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시 15분 서울행 KTX-산천 234. 동트기 전 아이를 맡기고 기차에 올라 달이 마중 나온 심야의 택시로 귀가한다. 왕복 680km를 오가다 보니 장거리 이동의 달인이 되었다. 다음 정차역을 알리는 기내 방송은 알람이, 비좁은 기차 좌석은 맞춤형 이동식 독서실이 된다. 서울역 플랫폼에 내리면 새로운 타이머가 울린다. 제한된 시간 안에 오늘의 미션을 완수해야 한다. 버스, 지하철, 택시 모든 교통수단을 섭렵할 기세로 출퇴근 전쟁에 합류한다. 아이를 내 손으로 키우고 싶어 사표를 던지고 남편이 있는 포항으로 이주했다. ‘결혼이주여성’ ‘경단녀’라는 꼬리표가 자동으로 붙었다. 처음 사업 아이템을 피칭하는 자리에서 “남편에게 허락받고 왔냐”는 질문을 반복해서 받았다. 그땐 의아했고 4년이 지난 지금은 숨은 맥락을 이해하게 되었다. 일자리의 범주가 협소한 공업도시는 여성을 집 안에 주저앉힌다. 애 팽개치고 나간다는 날 선 시선과 퇴근 전까지 돌봄의 외주를 맡기는 학원비와 월급을 저울질하게 된다. 제한된 선택지 앞에서 부등호의 방향은 포기를 종용한다. 기울어진 경제권은 크고 작은 결정권에서 나아가 인권과 직결된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이방인으로 살면서 나는 말만 통하는 외국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하물며 언어 소통조차 어려운 해외결혼이주여성의 사정은 더 복잡하다. 본국으로 홀로 떠난 엄마와 남겨진 아이들은 복지의 사각지대에 자리했다. 단 몇백원의 건강보험료 차액으로 사회보장제도에 편입되지 못해 방치된 아이들이 곁에 있었다. 수십 년을 한국에서 살았어도 언어장벽으로 가족 안에서 고립되어 온 결혼이주여성의 상흔은 짙어져만 갔다. 지역에 거주하면서 ‘다문화’라는 세 음절로 함축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현실의 목격자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