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박훈의 나눔과 세금] 세상을 바꾸는 기부와 세금

“내 돈이 어디로 갔나요?” 기부하는 사람들이 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연말에 모금함에 봉투를 넣고 잊어버리는 것이 미덕이었다면, 요즘 기부자는 묻는다. 내가 낸 돈이 무엇을 바꾸었느냐고. 공익법인들도 이 물음에 답하려 애쓴다. 사업의 성과를 측정하고, 수혜자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보여 주는 연구가 하나둘 나오고 있다. 기부가 ‘착한 일’에서 ‘투자’로 옮겨 가는 중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 세금은 왜 기부를 거들어야 하나 세법도 기부를 거든다. 봉급생활자가 기부하면 세액공제를 받고, 개인사업자나 법인은 기부금을 일정 한도 안에서 경비로 인정받아 소득세나 법인세가 줄어든다. 공익법인에 출연한 재산은 일정 요건을 갖추면 상속세나 증여세 과세가액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이 지원을 늘리자고 하면 곱지 않은 시선이 따라온다. 좋은 일 하겠다는 사람에게 왜 나라가 세금까지 깎아 주느냐, 공익법인은 결국 절세 창구가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시각을 무조건 편견이라 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없지 않았고, 상속세 및 증여세법이 공익법인에 한 회사의 주식을 일정 비율 넘게 출연하면 세금을 매기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세제 혜택은 결국 국가가 받을 세금을 덜 받는 것이다. 그러니 혜택을 유지하고 넓히려면 정부와 국회를 설득해야 한다. 말로 하는 설득에는 한계가 있다. 국가가 못 하거나 서툰 일을 공익법인이 해내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가장 확실한 근거다. ◇ 5년짜리 정부, 1년짜리 예산 국가가 서툰 일이 무엇인지는 구조를 보면 보인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고 예산은 1년 단위로 짜인다. 복지예산은 한번 늘리면 줄이기 어렵고, 줄이면

[사회혁신발언대] 전 국민의 손길이 ‘약손’이 되기를 바라며

“어르신, 약 드시는 데 불편한 점은 없으세요?” 2026 유일한 아카데미 6조가 활동 기간 내내 가장 많이 던진 질문이다. 강남종합사회복지관과 대방종합사회복지관에서 만난 50여 명의 어르신과 두 차례의 발표까지 더하면 적어도 52번은 물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어르신들이 약을 챙겨 제때 복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장은 예상과 달랐다. 대부분 처방받은 약을 잘 복용하고 있었고, 시중에 나온 복약 관리 앱도 여덟 개가 넘었다. 그렇다면 진짜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답은 우리가 준비한 질문이 아니라 어르신들의 이야기 속에 있었다. “병원에서 말해야 하는 건 알지만, 막상 가면 몇 개씩 까먹고 오지. 무엇을 빠뜨렸는지도 몰라 다시 처방받거나, 아예 안 먹기도 해.” 한 어르신의 말씀이었다. 문제는 약을 먹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약을 먹고 있는지가 제대로 기록되고 공유되지 않는 데 있었다. 인터뷰를 마친 뒤 우리는 ‘약을 먹었는가’보다 ‘무엇을 먹고 있는지 누가 알고 있는가’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어르신의 복약 정보가 한 사람에게만 머무르지 않고 의료진과 가족의 돌봄으로 이어지게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렇게 고령층의 복약 정보를 기록하고 의료진과 가족에게 전달하는 플랫폼 ‘약손’이 탄생했다. 당사자의 이야기를 직접 듣지 않았다면 우리 조의 결과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리의 시선은 출발점에 그대로 머물렀을 것이고, 솔루션 역시 청년들의 상상 안에서 끝났을 것이다. 사회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들어야 하는 것은 언제나 당사자의 목소리였다. 특강 첫날 “잘 아는 것보다 잘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회혁신발언대] 유일한 아카데미에서 배운 ‘유일한 정신’

