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임팩트의 행방불명] 임팩트 프레임워크(SROI, IMP)에 대한 실무적 오해

현장에서 임팩트를 어떻게 측정하는지 물으면 이런 답을 자주 듣는다. “우리는 SROI 기반으로 측정합니다”, “우리는 IMP 기반으로 측정합니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눠보면 대개 의미는 비슷하다. SROI(Social Return on Investment)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은 사회성과를 화폐가치로 환산한다는 뜻이고, IMP(Impact Management Platform)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은 IMP가 제시한 ‘임팩트의 다섯 가지 차원(Five Dimensions of Impact)’에 맞춰 임팩트 리포트를 작성한다는 뜻이다. 물론 틀린 설명은 아니다. 다만 ‘임팩트를 어떻게 측정하는가’에 대한 답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임팩트를 화폐가치로 환산하거나 IMP의 다섯 가지 차원에 맞춰 정리하는 것은 성과를 ‘어떻게 표현하고 보고했는가’에 관한 설명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성과가 어떻게 발생했고, 그중 조직이 실제로 기여한 몫이 얼마인지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 SROI의 핵심은 화폐가치화가 아니다 SROI는 재무적 대용치(Financial proxy)를 활용해 사회성과를 화폐가치로 표현하도록 돕는다. 이 때문에 현장에서는 흔히 ‘SROI=화폐가치화’로 받아들이곤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화폐가치로 환산하기 전 단계다. 어떤 변화를 성과로 볼 것인지, 그 변화 가운데 조직이 실제로 만들어낸 몫은 얼마인지 식별하는 과정이다. 임팩트 측정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관찰된 변화 가이운데 우리 조직이 아니었어도 발생했을 변화(What would have happened anyway)를 제외하고, 조직이 기여한 몫을 구분해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SROI 역시 ‘과대주장 금지(Do not overclaim)’ 원칙을 통해 이를 강조한다. 조직이 만들지 않은 성과까지 자신의 것으로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는 단순히 재무적 대용치를 보수적으로 설정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따라서 SROI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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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코니에 올라] 함께 일했지만, 함께 달라졌는가

지난 글에서 나는 한 문장을 미완으로 남겨두었다. 협력의 접점은 늘었는데, 협력의 문법은 그대로라는 말이었다. 그 문법이 무엇인지 이번에는 나의 경험으로 답해보려 한다. 루트임팩트는 2018년부터 2024년까지 ‘임팩트커리어W’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결혼과 출산, 돌봄으로 커리어의 흐름이 끊겼던 여성들이 다시 일터로 돌아가도록 돕는 일이었다. 우리는 이들을 ‘경력단절여성’이 아니라 ‘경력보유여성’으로 불렀다. 그 기간에도 갈등을 조율하고, 한정된 시간을 쪼개 문제를 풀고, 중요한 순간마다 결정을 내려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채용 플랫폼과 아이돌봄 서비스, 교육 기관과 글로벌 재단, 그리고 이들을 실제로 채용한 기업들이 함께했다. 7년 동안 백 명 가까운 여성이 과정을 마쳤다. 그중 절반 이상이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함께한 조직 중 일부는 유연근무제나 출산 보호 제도를 새로 도입했다. 숫자보다 놀라웠던 것은 그다음이다. 2021년 성동구가 전국 최초로 경력보유여성 조례를 만들었고, 그 뒤 서른 곳 넘는 지자체가 뒤를 따랐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국회는 법률 용어 ‘경력단절여성’을 ‘경력보유여성’으로 바꾸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2008년 법에 처음 새겨진 말이 열일곱 해 만에 교체된 것이다. 우리가 함께 부르기 시작한 이름이 법률의 언어가 되었다. 그런데 발코니에 올라 이 여정을 다시 내려다보면, 한 가지 질문이 마음에 걸린다. 이 성과 중 우리가 사전에 의도를 갖고 함께 계획한 것은 얼마나 될까. 사실 조례의 확산과 법 개정은 우리가 미리 설계한 경로는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우연히 일어난 일도 아니다. 우리는 파트너들과 함께 경력단절여성을 경력보유여성으로 호명했고, 새로운 이름이 현실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성동구에서 증명했다.

