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혁신발언대] 청년 우울증, ‘함께 있어주는 마음’이 해답이었다

스무 살은 흔히 ‘가장 빛나는 시기’로 불린다. 과학도 그렇게 말한다. 신체와 뇌가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청년들은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불안정한 고용, 위로조차 받기 힘든 관계, 그리고 10명 중 3명이 우울증 위험군이라는 통계. 숫자가 보여주는 건 ‘빛나는 청춘’이 아니라 불안과 고립의 그림자다. 문제는 이 현실이 사회적으로 충분히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청년 자신조차 서로의 고통을 ‘나약함’이라 치부하기 일쑤다. 유일한 아카데미에서 우리는 ‘청년 우울증’을 주제로 삼았다. ‘푸른고래리커버리센터’와 ‘온기’ 대표, 우울증을 경험했던 당사자 2명과의 인터뷰, 101명의 청년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통해 결론은 명확해졌다. 직접적인 치료는 전문가의 몫이지만, 위험에 노출된 청년 곁에 있는 또래들이 서로를 지키는 안전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발견한 열쇠는 ‘진정한 공감’이었다. 공감은 단순히 동의하거나 경제적 지원을 뜻하지 않았다. 과거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떠올려보면,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아도, 잘 모른다고 말해도 괜찮았다. 중요한 건 ‘함께 있어주려는 마음’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공감을 지나치게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해왔는지도 모른다. 이 깨달음을 단순한 경험으로만 남겨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청년들이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가이드북과 체험형 전시를 기획했다. 유일한 아카데미는 공식적으로 마무리됐지만, 우리의 활동은 이어지고 있다. 현장 학습 과정에서 만난 사단법인 온기 조현식 대표를 다시 만나 조언을 들었고, 연세대 간호학과 교수에게도 자문을 구했다. 우리가 초기에 구상했던 프로젝트가 현장에서 실제로 구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앞으로 더 많은

[사회혁신발언대] 치매 노인 실종, 시민의 손에 달렸다

치매 환자 100만 명 시대. 그러나 일상 속 어려움에 대한 공감은 여전히 부족하다. 책 ‘어서와 치매는 처음이지?’를 쓴 현장 전문가 홍종석 사회복지사와 경찰청 문해린 경위를 만나면서도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아무리 헌신적인 전문가들이 있어도, 시민들의 공감과 참여 없이는 문제 해결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2021년 시행된 실종경보문자는 시민들의 도움을 얻어낸 성공 사례였다. 그러나 줄글 형식과 흐릿한 CCTV 사진은 불편을 줬고, 결국 많은 시민이 문자를 차단했다. 발송 건수는 늘었지만 제보는 줄었다. 우리 팀이 기획한 ‘치매 배회 노인 안전망 사업’은 이런 불편을 줄이고, 시민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정보를 접하며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자 했다. 현장에 나가면서 배운 건 분명했다. 통계와 데이터는 문제의 심각성을 알려주지만, 왜 그런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반면 당사자와 전문가를 만나면 원인이 명확해진다. 책상 위에서 세운 가설은 인터뷰 몇 번 만에 수정됐고, 구상한 해결책은 더욱 구체화됐다. 사회문제든 사람이 하는 일이든, 출발점은 현장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유일한 아카데미를 통해 자신감도 커졌다. 팀원, 스태프, 현장 전문가, 강연자까지 다양한 사람들과 수없이 대화를 나누며 공감대를 쌓았다. 이 과정에서 궁금했던 점들을 풀 수 있었고, 사회에 나가서도 다양한 사람들과 배우고 협업할 수 있겠다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조급해하기보다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처럼, 공감이 모여야 사회적 변화가 시작된다. 앞으로는 제약회사에 들어가 안전하고 품질 좋은 의약품 생산에 기여하고 싶다. 더 나아가 배움을