성적을 위한 과제가 아니라,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사회문제를 깊이 파고드는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프로젝트 기반 학습(PBL·Project Based Learning)을 경험할 수 있는 수업을 찾기 어려웠고, 기회가 생기더라도 내가 진정으로 관심 있는 주제를 정해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갈 수 있는 자리는 흔치 않았다. 그러던 중 유일한 아카데미를 만났다. 생명공학 전공생으로서 제약·바이오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원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우리 3조는 ‘희귀난치성 질환과 신약 접근성’을 주제로 선택했다. 희귀난치성 질환 환자를 위한 신약 개발에 기여하는 것은 나의 오랜 꿈이었다. 그렇기에 이 주제만큼은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반드시 깊이 탐구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활동을 시작하자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이 드러났다. 우리 조를 제외하면 제약·바이오 분야를 정면으로 다루는 팀이 없었고, 이 분야에 대해 깊이 있는 조언을 구할 전문가와의 접점도 충분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아쉬움이 컸지만, 돌아보면 그 공백이 오히려 우리를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었다. 조장을 따로 정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프로젝트 전체를 기획하고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 우리가 처음 세운 가설은 ‘희귀난치성 질환 환자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복잡한 행정 절차일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를 검증하기 위해 이민지 전 궤양성대장염 환우회 UC사랑회 회장을 인터뷰했다. 인터뷰 결과, 우리의 가설이 궤양성대장염과 같은 염증성 장질환(IBD) 환자의 현실과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공들여 세운 가설이 틀렸다는 점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고 방향을 수정하면서 오히려 더 중요한

[사회혁신발언대] 매순간 만난 장벽…그럼에도 부딪혀 넘어가다

지금 당신의 앞을 가로막은 벽은 얼마나 단단한가. 주먹으로 가볍게 허물 수 있는 벽인가, 아니면 드릴로도 좀처럼 뚫리지 않는 벽인가. 대학생들이 모여 사회문제의 해법을 찾는 유일한 아카데미에서 우리는 ‘과대·허위 광고’라는 높고 단단한 벽과 마주했다. 첫 번째 벽은 나 자신. 브라질과 미국, 독일, 한국을 거치며 살아온 시간은 나를 설명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수식어가 됐다. 스스로 온전한 한국인도, 완전한 이방인도 아닌 ‘경계에 선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유일한 아카데미 지원서를 쓰고 첫 면접을 보는 순간부터 거대한 벽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팀원들과 대화하는 순간마다 스스로를 검열했다. ‘내 말투가 어색하지 않을까’, ‘전문성이 부족해 보이지 않을까.’ 매번 ‘자신감’이라는 벽 앞에서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디자인 싱킹(Design Thinking) 과정에서 즉흥 발표를 할 때마다 심장이 요동쳤고, 섭식장애를 주제로 박지니 활동가를 인터뷰할 때 진행자를 맡으면서는 긴장감에 숨이 막히는 듯했다. 그러나 서울 시내 청소년센터 6곳에 교구 콘텐츠 기획안을 직접 보내고, 마침내 서초유스센터로부터 회신 전화를 받은 순간 내 안의 벽에 작은 균열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두 번째 벽은 우리 사이. ‘정신건강’이라는 주제로 2조 팀원들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모든 일이 순조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섭식장애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교구 콘텐츠를 만들면 된다고 가볍게 여겼다. 하지만 우리 사이의 벽은 생각보다 두꺼웠다. 무엇보다 ‘비교’가 우리를 괴롭혔다. 다른 팀들은 화기애애하고 열정이 넘쳐 보였다. 그야말로 완벽해 보였다. 그들의 ‘완벽’ 안에도 분명 벽이 있었을 텐데, 조급함에 사로잡힌