[사회혁신발언대] 청년미래센터가 본 위기아동·청년지원의 필요성 및 중요성

“센터장님, 제 꿈이 뭔지 아세요? 대기업 취업도, 세계 여행도 아니에요. 그저 당장 내일 병원비와 생활비 걱정 없이, 알람을 끄고 하루만 푹 자보는 거예요. 저의 20대는 이미 엄마의 병간호에 저당 잡힌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의 산업 수도라 불리는 울산의 화려한 불빛 이면에는, 이처럼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홀로 숨죽여 우는 청춘들이 있다. 한창 미래를 향해 달려가야 할 10대와 20대, 길게는 3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시계는 아픈 가족의 투병 생활과 생계의 굴레에 맞춰진 지 오래다. 질병, 장애, 정신질환 등을 겪는 가족을 홀로 돌보며 가사 노동과 생계까지 책임지는 이들을 우리는 ‘영케어러(Young Carer, 가족돌봄아동·청년)’라 부른다. 국내 규모만 약 10만 명으로 추산되지만, 이들은 오랫동안 완벽한 ‘투명 인간’이었다. 과거 대가족이나 지역 공동체가 나눠 맡던 돌봄의 짐이 핵가족화와 1인 가구 증가 등 사회 구조의 변화 속에서 준비되지 않은 어린 자녀에게 독박 돌봄으로 전가됐고, 이를 ‘효행’이나 ‘가족의 도리’로만 포장해 왔기 때문이다. 영케어러가 겪는 위기는 다중적이고 파괴적이다. 간병과 가사에 시달려 지각과 결석이 잦아지고 결국 학업을 중단하게 된다. 또래들이 취업 스펙을 쌓을 때 당장 병원비를 벌기 위해 단기 알바를 전전하고, 질 좋은 일자리 진입 시기를 놓쳐 빈곤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사회적 고립 속에서 겪는 우울감과 무기력은 벼랑 끝에 선 청년들을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기도 한다. 영케어러 문제는 단순한 안타까운 사연이 아닌, 심각한 사회적 손실을 일으키는 구조적 문제다. ◇ ‘기다리는 복지’에서 ‘찾아가는 연대’로

[사회혁신발언대] 영케어러를 기다려선 찾을 수 없다

2021년, 아픈 아버지를 홀로 돌보다 무너진 대구의 한 청년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필자가 던진 질문은 단순했다. “우리 동네에도 있지 않을까.” 그 질문은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서구에서 공약이 되고, 조례가 되고, 전국에서 처음 지급된 가족돌봄청년수당으로 이어졌다. 이제 ‘가족돌봄 등 위기아동·청년 지원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전국의 시·군·구가 같은 출발선에 섰다. 그래서 한 지역의 성과보다는 그 과정에서 배운 것을 나누고 싶다. 조례와 수당은 시작일 뿐이었다. 정작 어려운 일은 그다음에 있었다. ◇ 영케어러는 스스로 창구에 오지 않는다 서구는 세 차례 전수조사를 했다. 복지 행정 데이터에서 아픈 가족과 청년이 함께 사는 가구 수천 세대를 추린 뒤, 동 행정복지센터 공무원이 일일이 방문하거나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확인된 대상은 매번 백 명 안팎이었다. 수천 가구를 살펴 백 명을 찾는 일이다. 해마다 숫자가 조금씩 늘어난 것은 대상 자체가 늘어서라기보다, 숨어 있던 가족돌봄청년들이 뒤늦게 발견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데이터로는 잡히지 않는 유형도 계속 나왔다. 13세 미만 아동, 학교 밖 청소년, 소득기준을 조금 넘는 가구, 돌봄 사실을 숨기는 가정, 정신질환 가족을 돌보는 청년들이다. 올해는 다문화가정 자녀가 부모의 통역과 병원 동행, 행정 처리를 도맡는 경우도 ‘사실상의 돌봄’으로 보고 따로 살폈다. 질병·장애 코드만으로 접근했다면 영영 보이지 않았을 가족돌봄청년들이다. 이들을 알아보는 사람은 담임교사, 복지관 사회복지사, 병원의 의료사회복지사, 정신건강복지센터 상담원, 그리고 이웃이다. 그래서 학교의 추천과 가족센터·복지관의 협약 연계를 조사의 공식 절차에 포함했다. 발굴은 행정 데이터와 민간의 눈이

