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연 노스캐롤라이나대 채플힐 정책학과 교수
[공익이 이끄는 데이터 과학] 서로를 이해하기 위하여

늦은 밤,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노스캐롤라이나대 채플힐 캠퍼스가 자리한 채플힐은 조그만 대학 도시다. 이곳 주민들 대부분은 교수나 직원, 학생 등 어떤 식으로든 노스캐롤라이나대(UNC) 채플힐과 연결돼 있다. 듀크대와도 차로 15분 남짓 떨어져 있고, 치안과 학군이 좋아 듀크대 교수들이 거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서 이 동네에서는 길을 걸으며 주변 사람을 특별히 의식할 일이 많지 않다. 그런데 그날 밤, 옆에서 함께 걷던 사람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 대화를 나누던 중 그는 불현듯 내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몇 주 전 캘리포니아에서 이사 왔다고 답하자, 그는 다시 물었다. 캘리포니아 말고, 정말 어디에서 왔느냐고. 흔히 듣는 질문이다. “Where are you really from?” 1세대 이민자인 나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마음이 복잡해진다. 캘리포니아에 살기 전 다른 곳에서 지낸 경험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고, 홍콩과 대만, 캐나다, 미국 등 다섯 나라에서 살았다. 도시로만 따지면 열 곳이 넘는다. 한 지역에서 가장 오래 산 곳을 기준으로 하면, 올해로 12년째인 캘리포니아보다 오래 머문 곳은 없다. 지금도 캘리포니아에는 가족이 있고, 수많은 친구와 동료들이 있다. 노스캐롤라이나에는 ‘캐롤라이나 인 마이 마인드(Carolina in My Mind)’라는 유명한 노래가 있다. 1960년대 후반 이 노래를 부른 제임스 테일러는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노스캐롤라이나대 의대 교수였던 덕분에 채플힐에서 성장했다. 이후 가수로 데뷔해 여섯 차례 그래미상을 수상한 그는, 어디를 가든 캐롤라이나의 풍경이 마음속에 떠오른다고 노래했다. 이 곡은 지금도 노스캐롤라이나를

[공익이 이끄는 데이터 과학] 사람을 위한 정책

삶에서 대부분의 인연은 오래 사귀었어도 쉽게 잊히곤 한다. 그러나 어떤 인연은 잠시 만났을 뿐인데도 오랫동안 이어진다. 나에게 개발경제학자 비자이엔다 라오(Vijayendra Rao)는 그런 인연이다. 2017년 5월, 당시 나는 UC 버클리 정치학과 박사과정에 재학하며 박사논문을 막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지도교수인 폴 피어슨의 안배로 캐나다 고등연구소(CIFAR)가 퀘벡 근교 몬테벨로에서 개최한 소규모 학술 모임에 참석하게 됐다. 미국·캐나다·유럽에서 불평등을 연구하는 20명 남짓의 학계 거장과 소장학자들이 사나흘간 숙박하며 토론하고, 그 결과를 학술 출판으로 연결하는 자리였다. 나는 유일한 대학원생이자 서기로 이 모임에 참여했다. 그 자리에서 처음 알게 됐고, 깊은 인상을 남긴 인물이 당시 세계은행 경제학자였던 비자이엔다 라오였다. 가까운 사람들은 그를 애칭으로 ‘비쥬’라 불렀다. 비쥬는 학술 연구와 정책 연구의 균형, 경제학에 기반을 두되 사회학·인류학·정치학 등 다양한 학문에 열린 태도, 데이터 과학이라는 새로운 도구를 적극 수용하면서도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는 자세를 몸소 보여줬다. 무엇보다 정책을 ‘설계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책을 실제로 겪고 사용하는 사람’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점심 식사를 하며 나눈 짧은 대화 속에서 배운 것이 워낙 많았기에, 국제개발이 내 직접적인 연구 분야는 아니었지만 이후로도 나는 비쥬의 연구를 꾸준히 지켜보게 됐다. 세계은행 개발연구그룹의 리드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그는 2025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4년,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에서는 전후 국제 금융 질서를 논의하는 정상급 회의가 열렸다. 44개 동맹국 730명의 대표단이 약 3주간 회의를 진행한 끝에,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브레턴우즈