[사회혁신발언대] 사회문제 해결은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

좋은 기술이 있다면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대학에서 생명공학과 경영학을 공부하며 기술과 사람의 접점을 고민해온 나에게 이 질문은 점차 중요한 문제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과 서비스가 개발되더라도 정작 필요한 사람에게 제때 닿지 않는다면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게 된 계기는 치매안심센터에서 행정인턴으로 일했던 경험이었다. 현장에서는 필요한 지원이 이미 마련돼 있는데도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연결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를 통해 사회문제를 바라볼 때는 ‘무엇이 존재하는가’보다 ‘그것이 누구에게, 어떻게 닿고 있는가’를 살펴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일한 아카데미는 이러한 고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기회였다. 현장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문제를 구체적으로 정의해 필요한 사람에게 실제로 닿는 해결책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을 직접 경험했다. 우리 팀이 주목한 사회문제는 2030 청년층의 수면제 오남용이었다. 학업과 직장생활 등으로 수면에 어려움을 겪는 청년이 늘면서 수면제를 찾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약을 복용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살피고,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도움을 받는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수면제 오남용의 원인을 탐구하고, 웹앱 솔루션 ‘윌로우 케어’를 기획했다. 프로젝트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일이었다. 이전에는 문제를 충분히 들여다보기 전에 해결책부터 구상하곤 했다. 이번에는 해결책을 정하기에 앞서 문제의 원인과 본질을 파고드는 데 집중했다. 5주 동안 현장 인터뷰와 설문조사, 시장 분석을 진행하며 처음 세운 가설을 끊임없이 검증하고

[사회혁신발언대] 흩어진 희귀질환 정보, ‘Alook(얼룩)’으로 잇다

“환자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민지 전 궤양성대장염 환우회 회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듣게 된 이 한 문장이 우리 팀의 방향을 바꿨다. 유한양행 유일한 아카데미 2026에 지원할 당시 나는 보건통계를 전공하는 대학원생이었다. 데이터로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는 방법은 배웠지만, 정작 그 데이터 뒤에 있는 사람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다. 우리 조가 세운 첫 가설은 명확했다. 희귀질환 환자의 가장 큰 어려움은 산정특례와 같은 복잡한 행정절차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가설은 첫 인터뷰에서 곧바로 뒤집혔다. 궤양성대장염이나 크론병 같은 IBD 계열 질환은 환자 수가 비교적 많고, 확진 시 병원에서 산정특례를 안내받을 수 있어 예상만큼 행정적 어려움이 크지 않았다. 오히려 환자들이 겪는 문제는 필요한 정보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어 찾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특히 환자 수가 극히 적은 희귀질환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두드러졌다. 정보 자체가 부족한 데다, 같은 질환을 겪은 환자를 만나 경험과 정보를 나누기도 어려워 정보 비대칭성이 한층 심각했다. 이에 우리 조는 프로젝트 대상을 고셔병으로 좁혔다. 고셔병은 정보 사각지대가 큰 희귀질환인 만큼, 가장 정보 접근이 어려운 질환에서도 작동하는 해결책을 만든다면 다른 희귀질환으로도 확장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후 우리 조는 총 9차례의 인터뷰와 자문을 거쳤다. 궤양성대장염 환우회 전 회장을 시작으로, 유한양행 임상전략기획팀, 국내 고셔병 권위자인 유한욱 분당차여성병원 소아청소년과·임상유전체의학센터 교수, 국제고셔병협회(IGA),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에 이르기까지, 환자와 의료진, 기업, 환자단체의 목소리를 두루 들었다. 희귀질환 확진까지 걸리는 시간이 평균 9.2년이라는 숫자는 리서치를 통해