[사회혁신발언대] 도심 유휴지 실험, 주차장이 사회적 가치를 만든다

밤마다 갓길에 불법주차된 화물차, 누구의 책임인가. 이 문제를 ‘운전자 개인의 태도’로 치부하는 시선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정작 이들이 마음 놓고 차를 댈 곳은 거의 없다. 전국에 등록된 차량은 약 2600만 대, 그중 트럭과 버스, 중장비 등 상용차만 450만 대다. 차량 6대 중 1대가 상용차라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나 지자체가 조성한 공영 화물차 차고지는 턱없이 부족하다. 상용차 비중이 가장 높은 경기도의 경우, 수원·의왕·화성에 단 4곳의 공영 차고지만 운영되고 있으며 이마저도 포화 상태다. 2020년에 대기 신청한 운전자가 아직도 공간을 배정받지 못할 정도다. 결국 많은 화물차들이 골목과 갓길로 밀려난다. 밤샘 불법주차는 운전자 본인과 시민 모두의 안전을 위협하며, 교통사고와 인명 피해로 이어진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주차공간을 찾아 헤매는 동안 발생하는 공회전은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연료도 낭비된다. 시간이 지체되면 근로시간은 늘어나고, 단속을 위한 행정비용도 발생한다. 빅모빌리티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트럭헬퍼’라는 도시 유휴 공간(Dead Space)을 활용한 민간 화물차 주차장을 개발해왔다. 상용차 운전자는 안정적인 주차공간을 얻고, 토지주는 새로운 수익 모델을 확보하며, 지자체는 불법주차 민원을 줄일 수 있다. 지역 주민에게도 보다 안전한 도로환경이라는 이익이 돌아간다. 화물차 주차장 1개소 기준으로 보면, 고령 토지주는 연평균 약 2400만 원의 수익을 얻고, 화물차 운전자는 연간 4750시간의 주차 탐색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이로 인해 연간 약 39톤의 이산화탄소가 감축되며, 교통사고 및 행정비용 등 연 1억 원 규모의 사회적 비용도 절감된다 빅모빌리티는 이러한 정량지표를

[사회혁신발언대] 지역에서 발견한 미래, 소멸을 넘어 전환으로

“듣기 어려운 젊은이들 목소리가 들려 반가운 마음에 나왔지요.” 경상북도 영주의 한 골목에서 만난 어르신의 말씀이었다. 무더운 날씨에도 집 밖으로 나와 길을 안내해 주시며 건네신 말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듣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린 현실, 그리고 그런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반가워하시는 어르신의 마음은 지역이 직면한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대기업에서 정년 퇴직 후, 사회 혁신을 추구하는 회사에서 새로운 출발을 한 나에게 이번 원주-풍기-영주로 이어진 현장 탐방은 특별한 의미였다.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지방소멸’이라는 무거운 단어로 표현되는 현실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와 혁신이 살아 숨 쉬는 현장이었다. 영주도시재생센터 센터장의 말씀이 울림을 줬다. “지방소멸이라는 표현은 외부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가능하면 ‘소멸’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얼마나 서울 중심의 시각으로 지역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재래시장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오랜만에 젊은 사람들이 왔다며 반가워하는 상인들의 모습에서 지역 경제의 현실을 목격했다. 그들의 반가움 뒤에는 점점 줄어드는 젊은 고객들에 대한 아쉬움과 걱정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달랐다. 원주의 ‘온세까세로’에서는 시니어와 청년이 함께 반죽을 빚으며 세대 간 협력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고 있었다. 풍기의 ‘디에스푸즈’ 젊은 대표는 아버지의 안정적인 농장을 물려받는 대신, 지속가능한 농업이라는 더 큰 비전을 택했다. 영주 기반 ‘남산선비마을’의 20대 대표는 청년들이 떠나는 마을에서 오히려 청년들이 찾아오는 마을을 만들고 있었다. 봉화의 ‘봉화새댁수리단’ 경력보유여성들은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했다. 이들 모두는 지역의 제약을 오히려 새로운 기회로 전환하고 있었다.

