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맥아더 펠로십(MacArthur Fellowship)은 과학의 노벨상, 수학의 필즈상, 컴퓨터과학의 튜링상, 언론의 퓰리처상과 함께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꼽힌다. 익명의 선정위원회가 비밀리에 25명 내외의 수상자를 고르고, 선정된 이들은 5년에 걸쳐 총 80만 달러(약 11억3000만원)의 상금을 조건 없이 자유롭게 사용한다. 기준은 독창성, 창의성, 헌신 그리고 자기 주도 능력. 추상적이면서도 포괄적이기 때문에 매년 누가 선정될지 누구도 예상하기 어렵다. 다만 한 분야를 개척한 이들이 이름을 올리는 경우가 많아 미국에서는 ‘맥아더 천재상(MacArthur Genius Award)’으로 불린다.
이 영예의 전당에 2025년, 한국계 미국인 정치학자 한하리 교수가 이름을 올렸다. 올해 선정된 22명의 맥아더 펠로우 가운데 유일한 정치학자다.

1세대 한인 이민 가정에서 자라 하버드 대학에서 학부를 마치고 스탠퍼드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한 교수는 현재 존스홉킨스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친다. 동시에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연구의 국제적 거점인 SNF 아고라 연구소(SNF Agora Institute)의 초대 소장이다. 이 연구소는 스타브로스 니아르코스재단(SNF)과 존스홉킨스대가 공동으로 1억5000만 달러(약 2130억원)를 출연해 만든 기관이다.
한 교수의 연구 주제는 명확하다. 시민이 정치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어떻게 단순한 관객이 아닌 실질적 참여자가 될 수 있는가. 민주주의(democracy)는 글자 그대로 시민(demos)이 스스로 통치(cracy)에 참여하는 제도다. 정당은 스포츠 팀에 비유될 수 있고 선거는 경기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선거 기반의 민주주의는 결코 경기로 환원되지 않는다. 시민은 이 민주주의 ‘드라마’의 관객이 아니라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한 교수의 연구는 시민 참여, 집단행동, 민주주의 역량을 어떻게 강화할 수 있는지에 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성과로 평가된다. 이를 위해 빅데이터·인공지능 분석, 설문과 실험, 그리고 현장에서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터뷰까지 동원했다. 이 같은 연구를 바탕으로 한 교수는 2022년 세계경제포럼과 슈왑재단이 수여하는 ‘사회혁신 사상가상’을 받은 바 있다.
그녀는 지금까지 다섯 권의 저서를 펴냈으며, 가장 최근작인 ‘Undivided(2024)’는 미국 오하이오주의 한 대형 교회가 지역사회에 뿌리 깊은 흑백 갈등을 대화와 소통을 통해 극복한 과정을 생생하게 담았다. 뉴욕타임스와 뉴요커는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다. 분열이 일상화된 시대에 통합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구체적 사례로 보여주면서도 보편적 메시지를 제시한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비슷한 갈등의 진통을 겪는 한국 사회에도 시사점이 크다.
개인적으로도 이번 수상은 각별하다. 필자는 UC버클리에서 박사를 마친 뒤 존스홉킨스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있을 때 한 교수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미국에서 데이터 과학자로 일하던 시기에도 한 교수와의 연구 협력은 이어졌다. 지난 5년간 그녀, 그리고 시민단체 무브온(MoveOn)의 전 최고 데이터 과학자 밀란 드 브리스와 함께 미국 시민사회의 건강성이 지역별로 어떻게 다르고 이것이 사회적·정책적 결과와 어떤 연관을 갖는지를 연구했다. 이 연구는 ‘네이처 휴먼 비헤이비어(Nature Human Behaviour)’ 등 여러 국제 학술지에 게재됐다.
필자가 다시 현장(대학)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을 때도 한 교수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 감사한 마음을 담아 수상 소식 이전에 손편지를 건넸다. “당신이 없었다면, 저는 진작에 학계를 떠났을 것입니다(You’re the reason why I’m still in academia).” 한 교수는 물심양면으로 나를 도와준 멘토이자, 학술 연구와 사회적 실천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는지 몸소 보여준 학자다.
한하리 교수의 연구를 한 줄로 설명하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민주주의를 확률이 아니라 가능성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현실화하려는 학자”라고.
