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로컬] 로컬의 시간: 슬로라이프와 생명의 속도

요즘 요가에 관심이 좀 생겨 이런저런 책과 동영상을 찾아보고 있는데 백서현 작가가 80일간 인도 요가원에 다녀와서 쓴 ‘요가 좀 합니다’를 보니 이런 대목이 있다. “인도에서는 평생 쉬는 호흡의 수가 수명과 연관이 있다고 믿기도 한다. 느리게 쉬면 더 오래 살 수 있다.” 처음엔 인도 특유의 신비주의적 생명관이겠거니 했는데 일본의 유명 동물학자 모토카와 다쓰오 전 도쿄공업대학 교수가 쓴 ‘코끼리의 시간, 쥐의 시간’을 읽으면서 뜻밖에도 이게 과학적 근거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모토카와 교수는 동물들이 몸의 크기에 따라 서로 다른 신체시간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즉 포유류의 심장 박동 주기는 체중의 4분의 1 제곱에 비례하는데, 이를테면 코끼리는 3초에 한 번, 생쥐는 0.1초에 한 번 심장이 뛴다. 몸집이 클수록 심장이 느리게 뛴다고 하니 호흡도 느릴 것이고, 슬로비디오처럼 느린 템포로 100년을 사는 코끼리와 훨씬 빠른 생리적 템포로 허겁지겁 몇 년을 살다 죽는 생쥐의 삶을 비교해 보면 ‘느린 호흡=장수’라는 공식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모토카와 교수의 이론에는 극적인 반전이 있다. 포유류의 평생 심장박동 수는 20억회로 몸의 크기와 상관없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5분짜리 동영상을 빨리 돌려 1분 만에 보더라도 그게 같은 동영상인 것처럼 코끼리와 생쥐의 물리적 수명은 다르지만 시간의 밀도를 생각해 보면 결국 같은 길이만큼을 살다 가는 셈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빠르게 혹은 느리게 흐르는 생명의 시간 속에서 동물들은 각자 독자적 세계를 구축해 살아간다는 멋진 가설을 세웠다. 이

[아무튼 로컬] 로컬의 세계관

개그맨 이창호씨가 지난 2월 유튜브 개그 채널에서 자신이 시가총액 500조원의 김 만드는 대기업 ‘김갑생할머니김’의 미래전략본부장 이호창이라며 너스레를 떨 때만 해도 사람들은 그러려니 웃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호창 본부장’의 활약상을 담은 후속 영상들이 이어지고 정부의 요청으로 그가 출연한 P4G 서울정상회의 홍보영상이 100만 회 넘게 재생되면서 ‘김갑생할머니김’은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믿어지는, 아니 모두가 그렇게 믿기로 해주는 진짜 기업이 되어갔다. ‘김갑생할머니김’을 실제로 생산해 판매하는 곳까지 나타났다. 지상파 개그 코너가 점차 사라지면서 설 곳이 줄어든 방송사 개그맨 몇몇이 만든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130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과시하는 피식대학의 상황극들은 종래의 개그 코너처럼 1회적 웃음으로 끝나지 않고 서로 스토리가 연결되어 하나의 큰 그림을 완성해 간다. 요즘은 이걸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롤플레이 모놀로그로 자신만의 세계관을 만들어 가고 있는 개그우먼 강유미씨의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는 사람은 80만명이 넘는다. 구독자들은 이들이 만들어 가는 세계관에 몰입하고 참여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유대감을 형성하면서 현실과 허구의 구분 자체가 애매한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마블 스튜디오가 만드는 수퍼히어로 영화 시리즈가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으로 연결돼 있는 것과 비슷하다. 유튜브는 최근 발표한 트렌드 리포트에서 콘텐츠를 수동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적극적인 연결과 소통에 활용하는 이런 현상을 한국 콘텐츠 소비자들의 새로운 특징으로 꼽았다. 전 세계 청소년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게임 플랫폼 ‘로블록스’도 비슷한 흐름을 보여준다. 기존의 게임들은 제작사가 만든 세계관을 사용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아무튼 로컬] 로컬 만들기, 두 개의 길