이재현 NPO스쿨 대표
[사회혁신발언대] 비영리는 ‘스테이블 코인’을 준비하고 있나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미국은 스테이블코인 법제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대표 법안인 ‘GENIUS 법’이 지난 18일(현지 시각) 상하원을 통과해 공식 법제화 됐다. 국채와 암호화폐를 연계해 달러 패권을 지키겠다는 의도가 깔렸다. 민간 금융기관들도 이에 동참하겠다는 입장이다. JP모건, 시티그룹 등 주요 금융사들이 앞다퉈 참여를 선언하며 디지털 전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처럼 담보가 없는 ‘무담보 코인’이 아니라, 1코인을 1달러에 연동한 ‘담보 코인’이다. 변동성이 크고 가치 보장이 어려운 무담보 코인이 투자자산으로만 소비돼온 데 반해, 스테이블(stable)코인은 담보 기반의 안정성 덕분에 공식 통화의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통화 가치를 우선시한 암호화폐를 만든다면, 가장 적절한 형태는 국가가 보증하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이하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일 것이다. CBDC는 국가의 공식 화폐를 디지털화한 형태로, 중앙은행이 발행하고 관리한다. 때문에 정부의 통제가 필연적이며, 이 때문에 ‘감시 수단’이라는 비판도 뒤따른다. ◇ 스테이블코인 띄우는 美… 달러 패권의 새 무기 반면 스테이블코인은 비트코인·이더리움 같은 변동성 높은 무담보 코인과 달리, 달러나 국채 등 실물 자산을 담보로 삼아 가격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이런 구조 덕분에 정부 개입 없이도 안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어, ‘중앙통제 없는 대안 화폐’로 주목받아 왔다. 이미 미국을 위주로 사용되어 오다가 이번 법안을 통해 본격 궤도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디지털 자산 시장의 선두를 자처한 다양한 암호화폐가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이 자리하고 있다 수년간 CBDC는 암호화폐 시장의 안정적 대안으로 거론돼왔다.

[사회혁신발언대] 임팩트 투자사 인턴십이 내게 남긴 것

대학 졸업을 앞두고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막연한 불안감 속에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만 되풀이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미래내일 일경험 인턴’ 공고를 보게 됐다. ‘재무적 이익과 사회적 가치를 함께 추구한다’는 MYSC의 소개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선행의 선순환에 기여하는 일을 찾고 싶었던 나는 자연스레 MYSC의 투자밸류업팀 인턴에 지원했다. MYSC에서의 인턴 생활은 낯선 여행과 비슷했다. 3개월 동안 매일 새로운 경험을 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점심이나 커피를 함께하며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평적인 문화 덕분이었다. 내부 워크숍, 사내기업가 인터뷰, 워크숍, 잦은 미팅은 마치 새로운 도시의 골목골목을 탐험하는 느낌이었다. 특히 사내기업가 인터뷰는 인생의 시점마다 고민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사회 초년생인 나는 지금이 가장 중대한 선택의 순간이라 생각했지만, 나보다 앞선 선배들은 여전히 다음 선택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직 내게는 수많은 길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내가 맡은 첫 과제는 투자밸류업팀의 업무 데이터를 정리해 모두가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었다. MYSC 내부에서는 투자밸류업팀의 정보가 익숙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각 팀이 필요한 정보를 따로 요청하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에어테이블을 선택했고, 나는 데이터를 정리하고 사용자 친화적인 인터페이스를 구현했다. 이를 통해 각 부서가 투자 절차별로 어떤 정보가 필요한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업무 자동화와 디지털 전환의 현실을 몸소 체감했다. 데이터를 입력하고 가공하는 시간과 노력이 만만치 않았다. 반면, 자동화를 통해

