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1일(목)

[기후 유니버스] 잔디가 불러온 기후위기 청구서

김민 빅웨이브 대표

“오만의 잔디 상태가 홈보다 훌륭하네요. 팀 내 기술이 좋은 선수가 많은데 잔디 때문에 좋은 경기력을 보이지 못해 아쉽습니다.”

지난달 10일, 2026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3차예선 B조 2차전 경기 후 인터뷰에서 손흥민 선수가 했던 말이다. 이 한 마디로 우리나라 축구경기장의 심각한 잔디 상태가 국정감사 도마 위까지 올랐다. 어떤 문제가 있길래 손흥민 선수가 나서서 언급할 정도가 되었을까?

축구경기에서 잔디는 경기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해외에서 선수 생활을 보낸 유명 축구선수들이 입을 모아 유럽 축구를 부러워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잔디’다. 상대적으로 춥고 건조한 고위도 지역에서 자라는 한지형 잔디는 잎이 얇고 부드러워, 축구 경기에 매우 적합하다. 반대로 우리나라의 토착종인 난지형 잔디는 잎이 굵고 억센 편이라, 공이 잘 굴러가지 않거나 부상 유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잔디가 훼손된 원인은 여러가지다. 첫째, 잔디 보호를 간과하고 경기장에서 공연과 행사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여름철 유행으로 떠오른 워터밤과 같이 많은 양의 물을 뿌리는 공연을 하고 나면 잔디가 물에 잠긴다. 이 상태에서 뜨거운 햇빛을 받으면 잔디가 익으며 상한다. 잔디 위에 무거운 구조물을 세우거나 관객이 장시간 밟으면 피해는 더욱 심각해진다.

둘째, 지자체와 구단의 예산 부족이다. 해외 유명구단의 경우 잔디 관리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다.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구단들은 부족한 일조량을 극복하기 위해 대당 1억 5000만원이 넘는 채광기를 활용할 정도다. 애초에 설계부터 잔디 관리를 고려해 개폐식으로 경기장을 짓는 곳도 늘어나고 있다. 이에 비해 이번에 문제가 됐던 상암월드컵경기장의 잔디 관리 예산은 연간 2억 5000만원 규모인데 이마저도 국내 구단 중에서는 상위권이라고 한다.

앞서 언급한 2가지 원인이 관리와 시스템의 영역이라면, 마지막 원인은 불가항력적인 원인, 바로 기후위기다. 집중호우와 폭염 등 이상기후가 심각해지면 잔디가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이 된다. 잔디의 생장이나 회복 속도가 늦어지고, 병해충으로 인한 피해도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단 잔디의 문제를 넘어 기후위기는 경기장의 더욱 큰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

Rapid Transition Alliance라는 국제 기후위기 연구 네트워크에 따르면, 향후 30년 동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와 풋볼리그에 소속된 92개 구단 중 약 4분의 1이 구장 침수 위험을 겪게 된다고 경고했다. 실제 국내 프로야구의 경우, 올해 우천 취소가 역대 최다인 72차례를 기록하며 리그 일정에 차질을 빚었다. 폭염으로 인해 4차례 경기가 취소될 뿐만 아니라, 관중들이 온열 질환을 호소하며 쓰러지는 일까지 발생했다.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면 선수들의 경기력이 저하되고 관람 환경이 불편해진다. 경기장에 사람들이 덜 찾아온다면, 구단의 티켓 수입은 떨어질 것이고 더 나아가 스폰서와의 계약도 어려워진다. 다시 말해, 팬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스포츠 산업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 잔디는 스포츠가 당면한 기후위기의 여러가지 모습 중 하나에 불과하다.

스포츠가 기후위기로 인해 피해를 받기도 하지만, 반대로 기후위기를 가속화하는 부분도 존재한다. 스폰서가 필요한 구단에 화석연료 기업이 후원하며 그린워싱을 유발하기도 하고, 경기장에서 소비되는 음식과 응원도구, 굿즈 등으로 인해 막대한 양의 쓰레기가 배출되기도 한다.

경기가 침체될수록 스포츠는 흥행한다는 법칙이 있다. 프로야구는 올해 1000만 관중을 돌파했고 모두 성공 비결로 젊은 세대의 유입을 꼽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 중계화면을 보면 20~30대, 특히 여성 팬들이 많이 보인다. 가까운 지인들의 인스타그램만 봐도 경기장 직관 인증샷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취업, 결혼, 육아라는 3가지 고난도 퀘스트를 깨야 하는 젊은 세대에게 스포츠는 이 시대의 불황이 선물한 작은 도파민임이 틀림없다.

이러한 상황은 청년들이 스포츠와 기후위기의 관계성을 제대로 인식하기에 좋은 환경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일상 속 여가생활로서 주변 사람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취미활동으로서, 스포츠는 우리 삶의 일부다.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것은 수고로운 일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좀 더 윤택하게 하는 일이라는 메시지를 가장 설득력 있게 전할 수 있는 분야가 스포츠라 생각한다. 무분별한 소비 문화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스포츠를 더 오래 더 재밌게 보기 위해 기후행동에 함께하자고 말을 걸어야 한다.

‘기후위기를 막기에 이미 늦었다’, ‘우리가 열심히 해봤자 중국과 미국 때문에 안 된다’는 비관론이 아직도 사회에 만연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행동을 멈춘다면 지구 평균 온도가 1.5도가 아니라 2도 3도 올라간 세상을 맞이한다. 그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기후위기로 인해 정치∙경제∙사회 등 전 분야에 걸쳐 오차범위와 예측 가능 영역을 넘어선 혼란을 겪어야 한다.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들이 모두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다.

어쩌면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스포츠 정신 아닐까. 결과와 관계없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상대 선수가 매너 없이 굴어도 실력과 페어플레이로 증명하는, 그 스포츠 정신 말이다. 스포츠 정신을 가진 선수들을 보며 우리는 스포츠에 열광하고 그들의 스토리에 감동한다. 그리고 무엇이든 노력하면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확인하며, 삶의 동기를 다시금 채운다. 끝으로 리버풀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만든 위르겐 클롭 감독이 안필드의 기적 당시 하프타임 팀 토크에서 선수들에게 했던 말을 전하며, 스포츠 정신으로 기후행동에 함께하는 청년들이 많아지길 희망한다.

“우린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해 보자. 그러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자!”

김민 빅웨이브 대표

필자 소개

‘당사자에서 배제되고 파편화된 청년들이 기후위기의 대응의 주체가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활동하는 사단법인 빅웨이브의 대표입니다. 외계의 위협으로부터 지구를 지키기 위해 ‘어벤져스’를 모으는 것과 같이, 더 많은 역량 있는 청년들이 성장하여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온전히 목소리 낼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NGO, 국회, 정부 위원회 등 다양한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모든 사회문제를 기후위기 관점에서 바라보고 기후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기후 유니버스)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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