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회혁신발언대] 소리로 잇는 마음, ‘소리상회’와 함께한 시간

작년 이맘때만 해도 필자에게 ‘AI를 잘 활용해야 한다’는 말은 막연한 배움의 열정으로만 남아 있었다. 관련 공부를 하고 여러 자료를 찾아보긴 했지만, 정작 그 열정을 실제 프로젝트로 옮겨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유일한 아카데미 2기 활동을 통해 수도권 독거노인을 대상으로 한 참여형 AI 팟캐스트 ‘소리상회’를 기획하고 발표하기까지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그 막연함은 구체적인 확신으로 바뀌었다. 처음 팀을 꾸리고 주제를 정할 때, 우리는 “누구의 목소리가 가장 듣기 어려운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은 이미 여러 갈래로 존재했다. 그런데 자료를 조사할수록 눈에 띈 것은, 노인복지 정책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매우 높은데도 실제로는 지속적으로 이용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75세 이상 노인의 생활편의 서비스 이용률은 16.4%로, 청년층(171.8%)의 약 10분의 1 수준에 그쳤다. 많은 정책과 서비스가 앱이나 비대면 방식으로 설계되면서, 정작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고령층에게는 문턱이 오히려 더 높아진 셈이었다. 정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노인 개개인의 삶의 방식에 맞춰지지 않아 이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여러 사회적 약자 중에서도 노인을, 그중에서도 수도권 독거노인을 선택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청년이나 장애인 등 다른 취약계층에게는 또래 커뮤니티나 온라인 네트워크가 그나마 존재하지만, 고령층은 배우자와 사별하고 자녀가 독립하고 친구들마저 하나둘 세상을 떠나면서 관계망 자체가 줄어드는 특성이 있었다. 게다가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려, 기존의 디지털 기반 해법이 잘 닿지 않는 사각지대이기도 했다. 반면 ‘말로 건네고 말로 듣는’ 방식은

[기후 유니버스] 죽은 자가 미래를 구할 수 있는가, 히말라야가 던진 질문

2026년 8월 26일, 히말라야 빙하 붕괴로 발생한 대홍수가 네팔을 뒤덮었다.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사고 당시 CCTV 영상이 퍼졌고, 이를 본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어나는 피해 규모는 이번 재난의 심각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현재까지 사망자는 약 1300명, 실종자는 5300명에 육박한다. 네팔 당국은 국민의 5%가 이번 대홍수로 피해를 입었으며, 재건을 위해서만 국내총생산(GDP)의 10%가 필요한 수준이라고 밝혔다. 사실상 국가 마비 상태를 선언한 셈이다. 이번 대홍수의 주요 원인은 바로 기후위기다. 온실가스 배출로 지구 평균 온도가 높아지고 있고, 히말라야 같은 고산지대는 온도 상승 속도가 더 빠르게 나타난다. 과학자들은 빙하가 녹아 형성된 빙하호가 계속 늘어나고 있어, 이러한 대홍수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위협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런데 네팔이 그동안 배출한 온실가스는 전 세계 배출량의 0.01%에 불과하다. 기후위기에 기여한 비중은 극히 적지만, 기후 피해에는 더 취약하고 앞으로 그 위험이 더욱 커질 국가다. 네팔 정부가 중국·미국·인도 등 온실가스 배출의 역사적 책임이 가장 큰 국가들에 기후 피해 배상을 요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 네팔 대홍수에서 드러난 기후 불평등은 사실 이전부터 다른 모습으로 존재해왔다. 이는 온실가스 규제를 엄격히 시행하는 국가의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규제가 느슨한 다른 국가로 생산 시설을 이전하는 이른바 ‘탄소 누출’로 설명된다. 일례로 포스코는 2021년 아시아 철강사 최초로 2050년 탄소중립을 선언하고 로드맵을 수립했다. 그러나 전기로 도입, 수소환원제철 기술 개발 등 탄소중립 추진 전략은 국내 사업장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20세기의 도구로 21세기의 문제를 풀고 있지는 않나