[사회혁신발언대] 당연한 불편함과 당연한 배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많은 부분을 불편하게 만든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65세 이상 노령 인구는 2026년 기준 1112만 명으로, 우리는 이미 초고령사회를 살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몸 곳곳이 아파 병원을 찾다 보면 하루에 챙겨 먹어야 하는 약도 자연스레 늘어난다. 유일한 아카데미 2기 활동을 시작하며 우리 조의 시선이 머문 곳은 바로 어르신들의 ‘복약 문제’였다. 활동 초기에는 단순히 어르신들이 약 챙겨 먹기를 귀찮아하거나 임의로 복용을 중단해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문가 인터뷰와 현장에서 어르신들을 직접 만나는 조사를 거치며, 우리가 문제의 본질을 크게 오해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정나나 경복대학교 간호학과 교수를 통해 들은 현장의 현실은 달랐다. 치매 패치를 파스로 착각해 여러 장 붙이고 쓰러지신 분, 혈당약을 중복 복용해 응급실에 실려 가신 분까지, 문제는 약을 ‘안 먹는 것’이 아니라, 약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잘못 먹는 것’에 있었다. 노인 10명 중 9명이 안(眼) 질환을 겪는 만큼, 약 봉투에 쓰인 작은 글씨는 어르신들에게 큰 장벽이었다. 대안으로 꼽히던 QR코드 역시 20명의 어르신을 직접 만나 확인해 보니 실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어르신이 QR코드를 인지하기 어려웠고, 카메라 초점을 맞춘 채 3초 이상 손을 유지하는 동작조차 큰 부담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직관성에 초점을 맞췄다. 스마트폰을 약 봉투나 약 상자에 가볍게 대기만 하면 NFC 태그를 통해 복약 정보가 음성으로 흘러나오는 솔루션을 기획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심리적

[사회혁신발언대] 소리로 잇는 마음, ‘소리상회’와 함께한 시간

작년 이맘때만 해도 필자에게 ‘AI를 잘 활용해야 한다’는 말은 막연한 배움의 열정으로만 남아 있었다. 관련 공부를 하고 여러 자료를 찾아보긴 했지만, 정작 그 열정을 실제 프로젝트로 옮겨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유일한 아카데미 2기 활동을 통해 수도권 독거노인을 대상으로 한 참여형 AI 팟캐스트 ‘소리상회’를 기획하고 발표하기까지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그 막연함은 구체적인 확신으로 바뀌었다. 처음 팀을 꾸리고 주제를 정할 때, 우리는 “누구의 목소리가 가장 듣기 어려운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은 이미 여러 갈래로 존재했다. 그런데 자료를 조사할수록 눈에 띈 것은, 노인복지 정책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매우 높은데도 실제로는 지속적으로 이용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75세 이상 노인의 생활편의 서비스 이용률은 16.4%로, 청년층(171.8%)의 약 10분의 1 수준에 그쳤다. 많은 정책과 서비스가 앱이나 비대면 방식으로 설계되면서, 정작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고령층에게는 문턱이 오히려 더 높아진 셈이었다. 정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노인 개개인의 삶의 방식에 맞춰지지 않아 이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여러 사회적 약자 중에서도 노인을, 그중에서도 수도권 독거노인을 선택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청년이나 장애인 등 다른 취약계층에게는 또래 커뮤니티나 온라인 네트워크가 그나마 존재하지만, 고령층은 배우자와 사별하고 자녀가 독립하고 친구들마저 하나둘 세상을 떠나면서 관계망 자체가 줄어드는 특성이 있었다. 게다가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려, 기존의 디지털 기반 해법이 잘 닿지 않는 사각지대이기도 했다. 반면 ‘말로 건네고 말로 듣는’ 방식은