부산항을 마주하고 있는 섬마을 영도에 최근 새로운 명소가 또 하나 등장했다. 서울 연희동에서 연남장 등 신세대 핫플레이스들을 잇달아 선보여 온 로컬 콘텐츠 기업 어반플레이가 주도해 지상 6층의 초대형 복합문화공간을 선보인 것. 멀리서 봐도 확연히 눈에 띄는 현대적 감각의 공간은 1층 베이커리와 4층 카페만 부분 개장 했는데도 벌써 문전성시다. 9일 방문했을 땐 평일인데도 주차장에 차가 가득하고 계산대엔 사람들이 장사진을 쳐 주문하고 음료가 나오는 데만 20분가량이 걸렸다. 여의도 다섯 배 크기의 면적에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몰려들었던 영도는 우리 경제 부흥기에 수많은 선박 수리 조선소가 들어서면서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조선업 쇠퇴와 함께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빈집과 빈 창고가 즐비한 전형적인 해양 러스트벨트로 전락했다. 전국 구 단위 지자체 중에서 소멸 위기 1순위 지역으로 지목돼 온 영도는 최근 몇 년 새 지역 재생의 전시장이라 불릴 정도로 새로운 재생의 바람에 들썩이고 있다. 먼저 지자체의 도시 정비 사업이 분위기를 띄웠다. 2013년을 전후해 부산시의 지역 공동체 복원 사업으로 해발 395m 봉래산 기슭의 판자촌이 ‘해돋이마을’로 탈바꿈했고 피란민 집단 거주지였던 ‘흰여울마을’은 문화마을로 재정비됐다. 2015년에는 근대 조선업의 발상지라는 영도 대평동을 재생한 ‘깡깡이예술마을’이, 2019년에는 수리 조선소 근로자들이 빠져나가 슬럼화한 동네 빈집들을 창업 공간으로 리모델링한 ‘봉산마을’이 새 단장을 마쳤다. 관 주도 정비 사업의 흐름을 타고 민간 기업들이 뛰어들었다. 선물용 방울을 만드는 회사 창업주의 아들이 신사옥을 지으며 회사 이름을 따 만든 카페 ‘신기산업’은 오션뷰 맛집으로 대박을

[아무튼 로컬] 로컬의 ‘부캐’ 전쟁

새해가 되면 전국의 지방 도시들은 ‘부캐 전쟁’에 돌입한다. 전쟁의 진원지는 중앙정부다. 정부 각 부처가 그 나름의 콘셉트를 앞세워 다양한 공모 사업을 내놓으면 지방 도시들은 그 사업을 따내기 위해 사활을 건다. 국토부가 스마트시티를 선정하겠다고 하자 갑자기 전국 여러 도시가 ‘우리가 바로 스마트시티 적임’이라고 나선다. 문체부가 문화 도시, 관광 도시를 지정하겠다고 하자 이번에는 일제히 문화 도시 혹은 관광 도시 흉내를 낸다. 모두들 본캐는 뒷전이고 주관 부처 입맛에 맞는 부캐를 앞세워 간택받으려 안달이다. (부캐는 ‘부캐릭터’를 줄인 말로, 본래 모습인 ‘본캐’의 대립어다.) 지자체가 부캐 전쟁을 벌이는 것은 중앙정부의 지원금을 받아내기 위함이다. 지방에서 걷히는 세금 가운데 80%가 국고로 들어가고 지방에 남는 세금은 20%에 불과하다. 그 돈으로 빚 안 지고 살림을 꾸릴 수 있는, 즉 재정 자립도가 100%를 넘는 지자체는 손으로 꼽을 정도다. 강원도 몇몇 군 단위 지자체는 재정 자립도가 너무 낮아 공무원들 월급 주고 나면 곳간이 바닥을 보인다. 그러니 정부 지원금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지역 창업자들도 부캐 전쟁을 벌이기는 마찬가지다. 정부나 지원 기관의 보조금을 받기 위해 어떨 땐 ‘소셜벤처’가 되고 어떨 땐 ‘사회적기업’이 되고 또 어떨 땐 ‘로컬 크리에이터’의 얼굴로 나타난다. 회전의자를 뱅글뱅글 돌리듯이 공모 사업에 맞춰 자신의 부캐를 내세운다. 그런데 이런 억지춘향식 부캐 만들기를 개탄하는 시각도 관점을 바꾸면 긍정적인 쪽으로 바뀔 수 있다. 트로트 가수 ‘유산슬’, 프로듀서 ‘지미유’ 등 11가지 부캐로 정상급 예능인의

