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아무튼 로컬] 로컬의 세계관

한종호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장

개그맨 이창호씨가 지난 2월 유튜브 개그 채널에서 자신이 시가총액 500조원의 김 만드는 대기업 ‘김갑생할머니김’의 미래전략본부장 이호창이라며 너스레를 떨 때만 해도 사람들은 그러려니 웃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호창 본부장’의 활약상을 담은 후속 영상들이 이어지고 정부의 요청으로 그가 출연한 P4G 서울정상회의 홍보영상이 100만 회 넘게 재생되면서 ‘김갑생할머니김’은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믿어지는, 아니 모두가 그렇게 믿기로 해주는 진짜 기업이 되어갔다. ‘김갑생할머니김’을 실제로 생산해 판매하는 곳까지 나타났다.

지상파 개그 코너가 점차 사라지면서 설 곳이 줄어든 방송사 개그맨 몇몇이 만든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130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과시하는 피식대학의 상황극들은 종래의 개그 코너처럼 1회적 웃음으로 끝나지 않고 서로 스토리가 연결되어 하나의 큰 그림을 완성해 간다. 요즘은 이걸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롤플레이 모놀로그로 자신만의 세계관을 만들어 가고 있는 개그우먼 강유미씨의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는 사람은 80만명이 넘는다.

구독자들은 이들이 만들어 가는 세계관에 몰입하고 참여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유대감을 형성하면서 현실과 허구의 구분 자체가 애매한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마블 스튜디오가 만드는 수퍼히어로 영화 시리즈가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으로 연결돼 있는 것과 비슷하다. 유튜브는 최근 발표한 트렌드 리포트에서 콘텐츠를 수동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적극적인 연결과 소통에 활용하는 이런 현상을 한국 콘텐츠 소비자들의 새로운 특징으로 꼽았다.

전 세계 청소년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게임 플랫폼 ‘로블록스’도 비슷한 흐름을 보여준다. 기존의 게임들은 제작사가 만든 세계관을 사용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놀게 하는 일방적 관계였다면 로블록스는 사용자가 자신의 세계관에 따라 새로운 게임을 만들 수 있고 그에 공감하는 다른 사용자들을 끌어들이는 구조를 갖고 있다. 제작자와 사용자는 게임 속에서 소통하며 로블록스 세상을 무한대로 확장해 간다. 덕분에 지난 3월 뉴욕증시에 상장한 로블록스는 폭풍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지금 로컬의 창업 현장은 현실 속의 로블록스처럼 자기만의 세계관을 키워 가는 창의적 크리에이터들의 움직임으로 꿈틀거리고 있다. 코로나19의 위세에 대부분의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지만 특색 있는 경험과 관점을 나눌 수 있는 로컬의 창업자들은 꾸준히 자신의 세계관을 공유할 동지들을 늘려가며 성장해 간다.

‘서피비치’ 박준규 대표는 6년 전 동해안이라 하면 횟집과 여름 한철 해수욕장만을 떠올리던 시절 해외 휴양지에서나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서핑 전용 해변을 만들겠다며 강원도 양양군 하조대 해변에 자리를 잡았다. 간첩 침투를 막는 철조망이 쳐져 있어 민간인들이 접근하기도 힘든 텅 빈 백사장에 가건물을 세우고 해먹 몇 개 걸어놓고 손님을 받기 시작했다. 낯설고 황당해 보였던 박 대표의 서피비치 세계관을 지지하는 사람은 첫해에 2만명 정도였지만 이듬해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해 지난해에는 80만명이 다녀가는, 동해안 최고의 명소가 됐다. 박 대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요가원, 호스피털리티 시설을 추가해 가며 100년 가는 기업을 만들겠다는 꿈을 키워가고 있다.

고도성장 시대엔 하나의 문법, 하나의 세계관이 전 사회에 통용됐고 그에 충직하게 따르기만 하면 한 세상 살아가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성장의 수레바퀴가 서서히 멈춰가면서 사람들은 이제 집단의 수레에서 내려 스스로 앞길을 더듬어 찾아가야 하게 됐다.

각자의 취향, 이익, 관심을 좇아 이합집산하는 가운데 로컬의 수퍼히어로들이 만들어 가는 전대미문의 새로운 세계관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그들만의 메타버스를 형성해 간다. 권위를 앞세운 단일한 세계관의 광장을 떠나 자신만의 로컬 세계관을 만들어 내는 창업가들에게서 우리는 미래의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 같다.

한종호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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