정태은 비랩코리아 선임매니저
[사회혁신발언대] 1만개 기업이 참여하는 새로운 비즈니스의 미래

지난해 만난 한 스타트업이 흥미로운 경험을 들려줬다. 미국의 한 보험사와 협업을 논의하던 중, 예기치 않게 ‘비콥(B Corp) 인증을 받았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는 것이다. 해당 스타트업은 인증을 받지 않은 상태였지만, 상대 기업은 ‘한국 스타트업과의 첫 거래’라는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신뢰 지표로 비콥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비콥이 글로벌 기준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비콥 운동은 처음엔 작고 다소 무모한 시도에서 시작됐다. 비콥 운동의 여정을 보여주는 책 ‘비즈니스 혁명, 비콥’에는 19년 전 비랩(B Lab)의 공동 설립자들이 약속 없이 회사를 무작정 찾아가거나, 콜드 메일을 보내고 음식점에서 답장을 기다리면서 기업 리더들을 설득하던 모습이 담겨있다. 순진해 보일 수도 있는 이런 시작이 오늘날의 글로벌 운동으로 이어진 셈이다. 기업의 책임있는 변화를 이끌어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점을 해결한다는 이상주의자의 믿음 같았던 비콥 운동은 이제 전 세계 100여 개국, 1만 개의 인증 기업, 100만 명의 기업 구성원이 참여하는 글로벌 운동으로 성장하는 모멘텀을 맞이하고 있다. 비콥은 재무적 이익과 사회환경적 목적을 균형있게 추구하는 기업에게 성과를 검증하고 부여하는 인증이자, 기업 리더 커뮤니티가 참여하는 기업 문화 운동이다. 이번달 비랩 글로벌이 발표한 2024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11곳에 불과했던 상장 비콥 기업은 2024년 말 75곳으로 늘었다. 시장은 이제 ‘목적 중심 기업도 성장할 수 있다’는 명제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소비자와 직접 맞닿아 있는 식품, 화장품, 의류 업계가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비콥의 인지도 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56%가

이재현 NPO스쿨 대표
[사회혁신발언대] ‘네왜문화’에서 ‘왜네문화’로 바뀐 비영리 현장의 과제

서구사회는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업무를 지시하면 부하직원이 ‘왜?’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상사가 그 이유를 납득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네’라는 답을 얻을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상사가 지시하면 우선 ‘네’라는 답을 하고 뒤돌아서 ‘왜?’라고 의구심을 가진다. 직무중심의 조직문화는 납득할 만한 직무를 부여할 때 업무가 작동하는 원리이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직급중심의 조직문화란 사람 사이에 서열을 정해주면 업무가 작동하는 원리를 뜻한다. 따라서 전자는 이유가 중요하고 합의과정이 중시되어 능동성이 개입된다. 후자는 직급에 적합한 권한과 책임의 부여가 중요하고 일정한 당위성이 개입된다. 직무중심이냐 직급중심이냐의 기준으로 미국 기업문화와 일본 기업문화를 조망한 윌리엄 오우치의 Z이론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기인한 조직을 바라보는 두 개의 관점은 수직인가, 수평인가라는 이분법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질서가 있는지(hierarchy, 하이어라키), 아니면 복잡하여 질서가 잘 드러나지 않는지(heterarchy, 헤테라키)에 대한 논쟁이 그 시작이다. 하이어라키는 서열을 뜻하는 위계(位階)로 풀이된다. 질서가 있으되 잘 드러나지 않는 복잡한 상황을 일컫는 헤테라키는 혼계(混界) 또는 비위계라고 불린다. 혼계는 권한이 분산되고 협력과 유연한 작동이 가능하여 수평적 조직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하지만 혼계를 수평적 조직으로 단언하면 안된다. 그 이유는 수직적 조직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수평적 조직으로의 변화를 급속히 이행하는 많은 경우 예기치 못한 변수와 왜곡이 불거지고 구성원들이 느끼는 피로감과 스트레스가 증폭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완벽한 수평이란 존재하지 않거나 구현되지 않는 까닭이다. 혼계가 지향하는 것은 기계적으로 완벽한 수평이라기보다 각자의 역할에 따른 행동이 보장되고 그 바탕 위에 서로 건강한 관계를