[사회혁신발언대] 베네수엘라에서 만난 ‘일상’의 의미 

긴급구호 현장에서는 재난 이후 회복의 목표를 설명할 때 ‘Back to Normal’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무너진 삶을 가능한 한 이전의 일상으로 되돌리는 것을 뜻한다. 지난 6월, 베네수엘라에서 발생한 지진은 주택과 기반시설을 무너뜨리고 많은 주민들의 일상을 한순간에 바꿔 놓았다. 재난 직후 긴급구호가 이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현장의 상황도 빠르게 달라지고 있었다. 지난 8월 13일부터 8월 27일까지 희망친구 기아대책 긴급구호 3차팀의 일원으로 베네수엘라 현장을 찾았다. 재난 직후와 비교해 피해 지역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주민들은 지금 무엇을 가장 필요로 하는지 직접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베네수엘라에 도착해 피해 지역을 둘러보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의외로 빠르게 정리되고 있는 현장이었다. 무너진 집은 철거돼 흔적을 찾기 어려운 곳도 있었고, 도로와 마을 곳곳에서도 복구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재난 직후의 혼란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리되고 있다’는 것과 주민들의 삶이 ‘회복되고 있다’는 것은 다른 의미다.  재난 현장에 남아 있는 이재민들은 쉽게 말해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경제적 여유가 있거 의지할 가족과 친척이 있는 사람들은 피해 지역을 떠났다. 남겨진 이들은 무너진 집과 불안정한 생활환경 속에서 다시 일상을 만들어야 하는 이들이다.  특히 베네수엘라는 이번 재난 이전부터 오랜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온 곳이다. 현장에서 직접 체감한 식비와 이동비, 구호물품 가격은 예상보다 훨씬 높았다. 주민들이 가장 많이 요청했던 것이 임시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쉘터를 마련하는 데 필요한 비용도 다른 긴급구호

[박훈의 나눔과 세금] 세상을 바꾸는 기부와 세금

“내 돈이 어디로 갔나요?” 기부하는 사람들이 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연말에 모금함에 봉투를 넣고 잊어버리는 것이 미덕이었다면, 요즘 기부자는 묻는다. 내가 낸 돈이 무엇을 바꾸었느냐고. 공익법인들도 이 물음에 답하려 애쓴다. 사업의 성과를 측정하고, 수혜자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보여 주는 연구가 하나둘 나오고 있다. 기부가 ‘착한 일’에서 ‘투자’로 옮겨 가는 중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 세금은 왜 기부를 거들어야 하나 세법도 기부를 거든다. 봉급생활자가 기부하면 세액공제를 받고, 개인사업자나 법인은 기부금을 일정 한도 안에서 경비로 인정받아 소득세나 법인세가 줄어든다. 공익법인에 출연한 재산은 일정 요건을 갖추면 상속세나 증여세 과세가액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이 지원을 늘리자고 하면 곱지 않은 시선이 따라온다. 좋은 일 하겠다는 사람에게 왜 나라가 세금까지 깎아 주느냐, 공익법인은 결국 절세 창구가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시각을 무조건 편견이라 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없지 않았고, 상속세 및 증여세법이 공익법인에 한 회사의 주식을 일정 비율 넘게 출연하면 세금을 매기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세제 혜택은 결국 국가가 받을 세금을 덜 받는 것이다. 그러니 혜택을 유지하고 넓히려면 정부와 국회를 설득해야 한다. 말로 하는 설득에는 한계가 있다. 국가가 못 하거나 서툰 일을 공익법인이 해내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가장 확실한 근거다. ◇ 5년짜리 정부, 1년짜리 예산 국가가 서툰 일이 무엇인지는 구조를 보면 보인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고 예산은 1년 단위로 짜인다. 복지예산은 한번 늘리면 줄이기 어렵고, 줄이면

