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대지진 석 달, 튀르키예를 가다
지진 겪은 주민들
우울증·불안 시달려
집·직장 잃고 물가도 올라
경제적 어려움 가중
“지진 이전으로 회복하자”
월드비전, 심리·생계 지원
깨진 콘크리트와 유리 조각들이 걸음을 디딜 때마다 발밑에서 잘그락거린다. 지난 2일(이하 현지 시각) 튀르키예 하타이주(州)의 ‘안타키아’ 지역. 붕괴된 건물 잔해 위로 정체 모를 ‘하얀 가루’가 뿌려져 있다.
“석회 가루예요. 건물 아래 매몰된 시신이 부패하면서 나는 냄새를 방지하기 위해 정부에서 뿌려놓은 겁니다. 냄새는 막을 수 있지만 모여드는 파리들을 막기는 어렵죠.” 손정은 한국월드비전 국제사업본부 대리(튀르키예월드비전 파견)가 말했다.
2월 6일 튀르키예를 강타한 규모 7.8(1차), 7.5(2차) 지진으로 5만여 명이 사망했다. 2만명은 여전히 실종 상태다. 초기 한 달간 진행된 ‘긴급구호’는 마무리됐지만, 더 큰 과제가 남아있다. 피해 주민의 삶을 지진 이전으로 ‘재건 복구’하는 일이다. 지난 1~5일 국제구호개발 NGO 월드비전과 함께 튀르키예 피해 지역을 돌아봤다.
한반도 크기의 영토가 무너졌다
안타키아는 이번 지진으로 전국에서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지역이다. 건축물의 87%가 무너져 거주 불능 상태가 된 ‘유령 도시’ 안타키아를 걸어서 이동했다. 바스러진 건물 잔해를 중장비로 밀어내는 ‘도시 청소’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유서프 튀르키예월드비전 총괄매니저는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무너진 그대로였는데 얼마 전부터 잔해를 치운 곳들이 보이고 있다”면서 “재건을 위한 준비 작업을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튀르키예 정부는 1년 안에 복구 작업을 마무리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현장 NGO들은 복구에 최소 5년, 길게는 수십 년까지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튀르키예 지진 피해 지역의 크기가 ‘한반도’ 면적에 달할 정도로 넓어 단기간에 복구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주택 89만채, 아파트 34만동, 건물 30만동이 이번 지진으로 무너졌다. 집 잃은 이재민 대부분은 임시 거주지에서 지낸다. 자기 집 앞마당에 텐트를 설치한 사람들도 있지만, ‘텐트촌’을 이뤄 생활하는 경우도 많다. 문제는 이런 텐트촌의 상당수가 산발적으로 형성된 비공식 텐트촌이라 화장실, 수도 등 기본 위생 시설도 갖춰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날씨가 조금씩 더워지면서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유서프 총괄매니저는 “하타이주의 경우 여름 기온이 50도까지 올라갈 정도로 덥고 습해 텐트에서 지낼 경우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면서 “또 여름이 되면 질병이 발생할 가능성도 커지기 때문에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순영 한국월드비전 국제사업본부장은 “정부가 이재민을 위한 영구주택을 짓겠다고 약속했지만 입주가 언제 이뤄질지 기약하기 어렵다”며 “이재민들이 최소한의 안전과 존엄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개별 화장실과 인프라를 갖춘 ‘컨테이너 하우스’ 보급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3×7m의 ‘컨테이너 집’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형제의 나라’ 튀르키예의 지진 소식에 우리 국민의 위로와 모금이 쏟아졌다. 한국월드비전에 모인 튀르키예 지진 모금액은 약 87억8000만원이다(5월 18일 기준). 지진 발생 직후 튀르키예에 가장 먼저 긴급구호대응단을 파견한 것도 한국월드비전이었다. 우리나라 외교부와 함께 정부 수송기로 구호물자를 실어나르기도 했다. 유서프 총괄매니저는 “튀르키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의 아픔을 함께해준 한국 국민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지진 피해 주민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가족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셸터(거주지)다. 월드비전이 하타이주에 있는 또 다른 도시 ‘키리칸’에 컨테이너 하우스를 지원하게 된 이유다.