[기후 유니버스] 죽은 자가 미래를 구할 수 있는가, 히말라야가 던진 질문

2026년 8월 26일, 히말라야 빙하 붕괴로 발생한 대홍수가 네팔을 뒤덮었다.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사고 당시 CCTV 영상이 퍼졌고, 이를 본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어나는 피해 규모는 이번 재난의 심각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현재까지 사망자는 약 1300명, 실종자는 5300명에 육박한다. 네팔 당국은 국민의 5%가 이번 대홍수로 피해를 입었으며, 재건을 위해서만 국내총생산(GDP)의 10%가 필요한 수준이라고 밝혔다. 사실상 국가 마비 상태를 선언한 셈이다. 이번 대홍수의 주요 원인은 바로 기후위기다. 온실가스 배출로 지구 평균 온도가 높아지고 있고, 히말라야 같은 고산지대는 온도 상승 속도가 더 빠르게 나타난다. 과학자들은 빙하가 녹아 형성된 빙하호가 계속 늘어나고 있어, 이러한 대홍수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위협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런데 네팔이 그동안 배출한 온실가스는 전 세계 배출량의 0.01%에 불과하다. 기후위기에 기여한 비중은 극히 적지만, 기후 피해에는 더 취약하고 앞으로 그 위험이 더욱 커질 국가다. 네팔 정부가 중국·미국·인도 등 온실가스 배출의 역사적 책임이 가장 큰 국가들에 기후 피해 배상을 요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 네팔 대홍수에서 드러난 기후 불평등은 사실 이전부터 다른 모습으로 존재해왔다. 이는 온실가스 규제를 엄격히 시행하는 국가의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규제가 느슨한 다른 국가로 생산 시설을 이전하는 이른바 ‘탄소 누출’로 설명된다. 일례로 포스코는 2021년 아시아 철강사 최초로 2050년 탄소중립을 선언하고 로드맵을 수립했다. 그러나 전기로 도입, 수소환원제철 기술 개발 등 탄소중립 추진 전략은 국내 사업장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20세기의 도구로 21세기의 문제를 풀고 있지는 않나

AVPN 글로벌 콘퍼런스 2026에서 마주한 ‘자선의 역설’ “비영리는 지금 자선의 역설 속에 있습니다. 20세기의 역량과 도구, 인프라로 21세기의 문제를 풀려고 하니까요.” 아시아 최대 사회적투자 네트워크 AVPN이 지난 8월 말 인도 뉴델리에서 연 글로벌 콘퍼런스에는 전 세계 2000여 명의 임팩트 리더가 모였다. 그 자리에서 구글닷오알지(Google.org) 아시아태평양 총괄 마리야 랄리치(Marija Ralic)가 한 말이다. 받아 적다가 손이 멈췄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국의 비영리 앞에도 같은 질문이 놓여 있다. 한국 비영리는 오랫동안 필요한 곳을 찾아 자원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일을 잘해 왔다. 결핍이 문제의 본질이던 시대에 그 방식은 유효했고, 실제로 수많은 아이들의 삶을 바꿔 왔다. 그런데 아이들이 마주한 문제의 성격이 달라졌다. 결식과 결핍의 자리에 돌봄 공백과 마음건강, 디지털 환경이 들어섰다. 이런 문제는 지원의 양만으로 풀기 어렵다. 아이 한 명에게 정확히 닿는 일에 더해, 그 아이가 놓인 구조까지 함께 바꾸는 새로운 근육이 필요해진 것이다. 기부자와 기업의 질문도 달라졌다. 이제는 얼마를 어디에 썼느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래서 아이의 삶에서 무엇이 달라졌느냐를 묻는다. 질문이 진화한 만큼 답하는 방식도 함께 진화해야 할 때가 왔다. ◇ 위험은 생각보다 과대평가돼 있었다 델리에서 만난 아시아의 재단들은 우리가 아직 써 보지 않은 방법을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 그 방법들을 관통하는 말이 ‘촉매 자본(catalytic capital)’이었다. 가치가 검증되기 전의 위험을 먼저 떠안아 뒤따르는 민간 자본의 물꼬를 트는 돈이다. 테마섹재단(Temasek Foundation)의 응분헝(Ng Boon Heong) 대표는 재단의

