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세상은 여전히 따뜻한 法] 인간 넘어 자연의 권리를 이야기하다

법은 오랫동안 인간의 권리와 이익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한때는 성인 남성만이 참정권을 가지던 시대도 있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러 이제는 여성, 외국인, 아동·청소년의 권리도 당연히 인정되는 사회가 되었다. 권리의 주체는 끊임없이 확장되어 왔고, 공익 변호사들은 그 변화의 최전선에서 가장 취약한 이들의 곁을 지키며 그들의 권리를 함께 주장해 왔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닌 존재의 권리는 누가 대변할 수 있을까. 법이 보호해야 할 대상은 오직 ‘인간’뿐일까.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땅, 함께 숨 쉬는 나무와 숲, 하늘을 나는 새와 바다를 유영하는 고래에게는 권리가 없는 것일까. 사단법인 선은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곳이다. 사단법인 선은 법무법인 원이 설립한 공익법인이다. 법무법인 원은 2009년 창립 때부터 공익인권에 대한 구성원들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다양한 공익활동을 해왔다. 2013년에는 보다 전문적이고 지속적인 활동을 위해 국내 두 번째 로펌 산하 공익법인인 ‘사단법인 선’을 설립했다. 사단법인 선은 아동, 난민, 이주민 등 전통적인 인권 분야의 법률 지원은 물론, 기후변화와 생태계 보전 등 환경법 영역에서도 선도적인 프로보노 활동을 펼쳐왔다. 사단법인 선은 2013년부터 ‘지구법 강좌’를 운영하며 ‘자연의 권리’와 지구법학(Earth Jurisprudence)을 알리고 있다. 기존 환경법이 인간이 환경을 안전하게 이용하고 그로부터 이익을 얻는 방식에 초점을 맞췄다면, 지구법은 출발점 자체가 다르다. 지구법은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 지구 공동체(Earth Community)의 한 구성원일 뿐이며, 자연은 그 자체로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할 권리를 지닌다는 인식에서 시작한다. 인간중심적 법체계에서 벗어나 생태중심적

[탄소와 사회를 잇는 방식] 탄소감축은 누구의 동의 위에서 이루어지는가

지속가능한 탄소사업을 위한 FPIC의 철학 지난 칼럼 ‘탄소감축량 보다 중요한 질문들’에서는 국제감축사업 현장에서 주민들이 가장 자주 묻는 질문이 탄소감축량이 아니라 “이 사업이 끝난 뒤에도 우리는 계속 사용할 수 있습니까?”라는 점을 이야기한 바 있다. 돌아보면 그 질문은 단순히 사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우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쩌면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는 이 사업을 충분히 이해했고, 정말 동의한 것인가?”라는 질문과도 연결돼 있다. 탄소사업이 장기적으로 지속되기 위해서는 감축량 산정과 투자 구조뿐 아니라 사업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이해와 참여, 그리고 신뢰가 함께 구축되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다시 중요해지는 개념이 바로 FPIC(Free, Prior and Informed Consent), 즉 ‘사전적이고 충분한 정보에 기반한 자유로운 동의’다. 탄소사업은 본질적으로 데이터(Data) 중심 산업이다. 얼마만큼의 탄소가 감축되었는지, 어떤 방법론(Methodology)을 적용했는지, 감축량이 실제 검증 가능한지에 대한 정량적 접근이 사업의 핵심이 된다. 위성 데이터와 GIS 분석, 모니터링·보고·검증(MRV) 체계, 제3자 검증(Verification) 등 복잡한 기술적 과정 역시 탄소사업의 핵 기반이다. 민간 투자 역시 결국 데이터와 사업성 위에서 움직인다. 투자자는 감축량의 신뢰성과 사업 구조의 안정성을 확인하려 하고, 초기 단계에서는 타당성조사(Feasibility Study)와 기술적 검증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NGO의 기부금이나 공공재원은 이러한 초기 리스크를 낮추고 민간 자본의 참여를 가능하게 만드는 촉매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탄소사업이 숫자와 데이터, 기술적 검증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산업이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현장에서 사업의 성패를 결정하는 요소는 기술적 검증만이 아니다. 사업의 영향을 받는 지역사회가 사업의 목적과

