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늦은 밤,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노스캐롤라이나대 채플힐 캠퍼스가 자리한 채플힐은 조그만 대학 도시다. 이곳 주민들 대부분은 교수나 직원, 학생 등 어떤 식으로든 노스캐롤라이나대(UNC) 채플힐과 연결돼 있다. 듀크대와도 차로 15분 남짓 떨어져 있고, 치안과 학군이 좋아 듀크대 교수들이 거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서 이 동네에서는 길을 걸으며 주변 사람을 특별히 의식할 일이 많지 않다.
그런데 그날 밤, 옆에서 함께 걷던 사람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 대화를 나누던 중 그는 불현듯 내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몇 주 전 캘리포니아에서 이사 왔다고 답하자, 그는 다시 물었다. 캘리포니아 말고, 정말 어디에서 왔느냐고. 흔히 듣는 질문이다. “Where are you really from?”
1세대 이민자인 나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마음이 복잡해진다. 캘리포니아에 살기 전 다른 곳에서 지낸 경험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고, 홍콩과 대만, 캐나다, 미국 등 다섯 나라에서 살았다. 도시로만 따지면 열 곳이 넘는다. 한 지역에서 가장 오래 산 곳을 기준으로 하면, 올해로 12년째인 캘리포니아보다 오래 머문 곳은 없다. 지금도 캘리포니아에는 가족이 있고, 수많은 친구와 동료들이 있다.
노스캐롤라이나에는 ‘캐롤라이나 인 마이 마인드(Carolina in My Mind)’라는 유명한 노래가 있다. 1960년대 후반 이 노래를 부른 제임스 테일러는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노스캐롤라이나대 의대 교수였던 덕분에 채플힐에서 성장했다. 이후 가수로 데뷔해 여섯 차례 그래미상을 수상한 그는, 어디를 가든 캐롤라이나의 풍경이 마음속에 떠오른다고 노래했다. 이 곡은 지금도 노스캐롤라이나를 대표하는 노래로 꼽힌다.
그러나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내 마음속에 떠오른 것은 캘리포니아였다. 캘리포니아에서 학교를 다녔고, 가정을 꾸렸으며, 직장을 다녔다. 20대 중후반 이후 내 정체성의 상당 부분은 그곳에서 형성됐다.
미국에는 특정 주나 지역을 ‘자기 집’, 혹은 ‘내 공동체’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다. UC버클리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때 정치심리학을 가르치던 교수는 캘리포니아에서 20년 넘게 살았지만, 여전히 자신을 미네소타 출신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자신이 미국인이기 이전에 미네소타인이라고 말했다.
연방국가이자 크고 다양한 나라 미국에서는 주가 바뀌면 자연환경뿐 아니라 사회와 정책 환경도 크게 달라진다. 한국에서 대전에서 서울로 이사한다고 해서 운전면허증을 새로 발급받거나 건강보험을 다시 알아볼 필요는 없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이런 절차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한 주에서의 행정 경험이 다른 주에서도 그대로 통할 것이라 기대하기 어렵다. 운전면허를 옮길 때 요구되는 서류는 주마다 다르고, 어떤 정보는 웹사이트에 나와 있지만 어떤 것은 직접 지역 차량관리국(DMV)을 방문해야만 알 수 있다. 문화적 충격은 주를 옮길 때마다 반복된다.
어디를 가든 비슷한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어디를 가든 너무나 다른 미국에서 살다 보니 이 나라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애정도 생겼다. 그렇게 연구자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고, 어느새 미국 대학에서 미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미국 정치와 정책을 가르치고 있다. 이번 학기에는 선발된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 아너스 세미나를 맡았다. 정원이 24명인 이 수업에서 매주 논문 네 편을 읽고 토론해야 한다고 첫 시간에 설명하자 네 명이 수강을 포기했고, 결국 20명의 학생이 남았다.
나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나라를 다르게, 그리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믿는다. 전미정치학회(APSA)와 전미사회학회(ASA) 회장을 모두 지낸 유일한 학자였던 세이무어 마틴 립셋은 “한 나라만을 이해하는 사람은 어느 나라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비교의 대상, 즉 거울이 없다면 자신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하기는 어렵다.
미국 민주주의 연구의 고전으로 꼽히는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 역시 프랑스 정치인이자 사상가 알렉시 드 토크빌이 미국을 직접 여행하며 관찰한 기록을 바탕으로 쓰였다. 1835년에 출판된 이 책은 2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유효한 통찰을 남긴다. 토크빌은 미국과 프랑스, 영국 등 유럽 국가들을 자연스럽게 비교할 수 있었기에 미국 사회의 본질을 더 선명하게 포착할 수 있었다. 나 자신을 이해하려면 남을 이해해야 하고, 서로를 이해하려면 다름이 배움의 기회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무엇보다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 집에서도 운동은 할 수 있지만, 집 근처에 근린 시설이나 체육관이 있다면 훨씬 쉬워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더 나아가 이해한다고 상상하는 것과 실제로 이해하는 것 사이에는 연애와 결혼만큼의 차이가 있다.