[사회혁신발언대] 전 국민의 손길이 ‘약손’이 되기를 바라며

“어르신, 약 드시는 데 불편한 점은 없으세요?” 2026 유일한 아카데미 6조가 활동 기간 내내 가장 많이 던진 질문이다. 강남종합사회복지관과 대방종합사회복지관에서 만난 50여 명의 어르신과 두 차례의 발표까지 더하면 적어도 52번은 물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어르신들이 약을 챙겨 제때 복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장은 예상과 달랐다. 대부분 처방받은 약을 잘 복용하고 있었고, 시중에 나온 복약 관리 앱도 여덟 개가 넘었다. 그렇다면 진짜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답은 우리가 준비한 질문이 아니라 어르신들의 이야기 속에 있었다. “병원에서 말해야 하는 건 알지만, 막상 가면 몇 개씩 까먹고 오지. 무엇을 빠뜨렸는지도 몰라 다시 처방받거나, 아예 안 먹기도 해.” 한 어르신의 말씀이었다. 문제는 약을 먹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약을 먹고 있는지가 제대로 기록되고 공유되지 않는 데 있었다. 인터뷰를 마친 뒤 우리는 ‘약을 먹었는가’보다 ‘무엇을 먹고 있는지 누가 알고 있는가’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어르신의 복약 정보가 한 사람에게만 머무르지 않고 의료진과 가족의 돌봄으로 이어지게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렇게 고령층의 복약 정보를 기록하고 의료진과 가족에게 전달하는 플랫폼 ‘약손’이 탄생했다. 당사자의 이야기를 직접 듣지 않았다면 우리 조의 결과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리의 시선은 출발점에 그대로 머물렀을 것이고, 솔루션 역시 청년들의 상상 안에서 끝났을 것이다. 사회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들어야 하는 것은 언제나 당사자의 목소리였다. 특강 첫날 “잘 아는 것보다 잘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회혁신발언대] 유일한 아카데미에서 배운 ‘유일한 정신’

성적을 위한 과제가 아니라,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사회문제를 깊이 파고드는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프로젝트 기반 학습(PBL·Project Based Learning)을 경험할 수 있는 수업을 찾기 어려웠고, 기회가 생기더라도 내가 진정으로 관심 있는 주제를 정해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갈 수 있는 자리는 흔치 않았다. 그러던 중 유일한 아카데미를 만났다. 생명공학 전공생으로서 제약·바이오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원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우리 3조는 ‘희귀난치성 질환과 신약 접근성’을 주제로 선택했다. 희귀난치성 질환 환자를 위한 신약 개발에 기여하는 것은 나의 오랜 꿈이었다. 그렇기에 이 주제만큼은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반드시 깊이 탐구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활동을 시작하자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이 드러났다. 우리 조를 제외하면 제약·바이오 분야를 정면으로 다루는 팀이 없었고, 이 분야에 대해 깊이 있는 조언을 구할 전문가와의 접점도 충분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아쉬움이 컸지만, 돌아보면 그 공백이 오히려 우리를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었다. 조장을 따로 정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프로젝트 전체를 기획하고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 우리가 처음 세운 가설은 ‘희귀난치성 질환 환자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복잡한 행정 절차일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를 검증하기 위해 이민지 전 궤양성대장염 환우회 UC사랑회 회장을 인터뷰했다. 인터뷰 결과, 우리의 가설이 궤양성대장염과 같은 염증성 장질환(IBD) 환자의 현실과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공들여 세운 가설이 틀렸다는 점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고 방향을 수정하면서 오히려 더 중요한