[임팩트의 행방불명] 숫자에 갇힌 임팩트 측정, 본질을 묻다

지난 몇 년간 임팩트를 어떻게 측정하고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다양한 시도와 방법론적 발전이 이어져 왔다. 하지만 문제는 임팩트 측정의 역할과 기능이 지나치게 좁게 이해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적 변화가 실제로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탐색보다는, 수집하기 쉬운 산출물(output)이나 단기 성과 중심의 데이터를 정리하고 시각화하는 데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측정이 변화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라기보다, 보고 가능한 숫자를 만들어내는 작업으로 축소되고 있는 것이다. 방법론에 대한 논의 역시 비슷한 한계를 보인다. 임팩트 측정에는 본래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현장에서는 하나의 표준화된 방법론을 찾아 합의하려는 강한 열망이 느껴진다. 글로벌 임팩트 측정 기관인 IDinsight가 설립 초기부터 “각 문제는 그에 맞는 고유한 접근 방식을 필요로 한다(each challenge demands its own approach)”는 원칙을 강조해온 것과는 대비된다. ◇ 임팩트 측정의 본질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시간 표준화를 향한 업계의 열망을 이해한다. 사업마다 임팩트를 측정하는 방식이 다르면, 측정을 담당하는 실무자 입장에서는 새롭게 학습하고 대응해야 할 것들이 많아진다. 의사결정권자 역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제시된 성과를 비교·분석하고 판단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한다. 이렇다 보니 기업의 경제적 성과를 매출과 같은 공통된 지표로 귀결시키듯, 사회적 성과도 표준화·비교 가능한 기준으로 수렴시키자는 요구가 등장하게 된다. 최근에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임팩트를 화폐가치로 표현할 수 있는 지표 중심으로 이해하는 경향도 강해지고 있다. 이러한 요구에 잘 부합하는 것이 산출물이나 단기 성과 중심의 지표들이다. 예를

허재형 썸네일
[발코니에 올라] 댄스 플로어에서 발코니로

하버드 케네디스쿨에서 수십 년간 리더십을 가르쳐온 로널드 하이페츠(Ronald Heifetz)는 리더에게 “발코니에 올라가라”고 권한다. 댄스 플로어 한가운데에 있으면 음악과 몸짓에 휩쓸려 정작 중요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누가 누구와 춤추고 있는지, 어떤 리듬이 반복되는지, 누가 플로어 밖에 홀로 서 있는지는 발코니에 올라야 비로소 보인다. 그는 좋은 리더란 플로어와 발코니를 부지런히 오가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지난 14년을 거의 내내 댄스 플로어에서 보냈다. 루트임팩트를 시작하고 2년쯤 지난 2014년, 우리는 성수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는 성수동 골목을 거닐면 공업소의 쇳소리가 울렸고, 물류창고 앞으로 트럭이 드나들었으며, 수제화 산업의 중심지답게 구두 부자재와 원단 업체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소셜벤처, 임팩트라는 단어조차 설명이 필요하던 시절, 그 골목에서 체인지메이커들이 모여 일할 공간과 커뮤니티를 짓고 사람과 조직을 잇고 돋우는 일을 해왔다. 그리고 이번 여름 나는 CEO 자리에서 물러나 이사장이자 공동창업자로서 한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동료들을 돕는 역할로 옮겨간다. 지난 6개월간 바통을 건넬 준비를 하며 자연스럽게 하게 된 일은 오래 머물렀던 플로어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풍경은 분명 달라졌다. 쇳소리가 울리던 골목에 카페와 브랜드 매장이 들어섰고, 성수동은 이제 ‘소셜벤처 밸리’라는 이름이 어색하지 않은 동네가 되었다. 임팩트 투자의 대상은 사회적기업과 소셜벤처를 넘어 일반 스타트업까지 확장됐다. 정부와 지자체, 기업과 재단도 임팩트 투자에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 다수의 정부 부처가 사회연대경제, 사회혁신 조직 육성 정책을 다투어 내놓았다. 대기업은 지원 대상을 넘어 사회적 가치 창출의 파트너로 협력하기 시작했으며 여러