[사회혁신발언대] 임팩트 생태계의 텃밭에서 싹을 틔우다

한국 공교육 과정을 밟은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익숙한 것이 있다. 바로 생활기록부의 ‘진로희망사항’ 칸이다. 희망 직업과 희망 사유를 매 학기 작성해야 하는 이 항목은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이어진다.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늘 머뭇거렸다. 잘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뚜렷하지 않았다. 다만, 세상의 불평등과 분쟁을 바라보며 막연히 “더 나은 세상이 될 수는 없을까?”라는 질문을 품었다. 하지만 그 방법을 알지 못한 채 시간은 흘렀고, 어느덧 나는 ‘취준생’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달게 되었다. 구직 활동 중이던 나에게 한 지인은 임팩트투자사이자 액셀러레이터인 MYSC(엠와이소셜컴퍼니)를 소개해 주었다. 그렇게 지난 9월, 나는 임팩트 생태계를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 ‘사내기업가’로서 싹을 틔우다 MYSC는 ‘미래내일’ 인턴십 프로그램을 통해 나를 맞이해 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3개월간의 인턴십에서 나는 MYSC가 구성원들을 단순히 직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내기업가’로 정의하며 자율성과 책임감을 부여한다는 것을 경험했다. 이곳은 개인의 성장, 성숙, 성과를 전 과정에서 조화롭게 추구하도록 독려했다. 지난 3개월 동안의 경험은 바로 그 ‘3성’에 진심인 조직이었음을 증명했다. 워크숍, 독서 모임, 티타임 등 자발적으로 진행된 활동 속에서 배움과 나눔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디자인씽킹 워크숍이 인상적이었다. 하루의 루틴과 감정을 객관적으로 관찰해 문제를 정의하고, 최적의 하루를 설계하는 과정을 통해 나 자신을 깊이 들여다볼 기회가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내 성향을 파악하고 일상을 주도적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아침형 루틴과 저녁형 루틴을 번갈아 시도하며 독서, 운동, 일기 등 다양한 활동으로 하루를

[사회혁신발언대] 임상시험 담당자로서 환자와 공감한다는 것

회사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있어 기업철학이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회사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몸소 실천하며 일하는 직장인은 얼마나 될까? 이에 대해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우리 회사 에자이는 모든 직원이 기업철학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며 일하는 곳이다. 에자이의 기업철학인 hhc(human health care)는 환자와 그 가족을 헬스케어의 중심으로 보고, 그들의 마음에 공감하며 이를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전 세계 약 1만 명의 에자이 직원들이 이 철학을 바탕으로 환자와 가족의 관점에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본사에는 hhc 활동을 지원하는 전담 부서가, 한국에자이에는 기업사회혁신 부서가 그 역할을 맡고 있다. 나는 2년 6개월 전, 에자이 의학부 임상 담당자로 입사했다. 임상시험 기획과 운영을 통해 신약 개발을 돕는 업무를 맡아왔다. 입사 초기에는 hhc 철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환자를 중심으로 약을 개발하는 건 제약회사라면 당연한 일 아닌가?’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저 내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러던 중, 한국에자이 기업사회혁신 부서에서 글로벌 임상시험에 참여한 혈액암 환자와의 인터뷰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의외로 임상시험 담당자로서 환자와 직접 마주할 기회는 거의 없다. 나 역시 임상 업무를 시작한 지 7년 만에 처음으로 환자와 대화를 나누는 기회를 가졌다. 이 인터뷰는 hhc 철학의 의미를 몸소 체감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사전에 준비한 질문은 임상시험과 관련된 실무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임상시험 과정에서 겪은 불편함은 무엇이었는지?”, “제약회사가 개선해야 할 점은

