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신지현 서스틴브릿지 대표 썸네일
[People&Planet] AI 시대, 기업의 주인은 누구인가?

올해만큼 기업의 거버넌스가 뜨거운 화두였던 적이 있었나 싶다. 2020년대 초 기업들이 앞다퉈 ESG 사업을 기획하던 무렵, 한 오너 기업 실무자는 “우리는 지배구조는 건드릴 수도 없다”고 말했다. 소유와 경영, 의사결정의 체계를 아우르는 거버넌스는 그만큼 대중은 물론 임직원조차 쉽게 다가서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분위기를 바꾼 것은 반도체 호황이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에서 성과보상 논쟁이 불붙으면서 “초과이익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투자한 주주의 몫인가, 아니면 이익을 만들어낸 임직원의 몫인가”라는 질문이 공론장에 올랐다. 여기에 SK하이닉스가 7월 10일 미국 나스닥에 ADR로 상장하면서 글로벌 투자자들의 시선까지 SK의 지배구조로 쏠렸다. SK 주식 한 주로 SK하이닉스와 앤트로픽에 함께 투자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는 분석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 모든 논의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기업의 주인은 누구인가. ◇ 왜 지금, 기업의 주인을 묻는가?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용어부터 정리해 둔다. 이 글에서 ‘거버넌스’는 기업 운영과 비즈니스의 모든 구조, 체계, 프로세스, 이해관계 속에서 지속가능성을 고려해 의사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을 뜻한다. 반면 ‘지배구조’는 ESG 투자에서 주주 권리와 이사회의 통제 기능을 중시하며, 기업의 소유와 통제 방식을 가리키는 더 좁은 개념이다. ‘기업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 질문이 지금 특히 중요한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주주의 관점에서 거버넌스가 기업가치와 직결되기 시작했다. 자본시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지배구조와 이익 배분, 보상체계를 둘러싼 이해관계가 한층 첨예해졌다. 자본시장연구원의 《코리아 디스카운트 원인 분석》에 따르면, 지배구조에 대한 정성적 평가가 높은 국가일수록 주가순자산비율이 높게 나타나며, 한국 기업의 저평가 역시

[임팩트비즈니스 인사이트] 1만 개의 위성은 누구의 문제를 해결하는가

최근 뉴욕 기후주간(Climate Week NYC) 등 글로벌 무대에서는 우주 기술과 AI를 결합한 ‘우주발 기후 인텔리전스(Climate Intelligence from Space)’가 기후위기 대응의 핵심 솔루션으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북극과 같은 극한 환경에서의 기후 적응부터 공공 조달과 민관협력(Policy & Market Uptake)에 이르기까지, 위성 데이터는 이제 공공과 시장의 실질적인 의사결정을 바꾸는 도구로 논의되고 있다. 바야흐로 1만 위성의 시대다. 이번 IBR에서는 이러한 글로벌 흐름에 발맞춰 지구관측(EO) 분야 중 시장 잠재력이 큰 ‘농업’을 중심으로 위성 데이터가 실제 비즈니스와 임팩트로 전환되기 위한 조건을 살펴보고자 한다. 가뭄 피해 농경지, 산림 훼손 지역, 홍수 및 산불 피해 지역에는 공통점이 있다. 문제가 넓은 공간에 흩어져 있어 현장 조사만으로는 전체 상황을 제때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부 주도의 우주개발에서 민간의 역할이 커진 뉴스페이스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러한 비용 구조도 달라지고 있다. 위성 수가 늘고 관측 주기와 해상도가 개선되는 동시에 Sentinel, Landsat과 같은 무료 공개 데이터와 클라우드 분석 환경, 오픈소스 도구도 확대됐다. 올해 6월 SpaceX의 상장은 이러한 민간 우주산업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임팩트 투자자에게 더 중요한 변화는 산업의 성장 자체보다, 과거에는 높은 비용 때문에 자주 관측하기 어려웠던 지상의 문제를 얼마나 넓고 빈번하게 살펴볼 수 있게 됐느냐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영역이 지구관측(Earth Observation, EO)이다. EO는 작물의 생육과 가뭄, 수자원, 산림 훼손, 재난, 대기 중 온실가스의 변화 등을 넓은 지역에 걸쳐 반복적으로

