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18일(토)

[아무튼 로컬] 로컬의 시간: 슬로라이프와 생명의 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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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장

요즘 요가에 관심이 좀 생겨 이런저런 책과 동영상을 찾아보고 있는데 백서현 작가가 80일간 인도 요가원에 다녀와서 쓴 ‘요가 좀 합니다’를 보니 이런 대목이 있다. “인도에서는 평생 쉬는 호흡의 수가 수명과 연관이 있다고 믿기도 한다. 느리게 쉬면 더 오래 살 수 있다.” 처음엔 인도 특유의 신비주의적 생명관이겠거니 했는데 일본의 유명 동물학자 모토카와 다쓰오 전 도쿄공업대학 교수가 쓴 ‘코끼리의 시간, 쥐의 시간’을 읽으면서 뜻밖에도 이게 과학적 근거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모토카와 교수는 동물들이 몸의 크기에 따라 서로 다른 신체시간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즉 포유류의 심장 박동 주기는 체중의 4분의 1 제곱에 비례하는데, 이를테면 코끼리는 3초에 한 번, 생쥐는 0.1초에 한 번 심장이 뛴다. 몸집이 클수록 심장이 느리게 뛴다고 하니 호흡도 느릴 것이고, 슬로비디오처럼 느린 템포로 100년을 사는 코끼리와 훨씬 빠른 생리적 템포로 허겁지겁 몇 년을 살다 죽는 생쥐의 삶을 비교해 보면 ‘느린 호흡=장수’라는 공식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모토카와 교수의 이론에는 극적인 반전이 있다. 포유류의 평생 심장박동 수는 20억회로 몸의 크기와 상관없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5분짜리 동영상을 빨리 돌려 1분 만에 보더라도 그게 같은 동영상인 것처럼 코끼리와 생쥐의 물리적 수명은 다르지만 시간의 밀도를 생각해 보면 결국 같은 길이만큼을 살다 가는 셈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빠르게 혹은 느리게 흐르는 생명의 시간 속에서 동물들은 각자 독자적 세계를 구축해 살아간다는 멋진 가설을 세웠다.

이 가설은 인간의 세계에선 곧바로 무너지고 만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40억년 동안 지구상 모든 생명체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진화해 왔는데 근대의 인간은 과학기술을 앞세워 생명의 속도를 파괴하고 있다고 했다. 모든 생명체가 자신의 시간을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데 유독 인간들은 자신들의 경제시간에 다른 생명체의 생태시간을 억지로 꿰맞추려 한다는 것이다. 더 많은 곡물을 얻기 위해 유전자를 조작하고, 고기와 계란을 더 빨리 얻기 위해 밀식 사육장의 불을 밤새 환히 밝히며 동물들을 학대하는 식이다.

이런 산업사회의 반생명 속도에 맞서 느린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저널리스트 카를로 페트리니는 1986년 미국식 패스트푸드의 상징인 맥도날드가 로마 중심가에 가게를 내려 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슬로 푸드’ 캠페인을 벌였다. 이렇게 시작된 슬로 운동은 지역의 식재료 사용을 장려하는 ‘로컬 푸드’ 운동으로 발전했다가, 슬로 푸드 정신으로 느린 삶을 추구하는 ‘슬로 시티’ 운동으로 격상돼 이제는 전 세계적인 지역 재생 모델로 각광 받고 있다. 일본 시즈오카현 가케가와시는 지자체 차원에서 ‘슬로타운 선언’을 하고 8가지의 목표를 설정해 자동차를 타지 않는 슬로 페이스, 전통 목조주택을 추구하는 슬로 하우스, 평생 자립을 목표로 아름답게 늙어가는 슬로 에이징 등의 사업을 벌이고 있다. 영화 ‘인생후르츠’와 같은 삶을 마을 단위로 실천해 가려는 노력이다.

지금 우리 로컬의 현장에도 이런 느린 시간의 원리를 찾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로컬의 자원을 소진해버리는 게 아니라 이를 지키고 키워가면서 자신의 삶도 함께 재생산하는 슬로라 이프의 실천가들이다. 이들의 슬로 라이프를 소개하는 매거진 ‘달팽이’는 이번 달로 벌써 스물아홉 번째 호를 발간했는데 이번 호에선 ‘21일간의 에코라이프 챌린지’ 등을 특집으로 다뤘다. 지자체들도 느린 삶 찾기에 열성이다. 현재 전남 완도군 청산면 등 15곳 이상이 국제연맹으로부터 ‘슬로 시티’ 공인을 받았는데 경남 김해시는 지난 4월부터 석 달간 지역의 역사와 유물 알리기, 슬로 푸드 밥상 차리기 등의 실천을 장려하는 ‘1일 1슬로라이프 실천’ 이벤트를 진행했다. 충남 서천군은 지자체 차원에서 ‘슬로 라이프 디자이너’를 양성하고 있다.

‘슬로 라이프’의 저자 쓰지 신이치는 “느리다는 것은 느긋하게 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경제시간이 지구 생태계의 시간들을 앞지르는 바람에 초래된 모든 문제들을 바로잡는 설루션”이라고 말했다.

한종호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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