누하 이자투니사(Nuah Izzatunnisaa) 케이팝포플래닛 캠페이너, 인도네시아
[사회혁신발언대] 플라스틱 상술에 갇힌 케이팝

나는 2018년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에이티즈를 보고 케이팝을 처음 알게 됐다. 리듬에 몸을 맡기지 않으려 애쓰다 실패하는 모습에 매료된 나는 그들의 음악을 찾아 들었고, 강렬한 사운드에 빠져들었다. 일주일 뒤에는 ‘I love you so much Yoonho’라는 트위터 헌정 계정을 만들며 열혈팬이 됐다. 팬이 된 뒤, 케이팝의 세계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했다. 나보다 8년 먼저 엑소의 팬이었던 동생은 내 유난에 혀를 찼지만, 지금의 팬 활동은 단순히 유튜브 ‘좋아요’를 누르던 예전과는 다르다. 팬들은 밀리언셀러(음반 100만 장 판매 가수)를 만들기 위해 한국에서 직접 앨범을 주문한다. 한 장이 아니다. 앨범에 들어있는 ‘최애’의 포토카드를 모으기 위해, 커버 사진이 다른 앨범을 모으기 위해 같은 음반 여러 장을 사는 것은 이곳 인도네시아 팬들에게도 기초적인 ‘덕질’에 속한다. 특히 한국 아이돌의 공연을 직접 보기 힘든 우리가 꿈에 그리는 덕질은 팬콜(fan call)이다. 아이돌 그룹의 멤버와 1대 1로 화상 채팅을 하는 것인데, 불과 1분 남짓이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황홀한 경험이다. 팬콜 응모권은 앨범 구매에 따라 주어진다. 2021년, 나는 팬콜에 당첨된 친구가 8장의 앨범을 샀다는 소식을 듣고 15장을 주문했다. 그러나 구매대행사는 “30장은 구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60장을 사고도 떨어진 친구가 있었고, 150장을 구매한 사람도 있었다. 앨범 한 장이 약 22만 루피아(한화 약 2만 원), 150장이면 3300만 루피아(한화 약 290만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인도네시아 사회초년생의 열 달 치 월급과 맞먹는다.

[사회혁신발언대] 로컬을 만나 진화하는 디자인씽킹

올해 여러 로컬 지역(제주, 안산, 전주, 경주, 청도, 밀양 등)에서 디자인씽킹 교육을 진행했습니다. 많은 지역에서 교육 요청이 이어지는 가운데, 한 지역활동가는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습니다. “왜 로컬에서 다시 디자인씽킹이 유행하는 걸까요?” 이에 대해 “첫째,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접근성, 둘째, 문제 해결 당사자의 참여, 셋째, 문제를 가시화하여 공감을 이끄는 비주얼씽킹의 장점 덕분이 아닐까요”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돌아오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디자인씽킹으로 지역 문제를 정말 해결할 수 있을까요?” 자유영을 배우면 한강을 건널 수 있을까요? 접영과 배영까지 익히면 도버해협도 건널 수 있을까요? 디자인씽킹은 만능 해결책이 아니지만, ‘가능성의 문을 연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디자인씽킹은 수영 초심자가 안전하게 물에 들어가도록 돕는 자유영과 같습니다. 특정 문제에 안전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 공감(Empathize), 문제정의(Define), 아이디어 창출(Idea), 프로토타이핑(Prototype), 테스트(Test) 등 다섯 단계의 ‘수영 코치’가 존재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수영을 잘하는 것과 도버해협을 건너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디자인씽킹 자체가 로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습니다. 그것은 ‘누가 디자인씽킹을 활용하는가’라는 주체의 중요성을 간과한 발상입니다. 디자인씽킹은 분명한 가능성과 한계를 지니며, 혁신이라는 바다에서 자유영으로 헤엄칠 자유를 제공할 뿐입니다. ◇ 맹목적으로 사용되던 ‘디자인씽킹’에 눈을 달다 지역과 소셜섹터에서 디자인씽킹을 교육할 때마다 조금씩 불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전 직장에서 디자인씽킹을 활용해 ‘고객에게 환영받는, 잘 팔리는 신제품’을 개발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디자인씽킹의 존재 가치를 매출 증대로만 한정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역과 소셜섹터에서는 단기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