박지현 JHSUSTAIN 대표 썸네일
[People&Planet] 재해는 겹쳐서 온다

2026년 8월 26일 오전 8시 40분, 네팔–중국 국경 인근 렌데강 상류에서 약 1㎢에 이르는 빙하와 암반이 떨어져 나갔다. 폭우도 없던 아침이었다. 뜨거워진 지구는 히말라야의 빙하를 빠르게 녹이고 있고, 얼음으로 이루어졌던 비탈은 녹아내리고 있다. 기후변화는 재해를 더 자주, 더 크게 만들 뿐 아니라,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방식으로 겹쳐서 오게 만든다. 2023년 타지키스탄을 대상으로 녹색기후기금(GCF) 사업을 발굴하기 위해 사전 조사를 하면서 두 줄기의 물이 만나는 곳을 본 적이 있다. 한쪽에서는 빙하가 녹아서 내려온 물이 흘렀다. 산을 깎으며 실어 온 고운 돌가루 때문에 우윳빛이 도는 잿빛이었다. 다른 쪽에서는 빗물과 샘물이 모인 여느 하천이 흘렀다. 두 물은 섞이지 않은 채 제 빛깔대로 나란히 흘러갔다.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필자에게는 경고처럼 보였다.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마시고 농사짓는 물의 상당 부분이 파미르와 톈산의 빙하에서 시작된다. 빙하가 빠르게 녹으면 당장은 물이 넘치지만, 그 끝에는 홍수와 가뭄이 번갈아 찾아온다. 녹은 물이 고인 빙하호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물주머니가 된다. 2025년을 ‘세계 빙하 보존의 해’로 만들자고 유엔에 제안한 나라가 바로 타지키스탄이었다. 두 빛깔의 물은 기후가 산을 바꾸는 속도를 가장 먼저 보여 주는 지표이다. 네팔의 협곡에서 일어난 일은 결코 히말라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번 네팔 대홍수로 사망자는 1400명을 넘었고, 5000명이 넘는 이들이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협곡을 따라 늘어선 14곳의 발전 사업장이 한꺼번에 멈췄고, 터널 안팎에서는 900명이 넘는 노동자와 연락이 끊겼다. 강둑에는 2015년 대지진으로 삶터를 잃고

[사회혁신발언대] 창업가의 다음 시작, 생태계의 이어달리기

지난 10월 8일, KT&G 상상스타트업캠프 10기 파이널 데모데이와 청년 창업 활성화 비전 선포식이 열렸다. ‘THE NEXT START’를 주제로 10개 소셜벤처가 그동안의 성과와 향후 계획을 공유했고, KT&G는 창업가의 성장에 필요한 자본과 기회를 연결하겠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사업 운영을 함께한 입장에서 이번 비전에는 데모데이 이후에도 창업가의 성장을 지원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느꼈다. 이러한 의지가 실질적인 성장으로 이어지려면, 이제는 생태계의 여러 주체가 각자의 자원과 기회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 함께 고민해야 할 때다. ◇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도 함께하는 성장 데모데이의 마지막 발표는 창업가에게 또 다른 시작이다. 무대에서 발표한 성장 계획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고객을 만나고 매출을 쌓으며, 사업을 키워갈 자금과 동료를 찾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창업가가 축적한 경험과 성과가 다음 기회로 이어지려면, 저마다 다른 일정과 요건에 따라 운영되는 지원사업 간에도 연결이 필요하다. 각 기관이 기업의 성장 과정을 함께 이해하고 필요한 자원을 이어줄 수 있다면, 창업가는 자신의 사업을 거듭 설명해야 하는 부담을 덜고 성장에 더욱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KT&G 상상스타트업캠프 10기 파이널 데모데이와 청년 창업 활성화 비전 선포식에서 축사를 맡은 서종식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창업성장본부장은 사회적기업 창업지원사업의 변화와 정부의 지원 방향을 소개했다. 초기창업형에 더해 인증전환형과 재도전형으로 지원 대상을 확대하고, 사회연대경제기본법 시행을 계기로 부처 간 ‘이어달리기’ 방식의 지원 연계를 강화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정부의 ‘2026년도 사회적기업 정책 방향’에도 담겨 있다. 기업의 생애주기에 맞춰 창업부터 판로·융자까지 지원하고, 분절적으로 제공하던