AVPN 글로벌 콘퍼런스 2026에서 마주한 ‘자선의 역설’ “비영리는 지금 자선의 역설 속에 있습니다. 20세기의 역량과 도구, 인프라로 21세기의 문제를 풀려고 하니까요.” 아시아 최대 사회적투자 네트워크 AVPN이 지난 8월 말 인도 뉴델리에서 연 글로벌 콘퍼런스에는 전 세계 2000여 명의 임팩트 리더가 모였다. 그 자리에서 구글닷오알지(Google.org) 아시아태평양 총괄 마리야 랄리치(Marija Ralic)가 한 말이다. 받아 적다가 손이 멈췄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국의 비영리 앞에도 같은 질문이 놓여 있다. 한국 비영리는 오랫동안 필요한 곳을 찾아 자원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일을 잘해 왔다. 결핍이 문제의 본질이던 시대에 그 방식은 유효했고, 실제로 수많은 아이들의 삶을 바꿔 왔다. 그런데 아이들이 마주한 문제의 성격이 달라졌다. 결식과 결핍의 자리에 돌봄 공백과 마음건강, 디지털 환경이 들어섰다. 이런 문제는 지원의 양만으로 풀기 어렵다. 아이 한 명에게 정확히 닿는 일에 더해, 그 아이가 놓인 구조까지 함께 바꾸는 새로운 근육이 필요해진 것이다. 기부자와 기업의 질문도 달라졌다. 이제는 얼마를 어디에 썼느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래서 아이의 삶에서 무엇이 달라졌느냐를 묻는다. 질문이 진화한 만큼 답하는 방식도 함께 진화해야 할 때가 왔다. ◇ 위험은 생각보다 과대평가돼 있었다 델리에서 만난 아시아의 재단들은 우리가 아직 써 보지 않은 방법을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 그 방법들을 관통하는 말이 ‘촉매 자본(catalytic capital)’이었다. 가치가 검증되기 전의 위험을 먼저 떠안아 뒤따르는 민간 자본의 물꼬를 트는 돈이다. 테마섹재단(Temasek Foundation)의 응분헝(Ng Boon Heong) 대표는 재단의

김정태 엠와이소셜컴퍼니 대표
인도는 지금 ‘자본의 고층건물’을 짓고 있다

지난 8월 마지막 주,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AVPN 글로벌 콘퍼런스에 다녀왔다. 아시아 최대 규모의 임팩트 금융·필란트로피 네트워크가 주최한 이번 행사에는 3일간 2300명이 참여했고, 100개가 넘는 세션이 열렸다. 주제는 ‘아시아를 위한 실행 설계도(A Blueprint for Action in Asia)’였다. MYSC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함께 마지막 날 ‘측정 가능한 임팩트를 위한 자본 구조화’ 세션을 진행했다. 콘퍼런스 기간 동안 인도 중앙정부와 주정부 관계자, 기업재단, 개발금융기관, 그리고 인도 1세대 임팩트 투자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분야는 저마다 달랐지만, 하나로 꿰어보니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인도는 지금 다양한 층위의 자본이 몰려드는 초고층 건물, 마천루를 짓고 있었다. ◇ 리스크는 어디에나 있지만 “High risk, high impact.” 세션의 오프닝에서 필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익숙하고 오래 써온 표현이지만, 사실은 절반의 진실에 가깝다. 리스크는 어디에나 있지만 임팩트는 어디에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위험을 감수한다고 해서 임팩트가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투자와 지원이 현장의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는 마지막 구간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나는 이것을 임팩트 생태계가 오랫동안 직면해 온 또 하나의 ‘라스트마일(last-mile)’ 문제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제안한 개념이 ‘자본의 고층건물(High Architecture)’이다. 하단의 High Risk와 상단의 High Impact를 연결하는, 혼합금융과 성과기반금융으로 구성된 건물에 대한 비유다. 위험과 가장 가까운 1층에는 정부와 공공기관의 촉매 자본이 들어온다. 양허적 조건으로 투입되어 다른 투자자가 감당하기 어려운 초기 위험을 흡수하거나 완화하는데, 이를 위험 완화(de-risking)라고 부른다. 1층이 만든 안전망 위, 2층에는 손실을 먼저 부담해 다른