[공익이 이끄는 데이터 과학] 왜 정책은 실패하는가

사회과학 가운데에서도 정책학은 비교적 젊은 학문이다. 전미정치학회(APSA·1903), 전미경제학회(AEA·1885), 전미심리학회(APA·1892), 전미사회학회(ASA·1905)는 모두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발족했다. 이에 비해 정책학의 발전은 훨씬 더 늦다. 기존 사회과학을 토대로 정책학이 본격적으로 태동한 시기는 20세기 후반이다. UC 버클리와 듀크대는 각각 1969년과 1971년에 정책대학원을 신설했고, 같은 시기 하버드와 미시간대 행정대학원도 명칭을 정책대학원으로 바꾸며 연구와 교육의 초점을 정책으로 옮겼다. 정책학을 대표하는 학회인 정책분석관리학회(APPAM)가 설립된 것은 이보다 더 뒤인 1978년이었다. 정책학은 정책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출발했기 때문에, 특정 학문의 이론적 발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다른 사회과학 분야와는 태생부터 달랐다. 정책학의 발전에는 대학뿐 아니라 포드 재단, 슬론 재단 같은 민간 재단, 랜드 연구소와 같은 정책 연구소가 깊숙이 관여했다. 일례로 정책학회의 설립에 큰 영향을 미친 기관 중 하나가 매스매티카(Mathematica Inc.)다. 한국에서는 수학 프로그램 ‘매스매티카’를 떠올리기 쉽지만, 여기서 말하는 매스매티카는 1968년 뉴저지주 프린스턴에서 설립된 정책 연구소다. 오늘날 이곳에는 2000명에 가까운 인력이 근무하며, 미국 전역의 공공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평가한다. 정책분석관리학회가 40세 미만의 유망한 정책학자에게 수여하는 ‘데이비드 커쇼상(David N. Kershaw Award)’은 1979년 37세의 나이로 암으로 세상을 떠난 매스매티카 정책연구소 사장의 이름에서 따온 상이다. 1983년 이 상의 첫 수상자인 조셉 뉴하우스는 당시 랜드 연구소 연구원이었고, 이후 하버드대 교수로 자리를 옮겨 보건경제학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 “왜 정책은 의도대로 작동하지 않는가” 정책학계의 실용적 분위기는 지금도 여전하다. 지난 2025년 11월, 나는

[공익이 이끄는 데이터 과학] 민주주의는 확률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맥아더 펠로십(MacArthur Fellowship)은 과학의 노벨상, 수학의 필즈상, 컴퓨터과학의 튜링상, 언론의 퓰리처상과 함께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꼽힌다. 익명의 선정위원회가 비밀리에 25명 내외의 수상자를 고르고, 선정된 이들은 5년에 걸쳐 총 80만 달러(약 11억3000만원)의 상금을 조건 없이 자유롭게 사용한다. 기준은 독창성, 창의성, 헌신 그리고 자기 주도 능력. 추상적이면서도 포괄적이기 때문에 매년 누가 선정될지 누구도 예상하기 어렵다. 다만 한 분야를 개척한 이들이 이름을 올리는 경우가 많아 미국에서는 ‘맥아더 천재상(MacArthur Genius Award)’으로 불린다. 이 영예의 전당에 2025년, 한국계 미국인 정치학자 한하리 교수가 이름을 올렸다. 올해 선정된 22명의 맥아더 펠로우 가운데 유일한 정치학자다. 1세대 한인 이민 가정에서 자라 하버드 대학에서 학부를 마치고 스탠퍼드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한 교수는 현재 존스홉킨스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친다. 동시에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연구의 국제적 거점인 SNF 아고라 연구소(SNF Agora Institute)의 초대 소장이다. 이 연구소는 스타브로스 니아르코스재단(SNF)과 존스홉킨스대가 공동으로 1억5000만 달러(약 2130억원)를 출연해 만든 기관이다. 한 교수의 연구 주제는 명확하다. 시민이 정치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어떻게 단순한 관객이 아닌 실질적 참여자가 될 수 있는가. 민주주의(democracy)는 글자 그대로 시민(demos)이 스스로 통치(cracy)에 참여하는 제도다. 정당은 스포츠 팀에 비유될 수 있고 선거는 경기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선거 기반의 민주주의는 결코 경기로 환원되지 않는다. 시민은 이 민주주의 ‘드라마’의 관객이 아니라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한 교수의 연구는 시민 참여, 집단행동, 민주주의 역량을 어떻게 강화할 수 있는지에 관한