김정태 엠와이소셜컴퍼니 대표
[사회혁신 발언대] 탄소 감축만 거래하나요? 청년을 키운 성과도 보상합시다

서울대학교에서 사회혁신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이번 학기에 들은 수업은 ‘사회적 가치의 경제학’이었다. 사회문제 해결의 성과를 경제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사회적 가치는 어떤 방식으로 측정되고 보상될 수 있는가를 다루는 수업이었다. 수업을 들으며 한 가지 생각이 더 명료해졌다. 우리는 탄소를 줄인 성과를 측정하고 거래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회적기업이 창출한 사회성과 역시 측정하고 보상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청년이 첫 경력을 얻도록 만든 성과는 왜 측정하고 보상할 수 없을까.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청년들이 졸업 후 첫 일자리를 얻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11개월에 달한다. 어렵게 첫 직장에 들어가도 평균 근속기간은 1년 7개월 남짓에 불과하다. 첫 일자리를 얻는 데는 1년 가까이 걸리지만, 정작 첫 경력은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마무리되는 셈이다. 이 짧은 통계 숫자 뒤에 있는 청년의 낙담과 불안을 우리는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다. 이 사회에 내 자리가 과연 있을까?” 서른 살, 첫 직장에 들어가기 몇 년 전 일기장에 적어두었던 문장이다. 서른이 되도록 직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나 역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 청년 실업이 아니라 ‘첫 경력 사다리의 붕괴’ 청년 고용 문제는 단지 일자리 수의 부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본질은 청년이 ‘첫 경력’을 얻는 난이도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다는 데 있다. 첫 직장은 단지 월급을 받는 곳이 아니다. 직무를 배우고, 조직 안에서 일하는 감각을 익히며, 무수한

[필란트로피 인사이트] 숫자로 잡히지 않는 기부는 기부가 아닌가

필란트로피는 흔히 기부금의 규모나 기부 참여율로 설명된다. 한 해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기부했는지, 총 기부금은 얼마인지, 국내총생산이나 국민총소득 대비 기부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가 주요 지표로 제시된다. 그러나 필란트로피를 숫자로 측정하는 순간, 우리는 중요한 질문 앞에 선다. 무엇을 기부로 인정할 것인가. 그리고 숫자로 포착되지 않는 나눔은 필란트로피가 아닌가. 인디애나대학교 로버트 페이턴(Robert Payton) 교수는 필란트로피를 “공익을 위한 자발적 행동(voluntary action for the public good)”이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의 핵심은 두 가지다. 행동의 목적이 공익(public good)을 향해야 하며, 동시에 그 행동은 자발적(voluntary)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실제 기부 현장에서도 중요하게 적용된다.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교(NCSU) 펀드레이징팀에서 근무하는 릴리 에드먼슨(Rilly Edmondson) 씨는 조건이 붙은 기부는 대학이 원칙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특정 상품 판매 수익의 일부를 기부하겠다는 방식의 캠페인으로 조성된 기부금은 받지 않는다. 기부가 사적 목적이나 이해관계를 전제로 할 경우, 이를 자발적인 공익 추구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익을 위한 자발적 행동”은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자발적이고 공익적인 행동을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측정하고 있는가. 지금의 측정 방식은 필란트로피의 본질을 충분히 담아내고 있는가. ◇ 필란트로피 측정의 국제적 흐름 전 세계 필란트로피 연구자들은 국가별 기부 수준과 필란트로피 규모를 측정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를 수행해왔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Giving USA, 영국 자선지원재단(CAF·Charities Aid Foundation)의 Giving Survey, 캐나다의 CSGVP(Canada Survey of Giving, Volunteering and Participating),