[사회혁신 발언대] 성수동을 걸으며, 다시 뉴욕으로 향한다

매일 아침 성수동을 걸어 출근하다 보면 유난히 자주 모습이 바뀌는 한 모퉁이 공간을 지나게 된다. 마치 시계가 돌아가듯 그곳은 팝업스토어에서 또 다른 팝업스토어로 끊임없이 변신한다. 어느 아침에는 알록달록한 카페와 옷가게 사이로 새하얀 벽만 드러낸 채 텅 비어 있다. 그런데 저녁이 되면 전혀 다른 콘셉트의 공간으로 바뀌어 화장품이나 향수, 때로는 냉감 제품 같은 새로운 상품들로 가득 찬다. 다음 날에는 화보 촬영이 진행되고, 며칠 뒤에는 모퉁이를 휘감는 긴 줄이 생긴다. 그렇게 한두 주가 지나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된다. 필자는 미국 헨리 루스 재단(Henry Luce Foundation)이 운영하는 국제 펠로십인 ‘루스 스칼라(Luce Scholar) 프로그램’의 장학생으로 선발돼 2025년 9월 뉴욕에서 서울로 왔다. 이 프로그램은 미국의 청년 전문가를 아시아 각국의 기관에 약 1년간 배치하고 체류비와 언어교육 등을 지원한다. 필자는 임팩트 액셀러레이터이자 투자·컨설팅 기관인 엠와이소셜컴퍼니(MYSC)에 배치돼 1년간 근무하게 됐다. 서울에 오기 전에는 뉴욕시 정부에서 3년간 근무했다. 처음에는 택시와 차량호출 산업 종사자들을, 이후에는 여러 업종의 소상공인을 지원하며 기업가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하고 이에 대응하는 일을 했다. 한국행을 준비하면서는 한국이 ‘기업하기 좋은 환경’에 관한 국제 평가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해 온 이유가 궁금했다. 공공 부문에서 일할 때 비즈니스란 주로 소상공인을 의미했다. 그러나 MYSC에서 근무하며 스타트업과 사회적기업, 그리고 이들을 연결하고 지원하는 조직까지 아우르는 더 넓은 비즈니스 생태계를 이해하게 됐다. 성수동은 흔히 ‘소셜벤처 밸리’라고 불린다. 비즈니스를 통해 사회·환경적 변화를 만들려는

[하지원의 에코 NOW] 황금알은 보이고, 거위는 보이지 않는다

수돗물이 끊기면 물의 소중함을 안다. 기름값이 오르면 자동차를 덜 타야 하나 고민한다. 그런데 전기는 조금 다르다. 버튼을 누르면 불이 켜지고, 충전기를 꽂으면 휴대전화가 충전된다. 그 전기가 어디에서 와서, 얼마나 많은 자원이 투입되고 어떤 과정을 거쳐 내 방까지 왔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에너지 문제의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이것인지 모른다. 에너지는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되지만, 그 존재와 가치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이솝우화에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 이야기가 있다. 한 농부에게 매일 황금알 하나를 낳는 거위가 있었다. 그는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해 거위 배를 갈랐지만, 황금은 없었다. 결국 매일 얻을 수 있었던 황금알마저 잃은 것이다. 어릴 때는 이 이야기를 ‘욕심부리지 말라’는 교훈으로 읽었다. 환경 일을 오래 하다 보니 이제는 조금 다르게 읽힌다. 우리는 황금알의 가격은 알면서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가치는 잊고 사는 게 아닐까. 전기도 그렇다. 전기요금 고지서에는 내가 이번 달에 사용한 전력량과 요금이 나온다. 그러나 그 전기를 만들기 위해 어떤 자원이 필요했는지, 전기가 얼마나 먼 거리를 이동해 왔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환경비용이 발생했는지는 적혀 있지 않다. 더구나 이제 에너지는 전등과 에어컨 뒤에만 숨어 있지 않다. 아침에 마시는 커피 한 잔에도 에너지가 들어 있다. 원두를 재배하고 가공하고 운반하고, 물을 끓이기까지 에너지가 필요하다. 수돗물 한 컵에도 취수와 정수, 펌프와 하수처리의 에너지가 숨어 있다. 옷 한 벌, 택배 상자 하나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손가락 끝에도 에너지가