[사회혁신발언대] 매순간 만난 장벽…그럼에도 부딪혀 넘어가다

지금 당신의 앞을 가로막은 벽은 얼마나 단단한가. 주먹으로 가볍게 허물 수 있는 벽인가, 아니면 드릴로도 좀처럼 뚫리지 않는 벽인가. 대학생들이 모여 사회문제의 해법을 찾는 유일한 아카데미에서 우리는 ‘과대·허위 광고’라는 높고 단단한 벽과 마주했다. 첫 번째 벽은 나 자신. 브라질과 미국, 독일, 한국을 거치며 살아온 시간은 나를 설명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수식어가 됐다. 스스로 온전한 한국인도, 완전한 이방인도 아닌 ‘경계에 선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유일한 아카데미 지원서를 쓰고 첫 면접을 보는 순간부터 거대한 벽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팀원들과 대화하는 순간마다 스스로를 검열했다. ‘내 말투가 어색하지 않을까’, ‘전문성이 부족해 보이지 않을까.’ 매번 ‘자신감’이라는 벽 앞에서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디자인 싱킹(Design Thinking) 과정에서 즉흥 발표를 할 때마다 심장이 요동쳤고, 섭식장애를 주제로 박지니 활동가를 인터뷰할 때 진행자를 맡으면서는 긴장감에 숨이 막히는 듯했다. 그러나 서울 시내 청소년센터 6곳에 교구 콘텐츠 기획안을 직접 보내고, 마침내 서초유스센터로부터 회신 전화를 받은 순간 내 안의 벽에 작은 균열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두 번째 벽은 우리 사이. ‘정신건강’이라는 주제로 2조 팀원들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모든 일이 순조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섭식장애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교구 콘텐츠를 만들면 된다고 가볍게 여겼다. 하지만 우리 사이의 벽은 생각보다 두꺼웠다. 무엇보다 ‘비교’가 우리를 괴롭혔다. 다른 팀들은 화기애애하고 열정이 넘쳐 보였다. 그야말로 완벽해 보였다. 그들의 ‘완벽’ 안에도 분명 벽이 있었을 텐데, 조급함에 사로잡힌

[사회혁신발언대] 사회문제 해결은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

좋은 기술이 있다면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대학에서 생명공학과 경영학을 공부하며 기술과 사람의 접점을 고민해온 나에게 이 질문은 점차 중요한 문제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과 서비스가 개발되더라도 정작 필요한 사람에게 제때 닿지 않는다면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게 된 계기는 치매안심센터에서 행정인턴으로 일했던 경험이었다. 현장에서는 필요한 지원이 이미 마련돼 있는데도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연결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를 통해 사회문제를 바라볼 때는 ‘무엇이 존재하는가’보다 ‘그것이 누구에게, 어떻게 닿고 있는가’를 살펴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일한 아카데미는 이러한 고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기회였다. 현장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문제를 구체적으로 정의해 필요한 사람에게 실제로 닿는 해결책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을 직접 경험했다. 우리 팀이 주목한 사회문제는 2030 청년층의 수면제 오남용이었다. 학업과 직장생활 등으로 수면에 어려움을 겪는 청년이 늘면서 수면제를 찾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약을 복용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살피고,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도움을 받는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수면제 오남용의 원인을 탐구하고, 웹앱 솔루션 ‘윌로우 케어’를 기획했다. 프로젝트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일이었다. 이전에는 문제를 충분히 들여다보기 전에 해결책부터 구상하곤 했다. 이번에는 해결책을 정하기에 앞서 문제의 원인과 본질을 파고드는 데 집중했다. 5주 동안 현장 인터뷰와 설문조사, 시장 분석을 진행하며 처음 세운 가설을 끊임없이 검증하고

