솔루션 연구원은 “탄소중립을 위해 화력발전 확대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며 “AI와 배터리 기술 기반이 강한 한국은 VPP 확대를 통해 세계 시장에서 경쟁할 조건을 갖췄지만, 규제와 제도가 발목을 잡고 있는 만큼 시장 조성과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