[박훈의 나눔과 세금] 살던 집을 기부하는 법

올여름 가장 뜨거운 세금 이야기는 단연 집이다. 8월 초 발표된 세제개편안은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소득세의 틀을 ‘주택 수’에서 ‘가격과 실거주’ 중심으로 바꾸겠다고 한다. 집은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라는 것이다. 방향이 옳으냐를 따지기 전에, 요즘 집은 갖고 있어도 고민이고, 팔아도 고민이고, 물려줘도 고민이다. 그런데 집을 두고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더 있다. 사회에 내어주는 일, 기부다. ◇ 집 한 채뿐인 재산, 기부는 왜 어려운가 우리 국민의 가계 자산에서 부동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7할이 넘고, 그 한가운데에 집이 있다. 유산기부 상담 현장에서도 “현금은 없어도 집 한 채는 있다”는 분들을 자주 만난다. 평생 모은 재산이 지금 살고 있는 집 한 채면, 나눔 역시 그 집으로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정작 기부 통계에서 집은 손에 꼽을 만큼 드물다.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제도 곳곳의 문턱에 그 마음이 걸려 넘어지기 때문이다. 문턱은 먼저 기부하는 쪽에 있다. 다행히 개인이 집을 기부하면 기부금액은 처음 산 값이 아니라 기부할 때의 시세로 인정받는 것이 원칙이다. 문제는 혜택을 담는 그릇이 작다는 데 있다. 기부금 세액공제는 그해 소득의 일정 비율까지만 허용되고, 넘치는 금액은 10년까지만 이월된다. 평생 모은 재산이 집 한 채인 은퇴한 어르신을 생각해 보자. 시세 10억 원의 집을 기부해도 연금 소득이 많지 않으니 실제 공제받는 금액은 선의의 크기에 한참 못 미치고, 10년을 기다려도 다 쓰지 못한 혜택은 그대로 사라진다. 큰 기부일수록 대접이

[윤은기의 직설] ‘CEO의 날’ 경제 발전을 이끄는 영웅들을 응원합니다

근로자의 날, 어버이의 날, 학생의 날, 부부의 날… 우리 달력에는 뜻깊은 노고를 기리는 수많은 기념일이 존재한다. 기념일이란 사회적으로 기억해야 할 가치를 재조명하고 감사와 격려를 보내는 범국민적 약속이다. 그런데 계속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대한민국 경제의 최전선에서 뛰고 있는 ‘CEO의 날’은 왜 없을까? CEO는 치열한 전쟁터에서 기업이라는 부대를 이끄는 장수다. 국가의 부(富)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글로벌 시장에서 밤낮없이 기술 혁신을 이루고 시장을 개척하며 고용을 창출하고 세금을 납부하는 주역이 바로 기업인이다. 이들이 이끄는 기업이 튼튼해야 나라 경제가 살고, 국민의 삶터가 유지되며, 국가의 미래도 담보된다. 이 전쟁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시시각각 변하는 경기, 기술 격변, 피 말리는 경쟁 속에 수많은 기업인이 전사하고 치명상을 입는다. 겉으로 보는 기업인의 모습은 화려하다. 고급 차를 타고 맵시 좋은 옷을 입는다. 하지만 그 고급 차는 사투의 현장으로 달리는 ‘전투용 장갑차’이며, 맵시 좋은 옷은 화살을 막아내는 ‘전투용 갑옷’이다. “CEO는 낮에 웃고 밤에 우는 직업인이다.” 이 한 문장은 모든 기업인의 고독과 중압감을 상징한다. CEO는 힘들고 지쳐도 낮에는 웃어야 한다. 고객, 투자자, 경쟁자를 만날 때도 당당한 미소를 지어야 한다. CEO가 불안한 기색을 보이면 직원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시장에는 이상한 소문이 도는 탓이다. 모든 리스크와 공포를 홀로 짊어진 채 낮에는 온 힘을 다해 웃고, 밤에야 홀로 노심초사하며 때로는 눈물을 훔치는 존재가 바로 CEO다. 오늘날 대한민국 기업인들의 현실은 어떤가.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주역이라는 자부심은 온데간데없이

