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이 이끄는 데이터 과학] 대학은 공익을 키우는 곳이다

김재연 미국의 공공 영역 데이터 과학자
김재연 미국의 공공 영역 데이터 과학자

지난 8월 중순, 나는 미국 남부와 동부의 접경지대인 노스캐롤라이나 주를 약 일주일간 방문했다. 현재 내가 거주하는 곳은 실리콘밸리가 있는 샌프란시스코 항만 지역인데, 캘리포니아가 서부에 있으니 미국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을 찾은 셈이다. 방문 목적은 내년 1월부터 노스캐롤라이나대(UNC) 채플힐 정책학과 교수로 부임할 예정이라 신임 교원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고, 향후 거주지를 정하기 위해서였다. 노스캐롤라이나대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립대학으로 1789년에 설립됐으며, 지금도 최상위 연구중심 대학 중 하나다. 올해로 개교 236년을 맞았다.

나는 UC 버클리에서 박사 학위를 마친 뒤 존스홉킨스에서 박사후 과정을 거쳤고, 한국에서 1년간 교수 생활을 했다. 이후 2년 가까이 미국의 공공 영역에서 데이터 과학자로 일하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오기로 했다. 내년 1월에 강단에 서면 3년 만에 다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다. 박사 과정을 마치고 대학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이 흔하지 않다 보니 “왜 다시 대학으로 돌아왔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것은 대학이 결코 완벽한 조직은 아니지만, 특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대학은 공익을 키우는 곳이다.

◇ 대학이 특별한 이유, ‘독립성’에 있다

대학 교수의 일은 크게 연구와 교육으로 나뉜다. 연구 자체는 대학이 아니어도 가능하다. 기업, 정부, 비영리단체, 싱크탱크 등에서도 활발히 이뤄진다. 나는 미국의 주·지방정부와 협력해 저소득층이 정부 서비스를 더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해왔다. 사회과학 이론과 응용통계는 박사 과정에서 배웠지만, 현장에서 쓸모 있는 연구를 하는 방법은 ‘코드 포 아메리카(Code for America)’라는 시빅테크 단체의 데이터 과학자로 일하며 익혔다.

최첨단 분야라면 오히려 기업이 더 많은 자원과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UC 버클리 인공지능 연구소(BAIR)의 한 교수는 “요즘 대학원생들이 좋은 조건을 제시받아 학위를 마치지 않고 기업으로 간다”고 전해줬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박사 학위가 있으면 현장에서 일하면서 겸임교수로 강의할 수 있다. 정치학 박사를 받은 한 친구는 시카고대 부설 전국여론센터(NORC)에서 일하면서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겸임교수로 가르친다.

정리하자면, 연구든 교육이든 대학에서만 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대학이 특별한 이유는 ‘독립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기업 연구는 대부분 이미 방향이 정해진 과제를 수행하는 형태다. 내부 정치와 조율에서 자유롭지 않다. 대학 연구도 외부 지원과 평가를 받지만, 어떤 주제를 선택하고 어떤 방식으로 접근할지는 연구자의 권한이다. 기업이 분기 실적에 맞춰 성과를 평가한다면, 대학은 3~5년 단위의 긴 호흡으로 연구할 수 있다. 강의 역시 학과와 과목은 협의해야 하지만, 그 내용을 어떻게 가르칠지는 교수의 책임이다. 정년트랙 교수라면 정년 보장이 뒤따르고, 특히 미국의 경우 퇴임 시점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 대학의 사명은 공익…민주주의의 버팀목

그렇다면 왜 이런 독립성이 중요한가. 답은 ‘공익(public interest)’에 있다. 대학은 특정 기업이나 정치 집단의 이해를 위한 곳이 아니다. 미국 대학들은 공립이든 사립이든 모두 법적으로 ‘비영리 기관’이다. UC 버클리 같은 공립대학뿐 아니라 하버드 같은 사립대학도 마찬가지다. 이유는 분명하다. 대학의 사명이 공익에 있기 때문이다.

공익은 ‘정부의 이익’과 다르다. 공익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이익이다. 성숙한 민주주의란 정부가 공익과 크게 어긋나지 않게 운영되고, 차이가 생기면 시민 앞에 책임지는 체제다. 대학은 바로 이 공익을 뒷받침하기 위한 독립적 지식을 생산하는 곳이다.

데이터 과학과 인공지능도 마찬가지다. 기업은 이윤을 좇고 정부는 정치적 목표에 매달리기 쉽다. 이런 유인은 데이터 과학이 사용되는 방향에도 영향을 준다. 하지만 대학은 사회 전체를 바라본다. 시민 다수의 바람이나 취약한 계층의 필요를 반영할 수 있다. 숨겨진 불편과 부담을 드러내고, 사회가 더 나은 길을 찾도록 돕는 곳이 바로 대학이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공익을 지향하는 연구와 교육을 실천하기에는 대학이 가장 이상적인 공간이다. 나는 이런 이유로 다시 대학으로 돌아왔다.

올여름 잠시 한국을 방문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카이스트에서 연구를 발표하며 많은 학생을 만났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학부를 마친 만큼 한국 사회에 대한 애정은 깊다. 최근 한국 대학들은 새로운 전공과 학과를 만들고, 최첨단 건물과 시설을 세우며 외적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대학은 왜 존재하는가.

대학은 공익을 키우는 곳이다. 이 사명에 충실할 때 연구자들이 모이고, 학생들은 경쟁력 있는 전문가이자 책임감 있는 리더로 성장한다. 이러한 대학의 본질은 한국 대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인공지능과 데이터 과학이 사회를 급격히 바꾸는 지금, 공익을 위한 독립적 연구와 교육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만약 대학이 이 책무를 외면한다면 그 빈자리는 특정 이익 집단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대학이 본래의 사명을 지킨다면, 대학은 경쟁력 있는 산업뿐 아니라 성숙한 민주주의의 발판이 된다.

대학은 연구와 교육을 통해 아직 보이지 않는 기회를 발견하고, 그것을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키워내는 곳이다. ‘서울대 10개 만들기’ 같은 정책은 수단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수단이 어떤 목표를 지향하는지, 그리고 대학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다.

김재연 미국의 공공 영역 데이터 과학자

필자 소개

학계와 실무를 모두 경험한 미국의 공공 영역 데이터 과학자입니다. 존스홉킨스 SNF 아고라 연구소의 연구교수이며 하버드 케네디 스쿨 공공 리더십 센터의 연구위원입니다. 이전에는 미국의 대표적 시빅 테크 단체인 코드 포 아메리카(Code for America)의 데이터 과학자로 미국 정부와 협력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더 쉽고, 빠르고, 편하게 복지 혜택을 누리도록 돕는 일을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KDI 정책대학원에서 데이터 과학 담당 교수로 일했고, 공익 목적의 데이터 과학을 소개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다른 데이터가 필요하다(세종서적 2023)’란 책을 썼습니다. UC 버클리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미국 정치학회(APSA)로부터 도시, 지역 정치 부문 최우수 박사학위상(2022), 시민참여 부문 신진학자상(2024)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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