[공익이 이끄는 데이터 과학] 보이지 않는 가난,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

복지가 필요한 이유는 특정한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특정한 상황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2023년, 미국 시빅테크 단체 ‘코드 포 아메리카(Code for America)’에서 데이터 과학자로 일하면서 ‘우리에게는 다른 데이터가 필요하다’는 책을 썼다. 이듬해 학계로 돌아와 2026년 1월부터 노스캐롤라이나대 채플힐(UNC-Chapel Hill) 정책학과 교수로 부임한다. 이 책은 미국 대학 교수로서의 연구 실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학술 도서가 아닌 대중서이고,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썼기 때문이다. 더구나 돈을 벌기 위해 쓴 책도 아니다. 오히려 집필 과정에서 ‘급속 노화’를 경험했다. 책 출간으로 필자가 개인적으로 얻은 것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펜을 든 이유는 사회적 의미 때문이다. 이 책은 공익 목적의 데이터 과학을 한국에 처음 소개한 한국어판 저서다. 나아가 복지가 필요한 이유가 ‘사람이 문제여서가 아니라 상황이 문제이기 때문’임을, 그리고 데이터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경험을 ‘보이게’ 만드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한다. ◇ 가난은 ‘보이지 않는 문제’다 가난은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필자가 10년 넘게 살아온 샌프란시스코 항만 지역을 찾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란다. 거리에 노숙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시(市) 통계에 따르면 노숙자는 2005년 5404명에서 2015년 7008명으로 늘었고, 지금은 8323명에 이른다. 거리에서 사는 삶은 위험하다. 그래서 이들은 자연스레 모여 ‘노숙자촌’을 이룬다. 한국에서 온 방문객들이 이런 지역 근처 호텔에 묵었다가 뜻밖에 노숙자촌을 마주하고 당황하는 경우도 있다. 노숙자의 모습은 미국이라는 강대국, 그러나 불완전한 선진국이 안고 있는 빈곤의 한 단면일 뿐이다. 인구 약 90만 명의

[공익이 이끄는 데이터 과학] 대학은 공익을 키우는 곳이다

지난 8월 중순, 나는 미국 남부와 동부의 접경지대인 노스캐롤라이나 주를 약 일주일간 방문했다. 현재 내가 거주하는 곳은 실리콘밸리가 있는 샌프란시스코 항만 지역인데, 캘리포니아가 서부에 있으니 미국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을 찾은 셈이다. 방문 목적은 내년 1월부터 노스캐롤라이나대(UNC) 채플힐 정책학과 교수로 부임할 예정이라 신임 교원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고, 향후 거주지를 정하기 위해서였다. 노스캐롤라이나대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립대학으로 1789년에 설립됐으며, 지금도 최상위 연구중심 대학 중 하나다. 올해로 개교 236년을 맞았다. 나는 UC 버클리에서 박사 학위를 마친 뒤 존스홉킨스에서 박사후 과정을 거쳤고, 한국에서 1년간 교수 생활을 했다. 이후 2년 가까이 미국의 공공 영역에서 데이터 과학자로 일하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오기로 했다. 내년 1월에 강단에 서면 3년 만에 다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다. 박사 과정을 마치고 대학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이 흔하지 않다 보니 “왜 다시 대학으로 돌아왔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것은 대학이 결코 완벽한 조직은 아니지만, 특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대학은 공익을 키우는 곳이다. ◇ 대학이 특별한 이유, ‘독립성’에 있다 대학 교수의 일은 크게 연구와 교육으로 나뉜다. 연구 자체는 대학이 아니어도 가능하다. 기업, 정부, 비영리단체, 싱크탱크 등에서도 활발히 이뤄진다. 나는 미국의 주·지방정부와 협력해 저소득층이 정부 서비스를 더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해왔다. 사회과학 이론과 응용통계는 박사 과정에서 배웠지만, 현장에서 쓸모 있는 연구를 하는 방법은 ‘코드 포 아메리카(Code for America)’라는 시빅테크 단체의 데이터 과학자로 일하며 익혔다. 최첨단