[사회혁신 발언대] 기술의 시대, 기업은 왜 다시 ‘관계’를 말하는가

기술이 인간의 연결을 대체하는 시대, 역설적이게도 미국 사회의 화두는 다시, 그리고 여전히 커뮤니티다. 미국의 석학 로버트 퍼트넘(Robert David Putnam)은 저서 ‘볼링 얼론(Bowling Alone)’을 통해 현대인이 파편화될수록 사회적 신뢰라는 자산이 붕괴된다고 경고했다. 50개 주가 저마다 독립적인 제도와 상이한 정서·환경을 지닌 미국에서 자연재해나 사회적 갈등,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가장 빠르게 작동하는 생존 인프라는 종종 국가의 공공 안전망이 아니라 현장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온 민간의 커뮤니티다. 미국인들은 생존과 성장을 위해 수많은 사교 모임과 자원봉사 단체라는 풀뿌리 커뮤니티를 스스로 만들어왔고, 이런 자발적인 연대와 느슨하지만 단단한 네트워크를 통해 행정의 안전망이 미처 닿지 못하는 곳을 메워왔다. 이처럼 커뮤니티를 통해 삶의 기회와 안전을 확보하는 정서는 비즈니스 생태계, 특히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기업들의 관계론과도 맞닿아 있다. 사회 불평등이 심화되고 정치·경제적 불확실성이 전 세계적으로 높아지는 시대에 기업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지난 4월 찾은 미국 중서부 도시 밀워키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밀워키는 미국 위스콘신주의 중심 도시로, 인구 약 53만 명의 미국 31번째 규모 도시다. 방문 목적은 ‘챔피언스 리트릿 2026(Champions Retreat 2026)’ 참석이었다. 챔피언스 리트릿은 글로벌 비영리 네트워크 비랩(B Lab)의 글로벌 파트너 중 하나인 비랩 미국&캐나다(B Lab U.S. & Canada)가 2년마다 개최하는 행사로, 북미 지역 비콥(B Corp) 커뮤니티가 한데 모이는 컨퍼런스이자 네트워킹 이벤트다. 2006년 설립된 비랩이 사회적·환경적 책임을 일정 기준 이상 충족하는 영리 기업에 인증하는 비콥

[사회혁신 발언대] 인도는 왜 그린수소를 미래 산업으로 택했나

탄소중립 시대의 산업 경쟁은 이제 재생에너지 보급을 넘어 그린수소로 확장되고 있다. 인도는 그린수소를 철강·정유·비료 등 탄소 감축이 어려운 산업의 전환 수단이자 새로운 수출 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국내 생산 기반을 키우는 동시에 유럽과 일본 등 주요 시장과 표준·공급망 협력에도 속도를 내는 모습이다. 그린수소를 에너지정책과 산업정책을 잇는 전략 자산으로 바라보는 인도의 선택은 한국에도 적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인도는 청정에너지 전환에서 세계적으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다. 2025년 12월 말 기준 인도의 전체 발전설비 용량 가운데 비화석연료 에너지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51.93%에 달했다. 인도가 두 번째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통해 제시했던 ‘비화석연료 발전설비 비중 50%’ 목표를 이미 넘어선 것이다. 국제재생에너지기구(IRENA)의 ‘재생에너지 통계 2025’에 따르면 인도는 재생에너지 누적 설비용량에서도 세계 4위에 올라 있다. 다만 인도의 에너지 전환은 국가의 개발 수요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도는 아직 에너지 수요가 정점에 도달하지 않은 국가다. 경제성장을 이어가는 동시에 충분한 에너지를 안정적이고 합리적인 가격에 공급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한 과제다. 이에 인도는 재생에너지 확대뿐 아니라 에너지 효율 향상, 원자력, 그린수소, 탄소흡수원과 탄소시장 등을 아우르는 방식으로 에너지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산업 경쟁력 강화와 일자리 창출 역시 이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목표다. 이 같은 전환 전략에서 그린수소는 중요한 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전기만으로 탄소 감축이 쉽지 않은 산업 분야에서 대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린수소는 연료인 동시에 산업의 원료로 활용할 수 있다.