[박훈의 나눔과 세금] 돌잔치가 사라진 시대, 출산을 축하하는 법

한때 아기의 첫 생일상에는 으레 금반지가 올랐다. 한 돈짜리 앙증맞은 금반지에 “건강하게 자라라”는 덕담을 얹어 건네던 풍경이다. 그러던 것이 금값이 천정부지로 뛰면서, 금반지는 슬그머니 봉투 속 현금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요즘은? 아예 돌잔치를 건너뛰는 집이 부쩍 늘었다. 축하할 아기가 줄어든 탓도 있고, 번거롭게 사람을 부르지 않으려는 분위기 탓도 있다. 새 생명을 맞이하는 방식이 이렇게 조용히 변해왔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저출산이라는 큰 숙제 앞에서 우리가 정작 놓치고 있는 것은 ‘돈을 얼마나 더 줄 것인가’가 아니라 ‘아이의 탄생을 어떻게 함께 기뻐할 것인가’인지도 모른다. 아이가 태어나면 온 동네가 떡을 돌리고, 일가친척과 이웃이 너나없이 축하를 건네던 그 온기 말이다. 2024년 초, 한 기업이 직원에게 자녀 한 명당 1억 원의 출산장려금을 주겠다고 발표해 화제가 됐다. 그런데 반가움도 잠시, 이 돈에 2천만 원이 넘는 세금이 붙을 처지였다. 축하의 돈에 세금이 따라붙는 묘한 상황. 결국 정부가 서둘러 법을 고쳐 회사가 주는 출산지원금을 비과세로 돌렸다. 기업의 통 큰 결단이 제도 개선으로 이어진, 흐뭇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 비과세는 ‘회사가 직원에게’ 줄 때만 통한다. 같은 축하금이라도 누가 주느냐에 따라 세금의 운명이 갈린다. 새 식구를 축하하며 5천만 원을 건넨다고 치자. 아기의 할아버지·할머니가 갓 부모가 된 자녀에게 보태면 세금이 한 푼도 없다. 그런데 가까운 친구나 이웃이 똑같은 마음으로 건네면 500만 원 가까운 증여세가 매겨진다. 삼촌·이모가 줘도 수백만 원의 세금을 피하기 어렵다. 같은

[임팩트 비즈니스 리뷰] AI 아포칼립스 시나리오 – 우리가 먼저 상상해야 할 종말

안락함이라는 이름의 조용한 종말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안락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AI는 놀랍도록 안락하다. 보고서를 요약하고, 코드를 짜고, 회의록을 정리하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나보다 먼저 알아챈다. 영화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에서 상상하던 폭력적인 종말은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매일 아침 아무런 경고음도 없이 조금씩 더 편리해지는 세계에 접속하며 안주한다. 문제는 바로 그 안락함에 있다. 변화가 위협적으로 느껴질 때 인간은 저항하지만, 변화가 너무나 편안할 때 인간은 ‘적응’이라는 이름으로 고유한 주체성을 조용히 내어준다. AI 아포칼립스의 진짜 시나리오는 로봇 군단의 반란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는 날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현재 시장의 분위기는 압도적으로 낙관적이다. 전 세계 정부가 수백조 원 규모의 AI 투자 경쟁에 뛰어들고, 우리 정부 역시 AI를 국가 경쟁력의 핵심 축으로 배치하며 인프라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은 “AI를 쓰지 않는 조직은 도태된다”는 것을 상식으로 여긴다. 물론 낙관론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다. 우리 역시 AI를 반대하는 쪽이 아니다. 오히려 임팩트스퀘어는 이 영역에서 누구보다 AI 전환에 앞장서고 있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낙관의 사각지대 역시 함께 보아야 한다. 기술이 주는 이득은 즉각적이고 가시적이지만, 그로 인한 손실은 천천히 그리고 눈에 띄지 않게 찾아온다. 우리는 AI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집중하느라 그 과정에서 AI가 서서히 지워가는 ‘인간적 맥락’을 보지 못하고 있다. 프리모템: 실패를 미리 시뮬레이션하는 예방의 기술 임팩트스퀘어가 ‘AI 아포칼립스’ 연구를 시작한