[사회혁신발언대] 그림자 속의 아이들, 영케어러가 마주한 현실

우리가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 흔히 생각하는 모습은 친구들과 함께 배우고 성장하며, 가정의 보호 속에서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성장과 배움의 시기에 오히려 가족을 돌보는 책임을 짊어진 아동·청소년과 청년들이 있다. 이른바 ‘영케어러(Young Carer)’, 가족돌봄청년이다. 질병, 장애, 고령, 정신건강 문제나 중독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족을 돌보는 이들은 가사와 병원 동행, 일상생활 지원은 물론 생계를 위한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하기도 한다. 이러한 돌봄 부담은 학업과 진로에 영향을 미치고, 사회적 관계의 단절과 심리·정서적 어려움으로 이어질 수 있다. 나아가 청년기의 자립 기반을 약화시키고, 빈곤과 돌봄 부담이 반복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도 가족돌봄청년을 발굴하고 지원하기 위한 정책을 확대해 왔다. 보건복지부는 실태조사를 바탕으로 가족돌봄청년 맞춤형 지원과 일상돌봄 서비스 등을 추진하고 있다. 학교와 병원 등 지역사회 일선 기관을 통한 조기 발굴과 지원 연계의 필요성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영케어러가 자신의 어려움을 드러내지 못한 채 가족 안에서 돌봄을 감당하고 있다. 스스로를 지원이 필요한 대상으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도움을 요청할 곳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돌봄을 개인과 가족의 책임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지역사회와 사회 전체가 함께 책임지는 체계로 전환해야 하는 이유다. ◇ 현장에서 체감하는 영케어러 지원의 필요성 지역사회 복지 현장에서 영케어러를 만나면 이들이 감당하는 돌봄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영케어러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필요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영케어러는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AI 시대, 필란트로피를 묻다] 기술은 나눔을 돕는 수단

그리스어로 ‘인간 사랑’을 의미하는 필란트로피는 단순히 어려운 사람에게 돈을 베푸는 자선만을 뜻하지 않는다. 시민들이 사회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돈과 재산뿐 아니라 시간·지식·기술·관계망을 자발적으로 내어놓으며 공동체의 변화를 만들어 가는 공공적 실천이다. 따라서 필란트로피의 핵심은 기부액의 크기보다 공동체에 대한 책임, 타인에 대한 연대, 그리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시민의 믿음에 있다. 한국 근대의 기부문화와 시민정신도 이러한 과정에서 성장했다. 1896년 독립문 건립 모금은 신분과 지역을 넘어 시민들이 공공의 상징물을 함께 세운 근대적 모금운동의 최초 사례였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 이재민을 돕기 위한 모금은 국경과 민족을 넘어 고통받는 타인을 돕고자 한 인도주의적 실천이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는 상인·노동자·농민·학생·여성 등이 나라의 위기를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고 참여했다. 이후 기부문화는 민립대학설립운동, 물산장려운동, 재해와 기근 구호, 한센병 환자 지원, 해외 한인의 독립운동 자금 모금 등으로 영역을 넓혀 갔다. 이 과정에서 기부는 개인의 선행에 머물지 않고 시민을 조직하고, 공동의 목적을 형성하며, 필요한 제도를 만들어 가는 힘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식민지 권력은 우리 민족의 자발적인 필란트로피 운동을 탄압하고, 전쟁을 위한 국방헌납과 같은 비자발적 모금을 강요했다. 광복 이후에도 독재 정부는 일제가 시행하던 제도를 그대로 답습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필란트로피가 회복되기 시작한 것은 민주화 이후에 이르러서였다. 역사를 돌아보면 필란트로피 운동에는 신문과 언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독립문 건립 당시에는 독립신문이, 국채보상운동 때는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만세보·제국신문 등이 사회문제를 알리고 모금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시민들의 참여 방법을 안내하는 한편,

