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토)

[기차에서 일합니다] 경계를 넘고 간극을 메우며

정유미 포포포 대표
정유미 포포포 대표

7시 15분 서울행 KTX-산천 234. 동트기 전 아이를 맡기고 기차에 올라 달이 마중 나온 심야의 택시로 귀가한다. 왕복 680km를 오가다 보니 장거리 이동의 달인이 되었다. 다음 정차역을 알리는 기내 방송은 알람이, 비좁은 기차 좌석은 맞춤형 이동식 독서실이 된다. 서울역 플랫폼에 내리면 새로운 타이머가 울린다. 제한된 시간 안에 오늘의 미션을 완수해야 한다. 버스, 지하철, 택시 모든 교통수단을 섭렵할 기세로 출퇴근 전쟁에 합류한다.

아이를 내 손으로 키우고 싶어 사표를 던지고 남편이 있는 포항으로 이주했다. ‘결혼이주여성’ ‘경단녀’라는 꼬리표가 자동으로 붙었다. 처음 사업 아이템을 피칭하는 자리에서 “남편에게 허락받고 왔냐”는 질문을 반복해서 받았다. 그땐 의아했고 4년이 지난 지금은 숨은 맥락을 이해하게 되었다. 일자리의 범주가 협소한 공업도시는 여성을 집 안에 주저앉힌다. 애 팽개치고 나간다는 날 선 시선과 퇴근 전까지 돌봄의 외주를 맡기는 학원비와 월급을 저울질하게 된다. 제한된 선택지 앞에서 부등호의 방향은 포기를 종용한다. 기울어진 경제권은 크고 작은 결정권에서 나아가 인권과 직결된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이방인으로 살면서 나는 말만 통하는 외국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하물며 언어 소통조차 어려운 해외결혼이주여성의 사정은 더 복잡하다. 본국으로 홀로 떠난 엄마와 남겨진 아이들은 복지의 사각지대에 자리했다. 단 몇백원의 건강보험료 차액으로 사회보장제도에 편입되지 못해 방치된 아이들이 곁에 있었다. 수십 년을 한국에서 살았어도 언어장벽으로 가족 안에서 고립되어 온 결혼이주여성의 상흔은 짙어져만 갔다. 지역에 거주하면서 ‘다문화’라는 세 음절로 함축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현실의 목격자가 되었다. 

어쩌면 우리는 의도치 않은 방관자였을지 모른다. 이 사실을 자각하고 거대한 문제를 외면하기보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2019년 법인 설립과 함께 시작한 결혼이주여성을 위한 프로그램에서 어느덧 두 번째 그림책을 발행했다. 이들을 작가로 양성해 지역의 발달장애인협회 강사로 파견하며 함께 성장하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이렇게 연결된 ‘시스터 후드’는 시시한 줄 알았던 일상에서 스펙터클한 터닝포인트를 찾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연대가 되었다. 선뜻 내어준 그들의 어깨에 기대어 나는 다시 사회로 진입하는 통행권을 얻었다.

거주지를 옮긴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서울의 100만 생활인구 중 하나로 살아간다. 2주에 한 번 영리더 라운드 테이블 위원으로 서울시의 정책 현안을 모색하고 제안한다. 스무 명의 여성 리더에 포함되어 감사한 동시에 아직 서울을 벗어나지 못한 나의 쓸모를 모색한다. 저출산과 육아 문제를 심도 있게 물색하는 동안 정작 비혼 출산 인구를 위한 정책은 부재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부모에게 한정된 출생신고 의무로 방임과 불법 입양에 노출된 아이들의 사례를 볼 때마다 가슴이 저릿했다. 아이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듯 전 생애주기에 걸친 촘촘한 사회 안전망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엄마의 잠재력을 주목한다는 슬로건으로 포포포 매거진을 만들면서 미혼인 독자들로부터 “엄마가 되어도 제 인생은 망하지 않을까요?”라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 7호의 오프닝을 ‘엄마라는 멸종위기종’으로 시작하면서 한 아이를 키워내는 책임의 화살을 오롯이 개인에게 돌리는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 녹록지 않은 엄마의 삶을 그럼에도 권할 수 있으려면 문제의 본질을 해결해야 한다. 국내 합계출산율 0.78이라는 수치 이면에 가려진 여성의 지속 가능한 내일을 함께 고민해 나가는 사회 구조적인 변화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엄마가 되기 전 내 꿈은 헬조선 탈출이었다. 여기만 아니면 어디라도 천국일 것만 같았다. 이제는 내 아이가 살아갈 그 어느 곳이라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지역을 넘어 국경과 문화의 경계를 초월해 전 세계에서 모인 엄마들과 매일 밤 화상 회의로 만나 반짝이는 현재를 기록한다. 육아가 커리어의 단절이 아닌 새로운 적성과 가능성을 발견하는 기회가 될 수 있도록 우리는 아이와 함께 계속 성장하는 중이다. 경계 사이에서 안전지대를 만들어 온 이들이 세상을 조금씩 움직여 온 것처럼, 변화는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았던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시작된다. 

정유미 포포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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