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28일(수)
[아무튼 로컬] 로컬에 번지는 ‘크래프트’ 정신
[아무튼 로컬] 로컬에 번지는 ‘크래프트’ 정신
Share on facebook
Share on twitter
Share on print
한종호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장

로컬의 시대에 가장 도드라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크래프트(craft) 문화, 즉 필요한 것을 자신이 직접 손으로 만들거나 그렇게 만들어진 것을 소비하는 태도와 행동이다.

코로나 때문에 배달 음식이 대세를 이루는 것 같지만 다른 한편에선 공유 주방에 모여 함께 요리를 해 먹거나 집에서 유명 셰프를 흉내 내 음식을 만들고 인스타에 올리는 걸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직접 로스팅 한 원두를 갈아 핸드드립을 해주지 않는 카페는 명함을 내밀기도 어려워졌다. 커피 도시 브랜드에 힘입어 힙한 로컬도시로 떠오르는 강릉은 인구 21만명의 소도시임에도 카페만 1000여개에 육박한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50개 남짓이던 국산 수제맥주 양조장은 2014년 주세법 개정 이후 두 배 이상 늘어났고 강남페일에일’ ‘부산밀맥’ ‘버드나무브루어리같은 로컬의 대표 브랜드도 생겨나고 있다. 서핑의 성지 양양에서는 스티로폼 대신 나무를 깎고 조립해 서프보드를 만드는 공방이 생겨났다. 원단을 끊어 재봉틀로 만든 수제 마스크가 인스타그램을 통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군산에서는 낡은 건물을 함께 고쳐서 공유 공간으로 만드는 DIT(Do It Together) 프로그램에 전국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이런 흐름의 저변에는 대량 생산대량 소비 체제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있다. 믿을 수 있고 취향에 맞는 것을 직접 만들어 소비하는 라이프스타일의 실천이다. 브랜드 전문 잡지 매거진B’는 로컬의 성지라 불리는 미국 포틀랜드를크래프트 비어와 커피, 오가닉 푸드와 아웃도어 제품으로 요약되는 크래프트맨십 문화를 글로벌 비즈니스로 키워낸 곳으로 소개했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환경을 찾아 미국 전역에서 몰려든 창작자와 메이커들이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제품을 만들어내고, 제품의 제작 과정과 품질을 중시하는 포틀랜드 시민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소비해 주면서 글로벌 브랜드로 키워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창작자제작자를 위한 기회의 땅이 이제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펼쳐지고 있다.

로컬 크래프트 문화의 성장과 로컬 제조업의 부활을 가능케 하는 것은 소비 트렌드의 변화와 기술의 혁신이다. 예전 같으면 제조업을 하려면 빚을 내서라도 일단 공장과 설비를 장만해야만 했지만 이제는 대학생도 아이디어만 좋으면 크라우드펀딩으로 돈을 모아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 생산자는 SNS를 통해 자신의 제품을 소개하고, 그 제품을 사용해 본 소비자는 그 경험을 다시 SNS로 공유하여 또 다른 소비자들과의 연결을 가능케 한다. 이 모든 과정이 순식간에 이뤄진다.

로컬의 메이커들에겐손님은 왕이라는 법칙이 통하지 않는다.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고 이에 공감하는 소비자를 기다린다. 고객이 원하는 것만 만들다 보면 차별성이 사라져 정체성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크래프트 문화의 경제 효과에 관심을 갖는 지자체도 늘어나고 있다. 서울시는 성수동 수제화 장인들이 4개월간 신발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서울수제화아카데미를 운영했다. 이 과정을 이수한 패션 디자이너 LAR 계효석 대표는 재활용 소가죽으로 친환경 신발을 만드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동대문 패션타운의 배후 기지라고 할 수 있는 창신동에선 40~50대 봉제 장인들과 20~30대 패션 디자이너들이 한 공간에 모여서 협업할 수 있는 공유 오피스창신아지트가 만들어졌다. 서울의 5대 도시 제조업 거점으로 손꼽히는 창신동 봉제 거리, 성수동 수제화 거리, 문래동 철공소 거리, 충무로 인쇄 거리, 종로 귀금속 거리는 쇠락의 길을 걷다가 크래프트 정신을 추구하는 청년 창업가들이 몰려들면서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고 융합하는 힙한 상권으로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

산업혁명이 발흥하던 19세기 말 영국에서는 기계에 의해 대량 생산된 조악한 물건들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수공업 제조로 생활 속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아트 앤드 크래프트 운동이 전개됐었다. 그로부터 150년이 지난 지금 로컬의 현장에서 일고 있는 크래프트 문화는 생활 속 아름다움에 더해 환경을 보호하고 생명권을 존중하며 붕괴한 지역 공동체를 회복한다는 의미까지 함께 담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진일보한 흐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종호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장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