김효진 위시빌더 대표 썸네일
[People&Planet] 기술은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세탁기는 한때 여성을 가사 노동에서 해방한 발명품으로 불렸다. 젖은 빨랫감을 손으로 비비고 짜던 일을 기계가 대신하게 되면서 생긴 변화는 분명 컸다. 세탁기가 인터넷보다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그러나 세탁기가 등장한 뒤 여성의 삶이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두고는 지금도 논쟁이 이어진다. 2010년 경제학자 다니엘레 코엔피라니(Daniele Coen-Pirani) 등의 연구는 가전제품의 보급이 1960년대 미국 기혼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 증가에 기여했다고 분석했다. 반면 가전제품을 보유한 가정의 생활시간을 살펴본 다른 연구에서는 여성의 무급 가사 노동 시간이 대체로 줄지 않았다. 빨래 한 번이 쉬워졌더라도 더 자주 빨래해야 한다는 기대가 생길 수 있다. 세탁기가 일을 덜어 주어도 세탁물을 챙기고, 널고, 개는 일이 누구의 몫인지는 기계가 결정하지 않는다. 의료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찾을 수 있다. 설사로 인한 탈수를 치료하는 경구수분보충액(ORS)이다. 물과 소금, 포도당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설사로 잃은 수분과 전해질을 보충하는 비교적 단순한 방법이다.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ORS는 콜레라에 걸린 난민 아동을 치료하는 데 사용됐다. 이후 1979년 방글라데시 정부는 유니세프의 지원을 받아 전국적인 경구수분보충 캠페인을 시작했다. 효과적인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 보건인력을 교육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체계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모든 아이가 이 치료를 받는 것은 아니다. 유니세프가 2026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설사를 앓는 아동 가운데 ORS와 아연을 함께 투여받는 비율은 세계적으로 약 22%다. 효과가 입증된 방법을 필요한 때에 구할

김민석 마스턴투자운용 센터장
[People&Planet] 대체투자 자산운용사에 왜 ‘사회공헌추진단’이 생겼을까

대체투자 전문 자산운용사에 사회공헌추진단이 생겼다고 하면 고개를 갸웃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대기업 계열도, 금융지주 계열도 아닌 독립계 자산운용사라면 물음표는 더 커진다. 게다가 개인 고객을 상대하는 리테일보다 연기금과 공제회 같은 기관투자자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전형적인 B2B 비즈니스를 하는 회사라면 더욱 그렇다. 자산운용사라고 하면 대개 숫자와 수익률, 투자 구조 같은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반면 사회공헌은 소비자와 직접 만나는 기업이나 이익 규모가 큰 대기업의 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니 상업용 부동산에 주로 투자하는 대체투자 하우스가 대표이사를 단장으로 한 사회공헌 조직을 꾸렸다는 소식이 다소 생경하게 들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기업의 사회공헌은 대체로 두 가지 동력으로 움직여 왔다. 하나는 그룹 차원의 방침이다. 계열사마다 사회공헌 예산과 조직을 두고 그룹의 가치를 함께 실천하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소비자와의 관계다. 브랜드 이미지가 곧 매출로 이어지는 B2C 기업일수록 사회공헌에 공을 들인다. 독립계 대체투자 운용사에는 둘 다 없다. 사회공헌을 하라고 요구하는 모회사나 지주사도 없고, 예산과 방향을 내려보내는 그룹 컨트롤타워도 없다. 사회공헌 소식을 보고 상품에 가입해 줄 대중 소비자도 거의 없다. 하지 않을 이유는 많지만, 해야 할 ‘외부의 이유’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구조다. 누가 시켜서도, 누구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도 아니라면 실마리는 안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 기업이 무엇으로 먹고사는지, 곧 ‘업의 본질’이다. 필자는 롯데그룹에서 커뮤니케이션과 CSR 업무를 경험하며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사회공헌이 오래 지속되려면 바로 그 업의 본질에서 출발해야