[공익이 이끄는 데이터 과학] 공공 AI, ‘도입’과 ‘검증’은 함께 가야 한다

이재명 정부가 내건 핵심 국정 목표 중 하나는 인공지능(AI)이다. 대통령실엔 ‘AI미래기획수석실’이 신설됐고, 100조 원 규모의 투자 계획도 발표됐다. 산업 육성과 더불어 정책과 행정 전반에 AI를 도입하겠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정부는 인공지능을 직접 개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행정 현장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기술은 민간 업체가 만든 것을 ‘조달(procurement)’, 즉 구매해 들여오는 방식이다. 이 구조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다. 1966년, 미국 백악관 예산관리국(OMB)은 ‘Circular A-76’이라는 가이드라인을 통해 정부와 민간이 기술 개발을 놓고 경쟁하지 않도록 원칙을 세웠다. 정부는 가능한 한 민간 기술을 구매해 사용하고, 이를 위해 연방조달청(GSA)이 책상부터 위성기술까지 전방위적으로 조달 시스템을 운영한다. ◇ 정부 기술 외주화의 장점과 그림자 정부가 기술을 만들지 않고 사는 구조는 장점도 분명하다. 시장에서 검증된 기술을 비용 효율적으로 도입할 수 있고, 동시에 민간 기술 생태계를 키우는 데도 기여한다. 그러나 그 그림자가 짙다. 한때 미국의 국방과학연구계획국(DARPA)에는 최고 수준의 과학자들이 모여 있었다. 오늘날의 인터넷(알파넷), GPS, 드론, 음성인식, 자율주행차 등은 모두 그들의 손에서 시작됐다. 공공을 위한 기술이 없었다면 스마트폰도, 항공권 예매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정부는 기술을 만들지 않다 보니 기술을 볼 줄 아는 인재가 줄고, 그들의 판단력도 약해졌다. 정부 예산은 단위가 다르다. 적으면 억 단위고, 크면 조 단위다. AI에 대한 투자가 급증하는 지금, 정부는 더 강한 기술을 더 많이 사서 더 넓게 쓰려 하지만, 이를 제대로 판단하고

[공익이 이끄는 데이터 과학] 공짜 규정은 없다

우리는 ‘규제’라고 하면 보통 정부가 시장을 통제하는 것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규제는 시장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도 스스로 규제를 받으며, 시민도 정부를 상대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규제를 경험한다. 이를 ‘규정’이라 부른다. 법이 추상적인 명령이라면, 규정은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는 구체적 원칙이다. 문제는 이 규정이 복잡해질수록 시민이 감당해야 할 행정부담이 커진다는 점이다. 미국 미시간대 포드정책대학원의 파멜라 허드(Pamela Herd) 교수와 도널드 모이나한(Donald Moynihan) 교수는 이를 ‘행정부담(administrative burden)’이라 부른다. 행정부담이란 정책을 이용하기 위해 시민이 감내해야 하는 시간적·심리적·금전적 비용이다. 규정이 어려울수록, 절차가 까다로울수록 시민은 더욱 큰 부담을 진다. 규정은 본래 적법절차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과거의 사건이나 사고를 계기로 규정이 추가된다. 문제는 소수의 사례를 막으려 만든 규정이 모든 시민에게 일괄 적용되면서 오히려 불필요한 비용을 낳는다는 점이다. 정부의 규정은 강제력을 갖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다. 사회적 비용이 결코 적지 않다. ◇ 디지털 정부의 역설…모두가 스마트폰을 가진 세상? 대표적 사례가 한국의 디지털 공공서비스다. 지금 대부분의 온라인 민원은 본인 명의 휴대폰 인증을 요구한다. 겉보기에는 편리하지만, 스마트폰이 없거나 익숙하지 않은 이들, 재외국민, 외국인에게는 높은 벽이다. 실제로 미국 교민인 필자는 지난해 말 미국에서 운전면허증을 갱신하면서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까지 직접 가야 했다. 온라인으로 수수료를 내야 했는데, 결제 과정에서 본인 명의 휴대폰 인증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한국 휴대폰이 없는 상황에서는 선택지가 없었다. 신분증 사본 제출이나 이메일 인증 같은 대안도 있었지만, 시스템은 애초에 그런 방식을