김정태 엠와이소셜컴퍼니 대표
인도는 지금 ‘자본의 고층건물’을 짓고 있다

지난 8월 마지막 주,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AVPN 글로벌 콘퍼런스에 다녀왔다. 아시아 최대 규모의 임팩트 금융·필란트로피 네트워크가 주최한 이번 행사에는 3일간 2300명이 참여했고, 100개가 넘는 세션이 열렸다. 주제는 ‘아시아를 위한 실행 설계도(A Blueprint for Action in Asia)’였다. MYSC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함께 마지막 날 ‘측정 가능한 임팩트를 위한 자본 구조화’ 세션을 진행했다. 콘퍼런스 기간 동안 인도 중앙정부와 주정부 관계자, 기업재단, 개발금융기관, 그리고 인도 1세대 임팩트 투자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분야는 저마다 달랐지만, 하나로 꿰어보니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인도는 지금 다양한 층위의 자본이 몰려드는 초고층 건물, 마천루를 짓고 있었다. ◇ 리스크는 어디에나 있지만 “High risk, high impact.” 세션의 오프닝에서 필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익숙하고 오래 써온 표현이지만, 사실은 절반의 진실에 가깝다. 리스크는 어디에나 있지만 임팩트는 어디에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위험을 감수한다고 해서 임팩트가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투자와 지원이 현장의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는 마지막 구간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나는 이것을 임팩트 생태계가 오랫동안 직면해 온 또 하나의 ‘라스트마일(last-mile)’ 문제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제안한 개념이 ‘자본의 고층건물(High Architecture)’이다. 하단의 High Risk와 상단의 High Impact를 연결하는, 혼합금융과 성과기반금융으로 구성된 건물에 대한 비유다. 위험과 가장 가까운 1층에는 정부와 공공기관의 촉매 자본이 들어온다. 양허적 조건으로 투입되어 다른 투자자가 감당하기 어려운 초기 위험을 흡수하거나 완화하는데, 이를 위험 완화(de-risking)라고 부른다. 1층이 만든 안전망 위, 2층에는 손실을 먼저 부담해 다른

[사회혁신 발언대] 성수동을 걸으며, 다시 뉴욕으로 향한다

매일 아침 성수동을 걸어 출근하다 보면 유난히 자주 모습이 바뀌는 한 모퉁이 공간을 지나게 된다. 마치 시계가 돌아가듯 그곳은 팝업스토어에서 또 다른 팝업스토어로 끊임없이 변신한다. 어느 아침에는 알록달록한 카페와 옷가게 사이로 새하얀 벽만 드러낸 채 텅 비어 있다. 그런데 저녁이 되면 전혀 다른 콘셉트의 공간으로 바뀌어 화장품이나 향수, 때로는 냉감 제품 같은 새로운 상품들로 가득 찬다. 다음 날에는 화보 촬영이 진행되고, 며칠 뒤에는 모퉁이를 휘감는 긴 줄이 생긴다. 그렇게 한두 주가 지나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된다. 필자는 미국 헨리 루스 재단(Henry Luce Foundation)이 운영하는 국제 펠로십인 ‘루스 스칼라(Luce Scholar) 프로그램’의 장학생으로 선발돼 2025년 9월 뉴욕에서 서울로 왔다. 이 프로그램은 미국의 청년 전문가를 아시아 각국의 기관에 약 1년간 배치하고 체류비와 언어교육 등을 지원한다. 필자는 임팩트 액셀러레이터이자 투자·컨설팅 기관인 엠와이소셜컴퍼니(MYSC)에 배치돼 1년간 근무하게 됐다. 서울에 오기 전에는 뉴욕시 정부에서 3년간 근무했다. 처음에는 택시와 차량호출 산업 종사자들을, 이후에는 여러 업종의 소상공인을 지원하며 기업가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하고 이에 대응하는 일을 했다. 한국행을 준비하면서는 한국이 ‘기업하기 좋은 환경’에 관한 국제 평가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해 온 이유가 궁금했다. 공공 부문에서 일할 때 비즈니스란 주로 소상공인을 의미했다. 그러나 MYSC에서 근무하며 스타트업과 사회적기업, 그리고 이들을 연결하고 지원하는 조직까지 아우르는 더 넓은 비즈니스 생태계를 이해하게 됐다. 성수동은 흔히 ‘소셜벤처 밸리’라고 불린다. 비즈니스를 통해 사회·환경적 변화를 만들려는

더나은미래 특별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