[사회혁신발언대] 교실 뒷자리, 집안일을 걱정하는 아이들

아침 자율학습 시간, 책상에 엎드려 깊은 잠에 빠진 학생이 있다. 준비물을 자주 챙겨 오지 못하거나 방과 후 친구들과의 모임을 한사코 마다하는 학생도 있다. 겉으로는 소극적이거나 학업 의욕이 부족한 학생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일상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중병이나 장애, 정신질환을 겪는 부모나 형제를 돌보고 집안일까지 책임지는 ‘영케어러(가족돌봄청소년)’의 고단한 삶이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동안 영케어러 문제는 개별 가정이 감당해야 할 사적인 어려움이나 ‘효행’의 관점에서 다뤄지곤 했다. 그러나 교육 현장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다르다. 과도한 돌봄 부담은 청소년이 누려야 할 학습과 휴식, 관계와 성장의 기회를 제약한다. 한 개인과 가족의 문제를 넘어 청소년의 기본적인 발달권을 위협하고,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비용을 키울 수 있는 구조적 문제다. 첫째, 돌봄 부담은 일상적인 학업 결손을 낳고 미래의 기회까지 제한할 수 있다. 만성적인 피로와 밤샘 간병은 지각과 결석, 수업 집중도 저하로 이어진다. 학습 결손이 장기간 누적되면 진학과 진로 선택의 폭이 좁아지고, 노동시장 진입과 경제적 자립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청소년기에 짊어진 돌봄의 무게가 한 사람의 생애 전반을 흔들 수 있는 이유다. 둘째, 기존의 ‘신청주의’ 복지 체계만으로는 이들을 발견하기 어렵다. 영케어러 청소년 상당수는 가족의 질병이나 경제적 어려움을 외부에 알리는 것을 꺼린다. 자신이 수행하는 돌봄을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 ‘가족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받아들이기도 한다. 스스로 복지기관을 찾아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운 특성이 있는 만큼, 학생들의 변화를 일상적으로 관찰할 수

[사회혁신발언대] 홀로 돌보는 아이들, 이제는 함께

“나는 혼자 전쟁터에 서 있었고 나를 잃어가며 누군가의 하루를 지켰다.” 인천광역시청년미래센터의 수기공모전 모음집 ‘마음을 전하는 청년들의 기록’에 담긴 한 가족돌봄 청소년의 고백이다. 이 짧은 한 문장에는 보호받고 성장해야 할 시기에 홀로 돌봄의 무게를 감당해야 했던 아픔과 고립감이 담겨 있다. 초록우산이 현장에서 만나는 가족돌봄아동·청소년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또래들이 진로를 고민하고 미래를 준비할 때, 이들은 아픈 가족의 약을 챙기고 생계를 걱정한다. 이제 가족돌봄아동·청소년의 문제는 개인이나 한 가정만의 어려움으로 남겨둘 수 없다. 우리 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구조적 문제다. 현장에서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이들이 감당하는 현실의 무게를 실감한다. 돌봄은 흔히 가족 간 사랑과 책임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보호받아야 할 아동·청소년이 오히려 부모나 조부모, 아픈 형제자매를 돌봐야 하는 상황은 다르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고립’과 ‘시간의 상실’이다. 가족의 질병이나 장애는 가정의 경제적 기반까지 흔들 수 있다. 생계를 보태기 위해 아이들이 학업을 중단하거나 간병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일도 생긴다. 몸과 마음이 지쳐가는 사이 자신의 미래를 준비할 시간과 기회도 줄어든다. 가족을 돌보느라 자신의 삶을 돌볼 여유를 잃고 번아웃과 고립을 경험하는 아이들도 있다. 아동복지전문기관 초록우산은 2021년부터 가족돌봄아동·청소년을 둘러싼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원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에는 가족돌봄아동·청소년 2267명을 발굴해 긴급 지원을 했다. 특히 돌봄 부담이 높은 117명에게는 ‘돌봄부담경감 프로젝트’를 통해 돌봄코디네이터를 일대일로 연결하고 맞춤형 현금과 서비스를 지원했다. 돌봄코디네이터가 가정을 정기적으로 찾아 돌봄 상황과