[임팩트비즈니스 인사이트] 전기만으로는 넷제로가 오지 않는다

국내 최종 에너지 소비량의 48%는 열에너지다. 이 가운데 96.4%는 화석연료를 연소해 생산되며, 태양열·수열·폐열 등을 활용한 재생열은 3.6%에 불과하다. 글로벌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글로벌 기후테크 논의는 여전히 태양광, 풍력 등 전기 부문에 집중돼 있다. 진정한 넷제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화려한 전동화 전환 이면에 가려진 열에너지의 탈탄소화와 효율화 문제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 버려지는 데이터센터 열, 왜 당장 활용하지 못할까? 열에너지 탈탄소화는 크게 무탄소 에너지원을 활용한 열 생산과 폐열 재활용으로 나눌 수 있다. 생산된 열에너지의 절반은 실제 사용처까지 전달되지 못한 채 버려진다(Wasted Energy). 특히 전체 폐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100℃ 미만의 중저온 폐열 가운데, 40℃ 미만의 저온 폐열은 회수가 까다롭고 승온 장치인 히트펌프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저온 폐열 활용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가 데이터센터다.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는 수천 세대에 열을 공급할 수 있는 수준의 에너지를 24시간 발생시키는 잠재적 열원이며, 북유럽을 중심으로 이미 상용화 사례도 존재한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데이터센터 폐열이 상업적으로 대규모 활용되는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 임팩트스퀘어 투자팀은 국내외 전문가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 배경을 확인했다. 전문가들은 데이터센터가 훌륭한 열원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었다. “데이터센터는 24시간 가동되기 때문에 열 발생의 불확실성이 낮고, 막대한 열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 또한 온도를 높이기 위한 히트펌프 기술도 이미 상용화 단계에 있다”는 평가다. 그럼에도 현장에서 마주하는 결정적 장벽은 인프라 비용이다. 특히 전문가들은 “핵심은 열을 수송하는 열수송관”이라며 “지하

[기후 유니버스] 이재명 대통령님, 탄소중립 집무실은 어떠세요?

“기후위기가 심각한 건 알겠어. 근데 그럼 이제 뭘 하면 되는 거야?” 1박 2일로 놀러 간 펜션에서 고등학교 친구가 내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10년 가까이 활동해왔지만, 들을 때마다 답하기 쉽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의 생각이 많이 변했구나 싶어 고무적인 질문이다. 기후위기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가장 먼저 한 실천은 텀블러와 손수건 사용이었다. 가장 손쉬운 실천이면서, 몸이 먼저 움직이면 의식도 따라오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도 사무실엔 항상 텀블러를 두고, 손수건은 매일 아침 주머니에 꼭 챙겨 나간다. 환경을 위한 행동으로 시작했지만 덕분에 쓰레기통 비울 일도 줄었고, 매너 있다는 소리까지 들으니 괜스레 어깨가 올라간다. 몇 번 하다 보니 자신감이 붙어 소비 생활도 달라졌다. 대나무 칫솔로 바꾸고, 저탄소 친환경 브랜드에서 옷을 주로 산다. 처음엔 이것저것 바꿔가며 나에게 맞는 걸 찾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지금은 한 곳에 잘 정착했고, 주변 지인들에게도 적극 추천한다. 추천한 물건이 좋았다는 후기만큼 뿌듯한 것도 없다. 몇 년 전부터는 투자로도 기여할 방법을 찾았다. 바로 태양광 발전소 투자다. 앞서 했던 실천들보다 훨씬 많은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는 데다, 정기적인 배당수익까지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변의 햇빛발전협동조합을 찾아 가입하는 방법도 있고, 온라인에서 클릭 몇 번으로 가능한 서비스도 생겨 문턱이 많이 낮아졌다. 최근 선거에서는 기후 공약을 꼼꼼히 살펴보고 투표했다. 불필요한 개발 공약은 없는지, 지역 단위 탄소중립을 위한 정책은 충분한지, 기후 피해로부터 주민을 보호할 대책은 있는지를 중심으로 따져봤다. 공보물만으론