이런 기회는 대개 사회 조직을 통해 만들어진다. 종교 단체부터 대학 단체, 동호회, 지역 재단, 교육 시설, 복지 단체까지 포함된다. 2020년부터 나는 존스홉킨스대 정치학과 한하리 교수, 데이터 과학자 밀란 드 브리스와 함께 바로 이 주제를 연구해 왔다. 우리는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활용해 170만 개가 넘는 비영리 단체를 체계적으로 분류했고, 그중 지역사회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는 단체들을 찾아냈다. 이 연구 결과는 ‘네이처 휴먼 비헤이비어’와 ‘사이언티픽 데이터’에 실렸고, 뉴욕 카네기 재단(Carnegie Corporation of New York) 등 여러 재단의 지원을 받았다.
학술 연구는 보통 전문가를 대상으로 하지만, 우리는 이 연구가 일반 대중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논문뿐 아니라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 도구도 만들었다. 웹사이트에 접속하면 반응형 지도와 표를 통해 일부 데이터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아래 그림은 채플힐이 위치한 노스캐롤라이나주 오렌지 카운티와 주변 지역의 시민 참여 기회 지도다. 초록색이 진할수록 시민들이 지역사회에 참여하고 서로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많고, 하얀색에 가까울수록 그런 기회가 적다. 가운데 뚜렷하게 보이는 초록색 ‘섬’이 오렌지 카운티(미국의 주보다는 작고, 시보다는 큰 행정단위)다.
이곳은 주 내 100개 카운티 가운데 인구 대비 가장 많은 시민 참여 기회를 제공하며, 미국 전체 3000여 개 카운티 중에서는 119위에 해당한다. 카운티 내 848개 비영리 단체 가운데 399개가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으며, 그 형태가 회원 가입인지, 자원봉사인지, 공공 행사인지, 집단 행동인지도 확인할 수 있다. 민감한 주제를 다루는 단체들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해 개별 단체를 식별할 수 있는 정보는 공개하지 않았다.

노스캐롤라이나뿐 아니라 미국 어디에서든 지역과 동네에 따라 지역사회에 참여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의 격차는 크다. 이 격차는 동부와 서부, 중서부와 남부 사이에도 존재하고, 주 간에도, 주 안에서도, 심지어 같은 카운티 안의 서로 다른 우편번호 지역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미국 전체 지도를 놓고 보면, 서로를 만나고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은 지역보다 그렇지 못한 지역이 훨씬 많다.
누군가에게 “너는 정말 어디에서 왔니”라는 질문의 속뜻은 종종 “너는 대체 왜 여기에 있니”에 가깝다. 캘리포니아에서도, 매사추세츠에서도, 미시간에서도, 일리노이에서도, 그리고 노스캐롤라이나에서도 나는 이 질문을 받아 왔다. 아시아계 이민자나 그 후손들 가운데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이런 질문은 대개 거리나 마트 같은 일상의 공간에서,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잠깐 마주치는 순간에 던져진다.
잠재적 이웃을 먼저 타자로 대하는 사람들은 많고, 나 역시 그런 실수를 저지를 때가 있다. 그렇기에 나는 서로를 알아 갈 기회가 중요하다고 믿는다. 스쳐 지나가는 관계가 아니라, 차나 커피를 마시며 천천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런 공간과 기회가 모든 무지와 오해를 말끔히 지워 주지는 않을 것이다. 유토피아는 없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우리는 지금보다 한 걸음 더 서로에게 가까워질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대학 교육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데 있다고 믿는다. 노스캐롤라이나대는 주 정책에 따라 학부생의 82%가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이다. 그러나 이번 학기에 내가 맡은 강의에는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몬태나 등 타주 출신 학생들이 절반을 넘고, 국제학생도 두 명 있다. 출신 지역이 다양한 만큼 관점과 생각도 다채롭다. 나를 통해서, 그리고 논문을 읽고 토론하며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을 통해 학생들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미국이라는 사회를, 나아가 자기 자신을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를 바란다.
서로를 이해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동시에 그것보다 어려운 일도 없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간극을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좁혀 갈 수 있을 것이다.
김재연 노스캐롤라이나대 채플힐 정책학과 교수
필자 소개
학계와 실무를 모두 경험한 미국의 정책학 교수이자 공공 영역 데이터 과학자입니다. 현재 노스캐롤라이나대 채플힐(UNC Chapel Hill) 공공정책학과 교수로 가르치며, 이전에는 미국의 대표적인 시빅 테크 단체인 코드 포 아메리카(Code for America)에서 데이터 과학자로 일하며 미국 정부와 협력해 저소득층이 복지 서비스를 보다 쉽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또한 하버드 케네디 스쿨, 미시간대 포드 스쿨의 객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며, 존스홉킨스 SNF 아고라 연구소에서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활용해 시민 참여를 연구하는 ‘현대의 아고라’ 프로젝트를 공동 개발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