[임팩트의 행방불명] 임팩트 프레임워크(SROI, IMP)에 대한 실무적 오해

현장에서 임팩트를 어떻게 측정하는지 물으면 이런 답을 자주 듣는다. “우리는 SROI 기반으로 측정합니다”, “우리는 IMP 기반으로 측정합니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눠보면 대개 의미는 비슷하다. SROI(Social Return on Investment)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은 사회성과를 화폐가치로 환산한다는 뜻이고, IMP(Impact Management Platform)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은 IMP가 제시한 ‘임팩트의 다섯 가지 차원(Five Dimensions of Impact)’에 맞춰 임팩트 리포트를 작성한다는 뜻이다. 물론 틀린 설명은 아니다. 다만 ‘임팩트를 어떻게 측정하는가’에 대한 답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임팩트를 화폐가치로 환산하거나 IMP의 다섯 가지 차원에 맞춰 정리하는 것은 성과를 ‘어떻게 표현하고 보고했는가’에 관한 설명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성과가 어떻게 발생했고, 그중 조직이 실제로 기여한 몫이 얼마인지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 SROI의 핵심은 화폐가치화가 아니다 SROI는 재무적 대용치(Financial proxy)를 활용해 사회성과를 화폐가치로 표현하도록 돕는다. 이 때문에 현장에서는 흔히 ‘SROI=화폐가치화’로 받아들이곤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화폐가치로 환산하기 전 단계다. 어떤 변화를 성과로 볼 것인지, 그 변화 가운데 조직이 실제로 만들어낸 몫은 얼마인지 식별하는 과정이다. 임팩트 측정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관찰된 변화 가이운데 우리 조직이 아니었어도 발생했을 변화(What would have happened anyway)를 제외하고, 조직이 기여한 몫을 구분해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SROI 역시 ‘과대주장 금지(Do not overclaim)’ 원칙을 통해 이를 강조한다. 조직이 만들지 않은 성과까지 자신의 것으로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는 단순히 재무적 대용치를 보수적으로 설정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따라서 SROI의

허재형 썸네일
[발코니에 올라] 함께 일했지만, 함께 달라졌는가

지난 글에서 나는 한 문장을 미완으로 남겨두었다. 협력의 접점은 늘었는데, 협력의 문법은 그대로라는 말이었다. 그 문법이 무엇인지 이번에는 나의 경험으로 답해보려 한다. 루트임팩트는 2018년부터 2024년까지 ‘임팩트커리어W’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결혼과 출산, 돌봄으로 커리어의 흐름이 끊겼던 여성들이 다시 일터로 돌아가도록 돕는 일이었다. 우리는 이들을 ‘경력단절여성’이 아니라 ‘경력보유여성’으로 불렀다. 그 기간에도 갈등을 조율하고, 한정된 시간을 쪼개 문제를 풀고, 중요한 순간마다 결정을 내려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채용 플랫폼과 아이돌봄 서비스, 교육 기관과 글로벌 재단, 그리고 이들을 실제로 채용한 기업들이 함께했다. 7년 동안 백 명 가까운 여성이 과정을 마쳤다. 그중 절반 이상이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함께한 조직 중 일부는 유연근무제나 출산 보호 제도를 새로 도입했다. 숫자보다 놀라웠던 것은 그다음이다. 2021년 성동구가 전국 최초로 경력보유여성 조례를 만들었고, 그 뒤 서른 곳 넘는 지자체가 뒤를 따랐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국회는 법률 용어 ‘경력단절여성’을 ‘경력보유여성’으로 바꾸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2008년 법에 처음 새겨진 말이 열일곱 해 만에 교체된 것이다. 우리가 함께 부르기 시작한 이름이 법률의 언어가 되었다. 그런데 발코니에 올라 이 여정을 다시 내려다보면, 한 가지 질문이 마음에 걸린다. 이 성과 중 우리가 사전에 의도를 갖고 함께 계획한 것은 얼마나 될까. 사실 조례의 확산과 법 개정은 우리가 미리 설계한 경로는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우연히 일어난 일도 아니다. 우리는 파트너들과 함께 경력단절여성을 경력보유여성으로 호명했고, 새로운 이름이 현실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성동구에서 증명했다.

더나은미래 특별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