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재단 WFM, 여성 자립준비청년 특화 첫 모델…교차 취약성 고려한 맞춤형 설계
증빙 없는 지원금·안전한 커뮤니티, ‘관계적 자립’ 이끌어
지난 7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국여성재단 회의실. 보호 종료 이후 홀로서기를 이어온 자립준비청년 이하나(26)씨가 천천히 마이크를 잡았다.
“다른 곳에서는 제 경험을 편하게 꺼낼 수 없었는데, 여기에서는 여성으로서 겪은 트라우마까지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제 모습을 봤어요.”
그의 말에 테이블에 앉은 청년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하나씨는 한국여성재단과 샤넬코리아가 운영하는 ‘2025 We are Future Makers(이하 WFM)’ 프로그램을 마친 수료생이다. 이날 모인 청년들은 “WFM의 핵심은 신뢰”라며, 처음으로 ‘안전한 관계의 기반’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WFM은 단순한 경제적 지원을 넘어, 자립을 준비하는 여성 청년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교류하고 스스로를 이해하며 진로와 삶을 설계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이다. 자립지원금 500만원과 함께 10회 워크숍, 멘토링, 직업 현장 방문 등을 제공한다. 2022년 시작 이후 올해까지 84명이 수료했으며, 샤넬코리아가 후원하고 하자센터·진저티프로젝트가 협력기관으로 함께한다.

◇ 안전한 커뮤니티가 만드는 ‘관계적 자립’
최근 몇 년 사이 자립준비청년에 대한 정책과 지원이 늘었지만, 여성 자립준비청년의 교차적 어려움에 특화된 프로그램은 WFM 이전까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국제 학술지 ‘아동·청소년 사회복지 저널(Child and Adolescent Social Work Journal)’은 올해 논문에서 여성 보호종료청년이 성적 학대나 임신 등 성적 위험에 더 쉽게 노출된다고 지적했다. 2022년 ‘Children and Youth Services Review(아동·청소년 복지 서비스 학술지)’도 여성 보호종료아동이 남성보다 심리·정서적 문제에 더 취약하다고 밝혔다. 여성 보호종료청년을 별도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다. WFM은 이 지점을 겨냥해 ‘신뢰할 수 있는 또래와 어른’을 연결하는 안전한 커뮤니티 구축에 집중했다.

프로그램의 한 참여자는 “남성 친구에게는 말하기 힘들었던 사춘기·2차 성징 같은 경험을 여성 또래들과는 자연스럽게 공유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성·연애·몸 변화처럼 민감한 이야기뿐 아니라, “동네에서 어느 골목이 안전한지” 같은 일상적 정보까지 편하게 묻고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자립준비청년 당사자이자 멘토로 참여한 허진이 작가는 “여성 자립준비청년이라는 이중 정체성이 주는 피로를 처음으로 구조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퇴소 뒤 연애·임신·출산·육아가 다시 낯설고 막막했다”며 “여성 청년이 겪는 고유한 문제를 전제로 한 지원이 있어야 더 단단하게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프로그램의 강사진과 멘토는 여성 직업인으로 꾸려졌다. 참여자들이 여성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고, 각기 다른 경로의 삶을 접하며 미래를 그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조유정(21)씨는 “막걸리를 배워 공방을 차린 멘토님의 이야기가 꿈을 좇는 데 기폭제가 됐다”며 “용기를 내 지난 3월 서울로 올라왔고, 이후 청소년 멘토 활동을 하며 내가 받은 지지를 다시 돌려줄 때 큰 기쁨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번달 발간한 WFM 임팩트 리포트에서도 이런 변화가 확인됐다. 참가자의 98%가 “다른 참여자들과의 연결 경험이 프로그램 몰입에 도움이 됐다”고 답했으며, 프로그램에서 만난 어른들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꼽았다. WFM은 이를 ‘관계적 자립’이라 부른다. 자립을 ‘홀로서기’가 아닌, 타인의 도움을 인정하고 또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 과정으로 본다는 의미다.
홍승현 진저티프로젝트 팀장은 “1기 수료 청년이 ‘이제 제 차례는 끝났으니, 이 기회는 필요한 친구들이 가면 됩니다. 저는 제 삶을 살면 돼요’라고 말했다”며 “WFM이 만드는 변화가 바로 이런 것”이라고 했다. 단순히 몇 명을 지원하는 사업이 아니라, 청년이 스스로 건강한 삶의 리듬을 찾아가는 ‘자립의 여정’을 함께 만드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 증빙 없는 500만원…“믿어주니까, 더 잘하고 싶어졌다”
WFM의 또 다른 강점은 500만원의 자립지원금을 증빙 없이, 청년이 세운 계획에 따라 자율적으로 쓰도록 한 점이다. 금융 교육을 통해 사용 계획을 스스로 고민하게 한 뒤, 지원금은 사업 초반과 중반 두 차례에 나눠 지급됐다. 지원의 목적을 ‘관리’가 아니라 ‘주도성’에 둔 설계다.
제약이 없었던 만큼 청년들의 시도도 넓었다. 한 청년은 자격증보다 실질적 언어 능력을 높일 수 있다고 판단해 언어교환 프로그램에 투자했고, 이는 취업 준비에 직접적인 도움이 됐다. 또 다른 청년은 진로 탐색 과정에서 서핑과 일본어에 도전하며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처음 알게 됐다”고 말했다. 지원금은 각자의 상황과 필요에 맞춰 전혀 다른 방향으로 쓰였다. 자율성이 만들어낸 차이였다.

서현선 한양대 특임교수는 WFM의 핵심을 ‘신뢰’라고 짚었다. 그는 “신뢰는 타인의 선의에 자신의 취약성을 맡기는 것”이라며 “참여자가 돈을 어떻게 쓸지 알 수 없지만, 잘 사용할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WFM은 먼저 취약해지기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지원금이 기대와 달리 쓰일 가능성을 감수하고도 자율권을 열어둔 것은, 그만큼 신뢰에 기반한 접근이었다는 의미다. 서 교수는 “이런 신뢰가 쌓이며 ‘안전하다’는 신호를 주는 환경이 형성됐다”고 덧붙였다.
청년들도 이 신뢰에 답했다. 4기 심사위원을 맡은 조영미 중앙대 전 연구교수는 “참여자들이 자신의 지출 계획을 예상외로 세부적으로 공유한 점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참여자 A씨는 임팩트 리포트에서 “이렇게 믿고 지원금을 주는 경우가 거의 없다”며 “내가 기대받고 있다는 사실이 기쁘고,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장근영 한국여성재단 팀장은 “여성 자립준비청년에게 실제로 필요한 지원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지난 4년간 제한 없는 지원금 도입, 절차 간소화, 네트워크 강화 등을 추진해왔다”며 “이제는 20대 청년들의 진로 탐색과 취업 과정에서 실질적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으로 더 세밀하게 발전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