[공익이 이끄는 데이터 과학] 이재명 정부가 ‘리오넬 메시’에게 배워야 할 것

리오넬 메시는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이다. 디에고 마라도나와 함께 아르헨티나가 배출한 최고의 선수로 꼽힌다. FC 바르셀로나에서만 34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을 월드컵 우승으로 이끌었다. 메시의 경기 스타일을 보면 그의 재능, 기술과 함께 정보력이 눈에 띈다. 메시는 공을 받기 전에 이미 수차례 주변을 스캔하며 다음 행동을 준비한다. 남보다 넓게, 자주, 그리고 일찍 보는 능력. 이 스캔 능력이 메시를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하나로 만들었다. 이제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한국의 공공 서비스를 새롭게 혁신할 수 있는 기회를 마주하고 있다. 대통령은 지난 대선 과정에서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을 통한 사회 혁신을 국정 최우선 과제로 강조해 왔다. 이 혁신에는 공공 혁신도 포함된다. 그러나 공공 영역에서 인공지능, 혹은 더 넓게는 첨단 기술을 잘 활용하려면, 도구보다 문제를, 해결책보다 원인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메시처럼 경기장을 ‘스캔’할 줄 아는 능력이 중요하다. 공공 서비스를 국민 모두가 더 쉽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게 만들려면, 먼저 행정 시스템 전반을 넓게 들여다보고, 어디에서 고충이 발생하는지를 정확히 감지해야 한다. 어두운 밤길에서 열쇠를 잃어버리고는, 단지 가로등 아래가 밝다고 그곳만 찾아보는 어리석음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의 정부 행정 시스템은 종종 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행정 조직은 지나치게 분절돼 있고, 각 부처와 팀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처리한다. 서로 연결되지 않다 보니, 시민의 실제 공공 ‘서비스 경험’은 포착되지 못한다. ◇ 콜센터는

[공익이 이끄는 데이터 과학] 한국의 재단들도 ‘시빅 테크’에 투자할 때다

기술은 편리함과 효율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 혜택이 특정 계층에 집중되면, 불평등은 심화되고 사회적 갈등은 더 깊어진다. 이런 구조 속에서 기술 발전이 오히려 대중의 지지를 잃는 일도 발생한다. 기술은 산업과 시장을 위한 도구를 넘어, 더 나은 정부와 사회를 만드는 수단이어야 한다. 필자는 미국의 대표적 시빅 테크 단체인 ‘코드 포 아메리카(Code for America)’에서 데이터 과학자로 일했다. 지금은 다시 대학으로 돌아와, 기술이 어떻게 더 신뢰할 수 있는 공공 서비스를 만들 수 있는가를 연구하고 있다. ‘시빅 테크(civic tech)’는 공익을 위한 기술(public interest tech)의 한 분야로, 시민이 경험하는 정부 서비스를 기술로 개선하는 일을 말한다. 복지 신청에 걸리던 한 시간을 10분으로 줄이는 것, 시민이 법안에 직접 의견을 낼 수 있도록 플랫폼을 설계하는 일, 지역 문제 해결에 시민이 참여할 수 있게 하는 도구 설계 등이 대표적이다. 2006년 MIT 오픈코스웨어를 국내 대학에 도입하며 시작한 내 시빅 테크 활동은 올해로 19년째다. 201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에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현 C.O.D.E.)’에서 활동하며 오픈데이터와 디지털 전환, 사회혁신을 주제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해왔다. 이후 지난 10년 가까이 미국의 학계와 공익 기술 현장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민간 재단들이 기술 생태계 설계자 역할을 자처했다는 점이다.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라, ‘공공을 위한 기술’이라는 실험의 출발점이자 성장 플랫폼 역할을 해낸 것이다. ◇ 코드 포 아메리카와 미국 기업 재단의 실험 전자상거래 기업 이베이 창업자가 만든 ‘오미디야르 네트워크’는 2000년대