정치학에서는 오랫동안 ‘어떤 사회경제적 조건에서 민주주의가 성립하는가’를 두고 논쟁이 이어졌다. 한국에서도 익숙한 ‘근대화 이론’이 대표적이다. 시카고대·하버드대에서 활동한 배링턴 무어 주니어는 경제가 발전하면 중산층이 형성되고 이들이 사회의 안정화를 원하면 민주주의로 이행한다고 주장했다. 쉽게 말하면, “중산층 없는 민주주의는 없다”는 명제다.
그러나 정말 이런 구조적 조건이 과연 민주주의의 전부일까? 자원의 분배에 따라 권력이 결정된다면, 역사는 언제나 힘 있는 사람과 돈 있는 사람의 편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때로는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기도 한다.
한 교수는 하버드 시절 그녀의 은사인 마셜 겐즈(Marshall Ganz)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았다. 겐즈가 평생 연구해 온 주제는 “시민은 어떻게 함께 행동해 구조적 불리함을 넘어서는가”라는 질문이었다. 그가 강조했고 한 교수가 연구로 입증해온 사실은 단순하다. 자원과 권력은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시민이 관계를 맺고 집단으로 참여할 역량을 갖출 때, 그들은 구조적 약점을 넘어설 수 있다. ‘가능성의 민주주의’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민주주의는 정부와 시민의 관계를 규정하는 제도적 틀에 머물지 않는다. 개인과 개인이 연결되어 ‘우리’가 되어가는 과정이며, 관계와 연대 속에서 실현되고 성장하는 ‘살아 있는 제도’다.
달리 말하면 민주주의는 시민이 건강한 만큼 건강하고, 시민사회가 튼튼한 만큼 튼튼하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는 제도가 무너져서만이 아니라 그 힘줄인 시민사회가 약해졌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되살리려면 시민에게 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요구하고 더 참여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시민들이 서로에게 어떤 책임을 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지금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하고 행동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를 확률이 아닌 가능성으로 이해하는 관점이 위기 시기에 더욱 중요하다. 신학자 월터 브루그만이 ‘예언자적 상상력(1978)’에서 말했듯, 확률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해석하는 데 필요하지만 미래를 열지는 못한다. 미래는 언제나 복수형이며, 함께 상상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가능성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1960년대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같은 흑인 시민사회 지도자들, 그리고 양심 있는 백인들이 함께 흑인의 정당한 투표권을 주장했을 때를 떠올려 보자. 만약 킹 목사가 말한 “흑백이 통합된 사회에 대한 꿈”이 없었다면, 그 목표를 향한 노력 자체가 의미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꿈이 가치 있었기에, 비록 길은 험했지만, 그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노력이 가능했다.
흔히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vision)을 정치인의 몫으로 돌리지만 민주주의의 주인은 시민이다. 정치인은 시민을 ‘대신해’ 미래를 설계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민과 ‘함께’ 그 가능성을 열어가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시민사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함께 꿀 수 있는,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하는 일이다.
한하리 교수의 연구는 이 질문, “우리가 어떻게 함께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고,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가”에 답한다. 그녀의 맥아더 천재상 수상이 반가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분야에서 그녀만큼 적확한 수상자는 없었다. 그녀보다 더 나은 시민에게 이 상이 수여될 수는 없었다.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다시 질문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 민주주의는 확률이 아니라 가능성의 문제이며, 함께 키워가는 제도다. 민주주의가 위기라는 것은 시스템 곳곳이 부서졌다는 뜻인 동시에,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문이 열려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미 금이 갔다면 현상 유지가 답이 아니다. 어떤 가능성을 함께 설계하고, 어떤 미래를 열어갈지는 민주주의의 주인인 우리 각자의 책임이자 권리다.
김재연 미국의 공공 영역 데이터 과학자
| 필자 소개 학계와 실무를 모두 경험한 미국의 공공 영역 데이터 과학자입니다. 2026년부터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 채플힐(UNC Chapel Hill) 공공 정책학과에서 교수로 가르칩니다. 이전에는 미국의 대표적 시빅 테크 단체인 코드 포 아메리카(Code for America)에서 데이터 과학자로 일하며, 미국 정부와 협력해 가난한 사람들이 복지 서비스를 쉽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이외에도 하버드대, 존스홉킨스대, 미시간대의 공공 리더십, 시민사회, 정책 연구소에서 연구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연구자와 실무자가 함께 모여 데이터를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공익을 위한 데이터 라운드테이블(Data for Good Roundtables)’의 공동 설립자이기도 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