지붕과 담장이 내려앉은 주택, 기둥만 남은 건물들. 키리칸에서도 안타키아와 비슷한 풍경이 펼쳐졌다. 좁은 골목을 따라 10분 정도 올라가니 평탄하게 다져진 광활한 공터가 등장했다. 튀르키예 정부, 현지 NGO인 국제청신월사(IBC)와 함께 조성한 ‘키리칸 컨테이너 캠프’. 400동의 컨테이너 하우스가 입주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3×7m 크기의 컨테이너 하우스에 들어서자 아담한 소파가 놓인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거실 오른쪽에 방 하나, 왼쪽에는 욕실이 딸려 있었다. 4~5명의 가족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으로 침대, 옷장, 냉장고 등이 기본적으로 들어가 있다. 출장에 동행한 조명환 한국월드비전 회장은 “한국 기부자들의 도움으로 이재민들이 좀 더 깨끗하고 안전한 시설에서 지낼 수 있게 됐다”면서 “총 2500명이 살게 될 이 캠프에서는 보건 시설, 아동 센터, 식당 등이 생겨날 예정이며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마켓도 열리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컨테이너 하우스의 입주 경쟁률은 매우 높은 편이다. 텐트 생활을 하는 이재민 대부분이 입주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튀르키예 정부가 필요하다고 밝힌 컨테이너 수는 50만개. 현재까지 보급률은 20% 정도에 그치고 있다. 조명환 회장은 “주거를 안정화하는 것이 지금으로선 가장 시급한 문제”라며 “텐트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컨테이너로 옮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임시 주거지가 아닌 영구주택에서 살게 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날, 다섯 명의 자식을 잃었다
4일 아드야만주 시골 마을 ‘코셀리’에서 만난 할릴(71)씨는 “한국에서 어떻게 이 먼 곳까지 왔느냐”며 여러 차례 물었다.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서 “이웃 마을에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분이 계신다. 와줘서 고맙다”고 했다.
피스타치오와 양파 농사를 짓는 인구 500명의 이 마을에도 지진이 닥쳤다. 해발 640m 고지대에 자리한 시골집들은 납작하게 주저앉았고 그 옆에 텐트가 하나씩 세워졌다. 지진을 목격한 주민들은 “멀리 능선과 너른 들판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며 “무섭고 낯선 풍경이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이 동네에서 5명이 사망했다. 250여 명이 사는 이웃 마을에서는 20명이 죽었다.
할릴씨의 집도 지진으로 무너졌다. 집터 옆에 설치된 텐트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좀 더 나눴다. 그는 “지진으로 6명의 자식 중에 5명이 죽었다”고 말했다. 아드야만 도심의 18층짜리 아파트에 모여 살던 자녀들이 지진으로 붕괴된 건물에 깔려 한날한시에 세상을 떠났다. 그 건물에서만 283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지진으로 내 삶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은 마을에 사는 에미네(48)씨도 “지진으로 친척들이 여럿 다치고 죽었다”고 했다. 가족이 함께 살던 2층 집도 사라졌다. 에미네씨는 “열두 살짜리 막내딸이 가장 걱정된다”고 했다. “첫 지진이 났을 때 새벽 4시 반이었어요. 우리 가족은 잠옷을 입은 채로 밖으로 도망쳤고 겨우 살아남았어요.” 그날 이후 착했던 막내딸이 딴사람이 됐다. 자주 화를 내고 잠도 잘 못 잔다. 잘 때도 불을 켜놓고 잔다. 학교 공부에도 흥미를 잃었다. “지진의 기억이 아이를 힘들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지진 이후 5배 뛴 집세…생계 막막
재난 전문가들은 주거 지원만큼 중요하고 어려운 게 ‘심리 지원’이라고 강조했다. 지진 등 재난으로 생겨난 부정적인 감정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일상 복귀가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한 상담과 치료가 병행돼야 한다는 설명이다. 유서프 총괄매니저는 “지진을 겪은 튀르키예 사람들에게서 우울증이나 불안 등 여러 가지 심리적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면서 “특히 어린아이들은 왜 잠이 안 오는지, 왜 불안한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월드비전은 지진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트라우마와 정서 문제를 돌보는 전문적인 심리 지원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이다.