[공익이 이끄는 데이터 과학] 공공 영역 인공지능, 쓰긴 쉬워도 잘 쓰긴 어렵다

미국 정부가 인공지능(AI)을 공공정책에 도입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지고 있다. 미 연방정부는 2022년 회계연도에만 인공지능 관련 조달 계약에 20억 달러(한화 약 2조9200억 원)를 썼다. 불과 5년 전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액수다. 국가 안보부터 복지 행정까지, AI는 이미 다양한 분야에 투입되고 있다. 이처럼 막대한 공공 자금이 인공지능에 투입되는 시점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인공지능 도입 자체는 쉬울 수 있지만, 인공지능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잘 쓰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점이다. 미국의 다양한 사례는 이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최근 챗GPT와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을 통해 AI가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지만, 사실 미국 공공 부문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한 알고리즘 기반 업무 자동화는 수십 년 전부터 이어져 왔다. ◇ 성공한 AI와 실패한 AI의 차이는?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 우정공사다. 약 52만 명의 직원을 둔 미국 최대의 공공기관 중 하나인 우정공사는 하루 평균 3억1800만 통의 우편물을 전국에 전달한다. 따라서 업무 효율화를 통한 비용 절감은 이 기관의 큰 과제다. 1990년대, 우정공사는 손으로 쓴 우편번호를 자동 분류하기 위해 신경망 기반 인공지능 기술을 도입했다. 이 시스템은 매일 약 5500만 통의 수기 주소 우편물을 98퍼센트 이상의 정확도로 처리했고, 1997년 한 해에만 1억 달러, 약 1460억 원의 비용을 절감했다. 이 사례는 잘 정의된 문제에 적절하게 설계된 인공지능이 막대한 공공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미시간주의 실업수당 시스템은 인공지능이 잘못 설계될

[공익이 이끄는 데이터 과학] 효율성이라는 이름의 거짓말

2025년 1월 20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새 정부의 정책과 정쟁의 중심에는 특이한 이름의 조직이 있다. 바로 ‘정부효율부(Department of Government Efficiency·DOGE)’다. 이름만 보면 정부의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부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전격적인 정부 예산 삭감과 공무원 대량 해고다. 그리고 이 조직을 이끄는 인물은 다름 아닌 일론 머스크다. 정부효율부(DOGE)의 가장 큰 적은 아이러니하게도 정부 자체다. 연방정부는 200만 명이 넘는 직원을 고용하는 미국 최대의 고용주다. 일각에서는 정부 규모가 지나치게 크다고 지적하지만, 통계를 보면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연방 인사처(OPM)에 따르면, 1968년 이후 인구 대비 연방 공무원 숫자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이든 행정부 시절에는 이 비율이 소폭 감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2기 정부의 ‘효율화’ 정책은 가차 없었다. 정부효율부가 주도하는 구조조정의 충격은 태풍처럼 몰아쳤다. 이미 7만5000명의 연방 공무원이 권고사직을 받아들였고, 최근 1~2년 사이에 채용된 신입 공무원 20만 명이 잠재적 해고 대상 명단에 올랐다. 전체 공무원의 10%에 달하는 규모다. 연방정부의 평균 연령이 46세임을 감안하면,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타깃이 된 것이다. ◇ ‘효율’을 내세운 모순…정부효율부는 무엇인가 그러나 정작 정부효율부 자체는 모순덩어리다. 이름에 ‘부(部)’라는 단어가 붙어 있지만, 미국 헌법상 대통령은 독자적으로 새로운 정부 부처를 만들 권한이 없다. 이는 의회 권한이다. 따라서 정부효율부는 정식 부처가 아니라 백악관 직속 조직이다. 머스크 역시 공식 직함은 ‘특별 정부 직원(Special Government Employee)’일 뿐이다. 실질적인 책임자는 따로 있다. 지난 2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