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변이 사는 法] 전수미 변호사
“자유를 찾아온 북한 이탈 주민들은 남한 사회의 차별적인 시선에 무너집니다. 외국에 여행 갔을 때를 생각해보세요. 그 나라의 문화나 법률을 잘 알지 못해서 이런저런 사고가 나기도 하잖아요? 탈북민은 언어와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온 사람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전수미(37) 변호사는 북한 인권활동가 출신이다. 북한 인권활동에 뛰어든지 햇수로 17년째. 이 가운데 7년은 변호사로 활동했다. 과거에는 직접 탈북민 구출사업을 진행했고, 지금은 북한 이탈주민 정착지원 시설인 하나원이나 통일부·법무부·외교부에 접수된 탈북민 사건을 공익소송으로 진행하고 있다. 또 대통령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회에서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13일 서울 여의도 화해평화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평범한 탈북민들이 편견과 냉대 속에 범죄로 빠지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 주민을 돕는 건 결국 ‘사람’을 돕는 일”
탈북민들은 남한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분쟁에 휘말린다. 대표적인 게 층간소음 분쟁이다.
“북한 출신의 사람들은 목소리가 큰 편이에요. 마치 성난 사람처럼 이야기해요. 아주 평온한 상태인데도 말이죠. 특히 북한에는 층간소음이라는 개념이 없어서인지 법적 분쟁까지 이어져요. 어떻게 보면 간단한 문제인데 법적인 도움을 구할 데가 없어 곤란해 하는 분들이 많죠.”
이 정도는 양호한 편이다. 문제는 폭행 같은 형사사건이다. 그는 “탈북민에게 ‘김정은 XXX’라고 말해보라며 자극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면서 “명백한 인권침해 사건인데 주먹이 오가면서 결국 형사사건으로 처리된다”며 안타까워했다.
전 변호사는 소송뿐 아니라 법제도 개선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남북 교류 확대되고 실질적인 통일 절차가 진행됐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최근 집중하는 문제는 풍계리 핵실험장 인근 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다.
“핵실험장이 있는 길주군 출신의 탈북민 한 분에게 방사능 피폭 증상과 유사한 증상이 나타났어요. 그때부터 문헌 정보와 인터뷰를 통해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는데, 핵실험장 작업자의 경우 피폭 증상으로 사망했다는 증언도 있어요. 북한에서는 우라늄을 직접 채굴하는데 여기에 동원된 사람들의 안전도 문제죠. 특히 길주군에 흐르는 물이 이미 오염됐을 경우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하기 때문에 2차 피폭의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북한이 지난해 핵실험장 폭파 현장을 국제사회에 보여준 만큼 국내에서는 ‘비핵화 후속조치를 위한 특별법’ 등 관련 법제도를 준비해야 한다는 게 전 변호사의 주장이다. 그는 “북한 주민들을 돕는 건 결국 ‘사람’을 돕는 일”이라며 “정치적 이해관계나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중국서 탈북민 구출하다 죽을 고비 넘기기도
학부 시절 그는 외교관을 꿈꿨다. 정치외교학을 전공으로 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꿈을 키워가던 스무살, 갑작스러운 친구의 죽음은 그의 인생을 뒤흔들었다. 친구는 가정 성폭력으로 괴로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가장 친한 친구였다. 전 변호사는 “당시 친구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학업을 이어가기 어려웠다”며 “무작정 인도로 떠나 1년 넘게 지냈는데 그곳에서 길을 찾았다”고 말했다.
“열두살, 열세살 하는 어린 남자 아이들이 광산으로 팔려나가고, 여자 아이들은 성노예로 넘겨지는 인도의 실상을 목격하게 됐어요. 문득 친구 일이 떠오르면서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지에서 만난 아일랜드 친구는 그를 북한 인권활동가로 이끌었다. “옥스퍼드대에서 북한 인권을 주제로 석사 과정하던 친구였는데 ‘북한 사람들도 심각한 상황인데 어떻게 한국인들은 북미나 유럽 사람들보다 관심이 없냐’고 말하더군요. 그 길로 짐 싸서 귀국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전 변호사는 북한민주화위원회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북한민주화위원회는 북한 민주화와 북한주민의 인권해방을 위해 황장엽(1923~2010) 전 노동당 비서가 설립한 비영리단체다. 이곳에서 대외협력팀장을 맡아 UN과 외신에 북한 인권 침해 실태와 탈북민의 목소리를 전달했다. 때론 중국 현지에서 탈북민 구출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공안에 쫓기다가 오른손을 다쳐 장애 판정을 받았어요. 시골 같은데 가보면 담장 끝에 유리조각 같은 걸 박아놨잖아요. 도둑 들지 말라고요. 당시 공안을 피해 담을 넘다가 유리에 손목이 찢겨버린거죠. 의식을 잃을 정도로 피를 많이 흘렸어요.”
쫓기는 몸으로 수술할 수는 없었다. 급히 귀국길에 올라 병원에 도착했지만, 끊어진 신경과 근육을 복원할 수는 없었다. 그는 “당시 의료진이 오른손을 평생 못 쓸 수 있다고 했는데, 재활을 하면서 지금은 엄지와 검지를 움직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서면 작업을 할 때면 일명 ‘독수리 타법’으로 타이핑한다. 전 변호사는 “어쨌든 함께 움직였던 5명 전원이 무사히 빠져나와 다행”이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이제는 현장에서 탈북민을 직접 구출하진 않지만, 마음은 늘 함께하고 있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유와 인권을 위해 목숨 걸고 움직이는 활동가와 탈북민들을 도울 방법을 연구하고 있거든요. 앞으로는 탈북민 인권 보장을 위한 제도와 법률복지제도 마련에도 힘쓸 계획입니다.”
[문일요 더나은미래 기자 ily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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