[사회혁신발언대] 흩어진 희귀질환 정보, ‘Alook(얼룩)’으로 잇다

“환자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민지 전 궤양성대장염 환우회 회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듣게 된 이 한 문장이 우리 팀의 방향을 바꿨다. 유한양행 유일한 아카데미 2026에 지원할 당시 나는 보건통계를 전공하는 대학원생이었다. 데이터로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는 방법은 배웠지만, 정작 그 데이터 뒤에 있는 사람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다. 우리 조가 세운 첫 가설은 명확했다. 희귀질환 환자의 가장 큰 어려움은 산정특례와 같은 복잡한 행정절차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가설은 첫 인터뷰에서 곧바로 뒤집혔다. 궤양성대장염이나 크론병 같은 IBD 계열 질환은 환자 수가 비교적 많고, 확진 시 병원에서 산정특례를 안내받을 수 있어 예상만큼 행정적 어려움이 크지 않았다. 오히려 환자들이 겪는 문제는 필요한 정보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어 찾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특히 환자 수가 극히 적은 희귀질환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두드러졌다. 정보 자체가 부족한 데다, 같은 질환을 겪은 환자를 만나 경험과 정보를 나누기도 어려워 정보 비대칭성이 한층 심각했다. 이에 우리 조는 프로젝트 대상을 고셔병으로 좁혔다. 고셔병은 정보 사각지대가 큰 희귀질환인 만큼, 가장 정보 접근이 어려운 질환에서도 작동하는 해결책을 만든다면 다른 희귀질환으로도 확장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후 우리 조는 총 9차례의 인터뷰와 자문을 거쳤다. 궤양성대장염 환우회 전 회장을 시작으로, 유한양행 임상전략기획팀, 국내 고셔병 권위자인 유한욱 분당차여성병원 소아청소년과·임상유전체의학센터 교수, 국제고셔병협회(IGA),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에 이르기까지, 환자와 의료진, 기업, 환자단체의 목소리를 두루 들었다. 희귀질환 확진까지 걸리는 시간이 평균 9.2년이라는 숫자는 리서치를 통해

[사회혁신발언대] 당연한 불편함과 당연한 배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많은 부분을 불편하게 만든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65세 이상 노령 인구는 2026년 기준 1112만 명으로, 우리는 이미 초고령사회를 살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몸 곳곳이 아파 병원을 찾다 보면 하루에 챙겨 먹어야 하는 약도 자연스레 늘어난다. 유일한 아카데미 2기 활동을 시작하며 우리 조의 시선이 머문 곳은 바로 어르신들의 ‘복약 문제’였다. 활동 초기에는 단순히 어르신들이 약 챙겨 먹기를 귀찮아하거나 임의로 복용을 중단해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문가 인터뷰와 현장에서 어르신들을 직접 만나는 조사를 거치며, 우리가 문제의 본질을 크게 오해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정나나 경복대학교 간호학과 교수를 통해 들은 현장의 현실은 달랐다. 치매 패치를 파스로 착각해 여러 장 붙이고 쓰러지신 분, 혈당약을 중복 복용해 응급실에 실려 가신 분까지, 문제는 약을 ‘안 먹는 것’이 아니라, 약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잘못 먹는 것’에 있었다. 노인 10명 중 9명이 안(眼) 질환을 겪는 만큼, 약 봉투에 쓰인 작은 글씨는 어르신들에게 큰 장벽이었다. 대안으로 꼽히던 QR코드 역시 20명의 어르신을 직접 만나 확인해 보니 실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어르신이 QR코드를 인지하기 어려웠고, 카메라 초점을 맞춘 채 3초 이상 손을 유지하는 동작조차 큰 부담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직관성에 초점을 맞췄다. 스마트폰을 약 봉투나 약 상자에 가볍게 대기만 하면 NFC 태그를 통해 복약 정보가 음성으로 흘러나오는 솔루션을 기획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심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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