[아무튼 로컬] 관계인구: 로컬과 관계 맺는 사람들

‘마의 3% 벽을 깨자!’ 새해 벽두부터 강원도 여기저기에서 열리는 신년 하례 모임, 출향 인사 모임, 지역 경제인 모임에 가면 자주 들리는 말이다. 국토의 6분의 1이나 되는 면적을 차지하고 있지만 인구는 전체의 3%에도 못 미치고 그로 인해 지역구 국회의원 숫자도 대부분의 경제 지표도 뭘 하든 3%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강원도 입장에선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문제다. 강원도는 이 벽을 깨고자 나름 애를 써왔다. 매년 강원도를 찾는 관광객은 1억명이 넘지만 상주인구는 150여만 명에 불과한 상황이고 그나마도 저출산·고령화로 생산연령인구가 계속 줄어드는 추세를 막아보려고 교통 인프라를 늘리고 온갖 당근을 제시하며 기업 유치 등에 힘을 쏟았다. 10만여 명에 달하는 접경 지역 주둔 군 장병, 매년 수만 명씩 강원도 소재 대학으로 유학 오는 외지 학생들과 귀농·귀촌 관심자 가운데 얼마라도 강원도에 주저앉게 해보려 하지만 효과는 신통치 않다. 고도성장기에 통하던 해법을 저성장·인구감소기에 적용해보려는 접근법 자체가 낡은 것이라는 지적도 많다. 지역 소멸이라는 화두를 우리보다 먼저 고민해 온 일본에서는 수년 전부터 ‘관계인구’라는 징검다리 개념으로 이 문제를 풀어보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관계인구’란 여행이나 방문 등을 계기로 그 지역을 좋아하게 된 ‘교류인구’와, 해당 지역으로 이주해 살고있는 ‘정주인구’의 중간쯤에 있는 사람들이다. 지자체가 하는 일을 보면 대개 관광객 유치 같은 교류인구 늘리기 정책과 이주자 유치 정책이 따로 노는데 그럴 게 아니라 관계인구 확대에 집중함으로써 양자의 한계를 넘어서 보자는 취지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지역에

[아무튼 로컬] 로컬을 구독하라

코로나 봉쇄의 그림자가 하염없이 길어지면서 매출 절벽을 뛰어넘기 위해 필사적 노력을 하고 있는 로컬 창업자들에게 드리운 희망의 다리는 ‘구독’이다. 지난 2014년부터 제주도에서 7년째 〈iiin〉이라는 이름의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을 발행해 온 재주상회 고선영 대표는 최근 ‘계절제주’라는 정기 구독 서비스를 시작했다. 제주에서 나는 제철 식재료를 계간으로 발행되는 잡지의 부록으로 함께 배달해주는 콘셉트다. 독자의 입장에선 책도 읽고 제철 먹거리도 받을 수 있으니 꿩 먹고 알 먹고다. 강원도 평창의 전통시장에서 ‘브레드메밀’이라는 조그만 빵집을 운영하는 최효주 대표도 최근 비슷한 서비스를 시작했다. 지산지소, 즉 지역에서 나는 재료로 먹거리를 만들어 지역에서 소비되게 한다는 정신을 추구하는 최 대표의 빵은 평창에서 생산되는 금강밀과 순메밀을 재료로 만들어져 전국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제 창업 5년 차가 돼 빵 굽는 오븐을 교체하기로 하고 이에 필요한 예산 3000만원을 크라우드 펀딩으로 모으는 데 25만원 투자를 해주는 사람에게는 4만3000원짜리 빵 꾸러미를 격주로 6회, 50만원 투자자에게는 매주 12회 보내준다. 소액 투자자에게 현물로 상환을 해주는 방식이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로컬 창업자를 응원하면서 빵 꾸러미를 할인된 가격에 구독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구독 경제 트렌드는 이미 다른 산업 분야에서 일반화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제조업 쪽에서는 고가의 장비나 작업 도구를 빌려 쓰는 형태로,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는 클라우드 기반으로 서비스를 내려받아 사용하는 방식이다. 정수기나 비데와 같은 가전 분야는 물론이고 자동차나 안마 의자도 필요한 기간과 용도만큼만 빌려 쓰고 지불할 수 있다. 영화나 음악도 종량제 구독