지진 이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이재민들을 위한 ‘생계 지원’ 프로그램도 준비하고 있다. 손정은 대리는 “월 2000리라였던 집세가 지진 이후에 1만 리라로 뛰었고, 5리라였던 우유 값은 20리라로 올랐다”면서 “물가가 급등하면서 이재민들의 생활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월드비전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지원으로 지진 피해 이재민 중 가장 취약한 가구에 총 300만달러 규모의 ‘E-바우처’를 제공할 예정이다. 9500개 가구를 선정해 지역의 마트에서 식료품과 생필품을 구입할 수 있는 ‘카드’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가구당 지원금은 316달러(약 42만원)다. 장애인·노인·아동이 포함된 가정, 사회경제적 취약성이 높은 시리아 난민 가정 등이 대상에 포함된다.
대지진 이후 석 달이 흘렀다. 유서프 총괄매니저는 “튀르키예를 잊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지진 초반 뜨거웠던 국제사회의 관심이 식어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진짜 구호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면서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은 튀르키예 사람들이 지진 이전의 삶을 회복할 수 있도록 끝까지 응원해달라”고 말했다.
가지안테프·하타이·샨르우르파·아드야만=김시원 기자 blindletter@chosun.com
“형제의 나라, 지진 딛고 일어서길”
[미니 인터뷰] 조명환 한국월드비전 회장
―튀르키예 지진 피해 지역을 돌아본 소감은?
“완전히 파괴된 도시를 직접 보고 나니 이재민들의 막막함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한반도 면적에 달하는 국토가 지진으로 무너졌다. 튀르키예 정부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국제사회의 관심이 절실하다.”
―지진 발생 이후 월드비전은 어떤 지원을 했나.
“처음 30일간 진행한 1차 긴급구호 단계에서는 튀르키예-시리아 지역 이재민 약 45만명을 지원했다. 튀르키예에서는 가지안테프, 아드야만, 킬리스, 샨르우르파, 하타이 지역에 식수·위생, 비식량 물자, 바우처를 지원했다. 시리아에서는 이들리브와 알레포 지역을 대상으로 긴급재난 지원금을 배분했다.”
―튀르키예 정부, 현지 NGO와의 파트너십이 중요할 것 같다.
“월드비전은 튀르키예 정부의 승인을 받아 활동하는 기구다. 국제구호개발 NGO 가운데 정부의 승인을 받은 곳은 월드비전과 세이브더칠드런 두 곳뿐이다. 월드비전이 튀르키예에서 활동한 지 올해로 10년차가 됐다. 튀르키예로 넘어온 시리아 난민을 돕기 위해 사무소를 차렸고 줄곧 로컬 NGO들과 함께 일했다. 이 네트워크를 이번 지진 대응에 활용했기 때문에 더 신속한 대응이 가능했다.”
―시리아 쪽도 지진 피해가 컸다고 들었다.
“시리아 북서부 지역의 아동과 주민들은 13년째 계속된 전쟁으로 이미 매우 취약한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번 지진으로 더 극심한 위기에 빠지게 됐다. 건물이 무너졌는데 중장비를 동원할 방법이 없어서 건물 잔해를 손으로 파내 사람을 구조해야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월드비전은 튀르키예뿐 아니라 시리아 지진 피해 복구에도 주력하고 있다.”
―앞으로의 대응 계획은?
“월드비전은 지난 3월 6일을 기점으로 지진 대응 단계를 2단계인 ‘조기 복구’로 전환했다. 이재민의 기본적이고 긴급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식수·위생, 식량, 현금 지원을 이어가는 중이다. 아동들의 심리지원에도 집중하고 있다. 오는 10월부터는 3단계인 ‘재건 복구’에 돌입한다. 우리 국민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형제의 나라’ 튀르키예가 재난을 딛고 일어설 때까지 장기적인 지원을 이어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