[공익단체의 사업모델 혁신] 공익 생태계의 빈틈을 메우려면

요즈음 거의 모든 분야에서 문제 해결의 방법론으로 ‘생태계적 접근’이 주목받고 있다. 공익사업 분야의 문제 역시 개별 단체나 사업만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를 대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현재 국내 공익사업 생태계는 어떻게 개선하고 혁신해야 할 것인가. 가장 쉬운 출발점은 영리사업 분야의 생태계와 비교해 보는 것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기업들을 대리하는 비즈니스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최근 공익사업에 종사하면서, 공익 분야의 생태계가 여러 측면에서 영리 분야에 비해 상당히 낙후돼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몇 가지 문제를 짚어보고, 이를 바탕으로 생태계적 개선 방안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첫째, 각 공익단체와 그 사업 전반을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이 부족하다. 예컨대 공익단체를 업종별·지역별로 분류하고, 각 단체의 사업 내용과 조직, 재무 상태 등 기본 자료를 수록한 종합 편람이나 연감 형태의 데이터베이스(data base)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현재 공익사업을 수행하는 비영리법인의 감독 권한이 여러 부처에 나뉘어 있어 모든 비영리법인에 관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취합하는 정부기관이 없고, 모든 공익단체가 가입한 협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구조 때문에 종합적인 정보 축적이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과 같은 정보화 시대에는 데이터가 모든 일의 출발점이다. 누가 주체가 되든, 어떤 방식으로 추진하든 공익단체에 관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모은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서둘러야 한다. 둘째, 이러한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공익단체 간 네트워킹(networking)을 보다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기업들은 업종별·지역별 협회 등 다양한 조직을 통해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하거나 공동의 이익을 추구한다. 이에 비하면

[임팩트비즈니스 인사이트] 정책은 후퇴해도, 저탄소 산업은 전진한다

2025년 여름 프랑스는 1900년 이후 세 번째로 더운 여름을 보냈다. 프랑스 공중보건국은 이 기간 폭염 관련 사망자가 5700명을 넘어섰다고 집계했다. 전체 사망자의 3%를 웃도는 규모다. 피해는 에어컨이 없는 노후 주택에서 홀로 지내는 노인과 사회안전망 밖의 취약계층에 집중됐다. 폭염은 모두가 겪지만, 피해의 크기는 사회적 취약성에 따라 달라진다. 기후위기가 심화하는 동안 정책 환경은 오히려 후퇴했다. 미국은 2026년 1월 파리협약에서 공식 탈퇴했고, 2월에는 연방 기후 규제의 법적 토대였던 ‘위해성 판단(Endangerment Finding)’까지 폐기했다. 이 같은 흐름만 보면 세계의 기후 대응이 역행하고 있다는 진단이 가능하다. 하지만 정책의 후퇴가 곧 산업 전환의 중단을 의미하는지는 따로 볼 필요가 있다. 자본과 기술, 지방정부와 기업은 중앙 정치와는 다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미국·중국·유럽·한국의 최근 변화를 비교하면, 저탄소 전환을 떠받치는 동력이 어디에서 형성되고 있는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 미국: 정책 후퇴와 시장의 관성 트럼프 행정부는 화석연료 생산 확대를 선언하고, 2025년 7월 통과된 ‘원 빅 뷰티풀 빌 법(OBBBA)’을 통해 청정에너지 지원을 대폭 축소했다. 기업연대 단체 E2에 따르면 2025년 1월부터 2026년 5월까지 철회된 청정에너지 투자는 682억 달러(약 96조 원)에 이른다. 테네시에 건설 예정이던 SK온의 28억 달러(약 3조 원) 규모 배터리 투자와 오하이오 포드 전기차 공장 계획도 취소됐다. 그럼에도 미국의 저탄소 산업이 정책 변화와 같은 폭으로 위축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2026년 7월 MIT 에너지환경정책연구센터는 연방 보조금이 크게 줄어드는 시나리오에서도 IRA가 목표했던 청정 설비의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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