[아무튼 로컬] 규모의 경제 아닌 ‘범위의 경제’로… 로컬 기업의 새로운 경제 문법

강원도 강릉역 근처에서 50년 된 낡은 여인숙을 수리해 ‘위크엔더스’라는 숙박 공간을 운영하는 한귀리씨. 공식적으로 그의 사업체는 하나지만 제공하는 서비스를 보면 숙박 외에도 리트리트 프로그램, 로컬푸드와 음료, 요가와 명상, 소셜미디어 디자인 등 각각 별도 사업체로 꾸려갈 법한 일들이 줄잡아 네댓 가지다. 서울에서 잘나가는 방송국 피디로 일하던 그가 서핑과 요가에 매료돼 발리와 치앙마이, 그리고 강원도 동해안을 제집처럼 오가다 결국 회사를 팽개치고 공간 창업자로 강릉에 정착한 건 지난해 6월. ‘stay & more’를 표방하는 위크엔더스의 진가는 사실 ‘stay’보다는 ‘more’에 있다. 호텔이나 여관처럼 그저 잠자리만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강릉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뭔가 색다른 경험을 주기 때문이다. 손님들 역시 잠만 자러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위크엔더스에 짐을 풀고 리트리트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여행자들은 강릉의 푸른 바다와 솔향기 가득한 숲에서 서핑과 요가, 명상을 함께하고 저녁에는 다른 여행자들과 루프톱 파티를 즐기며 아침에 일어나 강릉식 로컬 푸드로 해장을 한다. 한씨는 자신의 공간을 ‘커뮤니티 호스텔’이라고 정의한다. 이처럼 로컬 창업자들의 사업 모델은 한 업종에 특화해 비용을 줄이고 매출을 늘려 ‘규모의 경제’ 효과를 누리는 기존의 경영 방식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로컬에서는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서비스를 함께 제공함으로써 연구 개발 및 판매 비용은 줄이는 대신 매출 효과는 극대화 하는 ‘범위의 경제(economy of scope)’ 원리가 더 잘 먹힌다. 세계화-산업화 시대에 제조업체들이 ‘단품종 대량생산’으로 가격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 탈세계화-탈물질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후기 산업사회에선 ‘다품종

[아무튼 로컬] ‘휘뚜루마뚜루’ 살다보면…

민족사관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 다트머스 대학과 영국 옥스퍼드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전범선(28)씨는 요즘 강원도에서 동물의 생명권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공간을 만들겠다며 동분서주하고 있다. 누구나 부러워할 엘리트 코스를 걸어오던 전씨는 5년 전 한국에 돌아와 잘나가는 직장을 마다하고 의식성 짙은 노래를 지어 부르는 ‘양반들’이라는 밴드를 만들더니, ‘두루미’라는 문화 기획사를 창업해 독립 출판을 하고, 문 닫기 직전인 인문사회과학 서점 ‘풀무질’을 맡아 운영하고, 채식주의자가 되어 비건 스타일의 사찰 음식점을 차리고, 이젠 동물의 생명권 보호를 주창하는 ‘동물해방물결’에 참여해 새로운 활동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전씨는 자신의 삶을 ‘휘뚜루마뚜루(마음 가는 대로 이것저것 하는 모양) 방식’이라고 표현한다. “안정됐지만 (정신적으로) 불안한 삶보다는 (경제적으로) 불안하되 행복한 삶이 더 낫다”는 것이 이유다. 이를 두고 좌충우돌 청년의 방황으로 보는 이도 있겠지만 그가 지금까지 해 온 일을 보면 하나같이 당장 돈은 안 되더라도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그의 모습은 지역에 자리 잡은 밀레니얼 창업자들의 특성을 한눈에 보여주는 자화상과도 같다. 기성세대 눈에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자기 잇속만 챙기고 공동체 문제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현장에서 만나는 젊은 창업자들에게선 전혀 다른 모습이 보인다. 로컬에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창업을 하는 밀레니얼 세대는 사회적 가치와 공익적 활동에 관심이 많고 거기에서 자기의 미래를 찾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밀레니얼 세대가 갑자기 이타심에 충만해서 이러는 것은 물론 아니다. 산업화 시대의 끝자락에