[사회혁신발언대] 창업자 눈으로 본 투자심사, 임팩트 투자에서의 AI

크런치베이스와 휴먼X가 공동 발표한 ‘2025 AI 투자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AI 관련 기업이 유치한 투자액은 2110억 달러(약 306조 원)로, 전년 대비 85% 급증했다. AI는 이제 투자의 대상을 넘어, 투자 현장 안으로 빠르게 들어오고 있다. 그런데 임팩트 투자는 조금 다른 질문을 마주한다. 일반 벤처 투자가 재무적 수익성을 중심에 놓는다면, 임팩트 투자는 사회적 가치와 재무적 지속가능성을 동시에 판단해야 한다. 창업자가 어떤 문제를 왜 풀려 하는지, 그 팀이 지역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 수치로 표현되지 않는 정성적 맥락을 읽는 것이 심사의 핵심이다. AI를 단순한 자동화 도구나 효율화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논의가 임팩트 투자 현장에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임팩트 투자에서 AI는 어떻게 쓰여야 할까. MYSC 투자기획팀 인턴으로 3개월을 보내며, 나는 그 질문의 답이 기술이 아니라 데이터와 맥락에 있다는 것을 현장에서 직접 확인했다. 이 글은 창업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 투자자 시선을 처음으로 얹어보며 깨달은 것들, 그리고 그 과정에서 AI와 임팩트 투자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된 기록이다. ◇ 창업자에서 투자자 시선으로 나는 한 번 투자를 받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1인 여행자 플랫폼 ‘모잉’을 창업해 시드 투자 유치와 법인 설립까지 경험했다. 그리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법인을 해체했다. 팀원들과 비전이 갈렸고, ‘무엇을 팔 것인가(What)’에 매몰된 나머지 ‘왜 이 일을 하는가(Why)’를 잃어버린 탓이었다. 실패 이후에는 세대 간 교류 플랫폼 ‘연슐랭 가이드’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탄소와 사회를 잇는 방식] 탄소감축량보다 중요한 질문

우간다, 탄자니아, 말라위, 케냐 등 여러 아프리카 국가에서 국제감축사업 타당성조사를 수행하며 종종 흥미로운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 정부는 탄소사업을 새로운 투자 유치 기회로 바라보고, 기업과 투자자는 탄소감축량과 사업성을 검토한다. 국제사회는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더 많은 민간자본과 혼합금융(Blended Finance)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작 지역주민들이 바라보는 탄소사업은 조금 다르다. 주민들에게 바이오가스나 청정조리기기 사업은 탄소배출 감축보다도 매일 반복되는 땔감 수집 노동을 줄이고, 숯과 연료 구매 비용을 아껴 가처분 소득을 늘릴 수 있는 현실적인 생계 문제에 더 가깝다. 특히 농촌 지역 여성들과 아이들에게 연료를 구하기 위해 이동하는 시간과 노동은 단순한 불편을 넘어 교육과 생계, 건강 문제와도 연결된다. 흥미로운 점은 많은 지역 주민이 이미 ‘카본(Carbon)’이라는 단어를 익숙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몇 해 전만 하더라도 탄소시장은 국제회의와 보고서 속 이야기처럼 느껴졌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이미 여러 해외기관과 기업, 개발기관들이 경제성 분석과 타당성조사를 위해 반복적으로 지역사회와 마을을 방문해 왔다. 어떤 주민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예전에도 비슷한 조사를 하러 왔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업은 결국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탄소시장은 미래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수많은 ‘가능성’과 ‘검토’만 반복된 채 설명회와 인터뷰, 그리고 끝내 실행되지 못한 프로젝트들에 대한 기억이 쌓여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이러한 반복된 조사와 검토 과정 자체를 단순히 비효율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국제감축사업은 감축량 산정뿐 아니라 기술적 타당성, 관련 법과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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