[아무튼 로컬] 로컬에 번지는 ‘크래프트’ 정신

로컬의 시대에 가장 도드라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크래프트(craft) 문화, 즉 필요한 것을 자신이 직접 손으로 만들거나 그렇게 만들어진 것을 소비하는 태도와 행동이다. 코로나 때문에 배달 음식이 대세를 이루는 것 같지만 다른 한편에선 공유 주방에 모여 함께 요리를 해 먹거나 집에서 유명 셰프를 흉내 내 음식을 만들고 인스타에 올리는 걸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직접 로스팅 한 원두를 갈아 핸드드립을 해주지 않는 카페는 명함을 내밀기도 어려워졌다. 커피 도시 브랜드에 힘입어 힙한 로컬도시로 떠오르는 강릉은 인구 21만명의 소도시임에도 카페만 1000여개에 육박한다. 약 10년 전까지만 해도 50개 남짓이던 국산 수제맥주 양조장은 2014년 주세법 개정 이후 두 배 이상 늘어났고 ‘강남페일에일’ ‘부산밀맥’ ‘버드나무브루어리’ 같은 로컬의 대표 브랜드도 생겨나고 있다. 서핑의 성지 양양에서는 스티로폼 대신 나무를 깎고 조립해 서프보드를 만드는 공방이 생겨났다. 원단을 끊어 재봉틀로 만든 수제 마스크가 인스타그램을 통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군산에서는 낡은 건물을 함께 고쳐서 공유 공간으로 만드는 DIT(Do It Together) 프로그램에 전국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이런 흐름의 저변에는 대량 생산–대량 소비 체제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있다. 믿을 수 있고 취향에 맞는 것을 직접 만들어 소비하는 라이프스타일의 실천이다. 브랜드 전문 잡지 ‘매거진B’는 로컬의 성지라 불리는 미국 포틀랜드를 ‘크래프트 비어와 커피, 오가닉 푸드와 아웃도어 제품으로 요약되는 크래프트맨십 문화를 글로벌 비즈니스로 키워낸 곳’으로 소개했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환경을 찾아 미국 전역에서 몰려든 창작자와 메이커들이 서로

[아무튼 로컬] 도대체 로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그저 코로나 탓만일까. 로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대도시의 다중 밀착 컨택트에 지친 사람들이 언택트 공간을 찾아, 혹은 발 묶인 해외여행족들이 꿩 대신 닭이라며 로컬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 아닌가 싶지만 사실 이런 움직임은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부터 급류를 타고 있었다. 여기서 로컬이란 ‘서울 말고 다 시골’이라는 의미보다는 ‘사람들의 삶 터’라는 뜻에 가깝다. 당연히 서울 안에도 다양한 로컬이 있다. 요즘 뜬다는 성수동이나 창신동, ‘힙지로’로 불리는 을지로 세운상가 주변, 예전부터 개성적인 상권을 형성해 왔던 이태원, 홍대 앞 등이 서울 안의 로컬이라 할 만한 곳들이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는 로컬의 핫플에 다녀온 걸 과시하려는 셀카 사진이 넘쳐난다. 형형색색 피크닉 복장 중·장년 세대의 관광버스 여행이 명승지 위주로 돌아갔다면, SNS 네트워크로 연결된 밀레니얼 자유여행객들의 발걸음은 전국의 ‘로컬 크리에이터’들이 만든 멋진 공간을 누빈다. 맛집은 기본이고 퀄리티 면에서 서울의 유명 상권에 뒤지지 않는 카페, 책방, 공방, 수제 맥주집, 바버숍, 편집숍 등 업종도 다채롭다. 매력적인 인테리어와 감각적 서비스를 갖춘 이런 가게들이 지난 수년 새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생겨나더니 점점 더 빠른 기세로 확산하는 추세다. 그러다 보니 ‘로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는 말이 나온다. 청년들 사이에 가장 뜨는 게 로컬이라는 얘기도 있다. 서점에 가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한동안 출판계에선 ‘퇴사’를 주제로 하는 책들이 홍수를 이뤘다. 그 흐름을 로컬이 이어받았다. 잡지에서 시작해 일본 번역서로 넘어가는가 싶더니, 지난해부터는 본격적으로 로컬 전성시대의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