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읽어주는 김교수] 행동주의 기업과 표면적 행동주의 기업

8년 전 이맘때쯤, 글로벌 자동차기업 폭스바겐의 디젤차량에서 기준치 40배가 넘는 오염물질이 배출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임의로 조작된 프로그램에 의해 주행시험 중에만 오염 저감장치를 작동시켜 환경 기준을 충족하도록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처음에는 폭스바겐사 제품에서만 배기가스 조작이 일어난 것으로 알려졌지만, 결국 같은 그룹 산하의 고급 자동차 브랜드인 아우디에서도 동일한 방식의 조작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큰 파장이 일었다. 배신감을 느끼게 했던 것은, 당시 폭스바겐은 자사의 ‘클린 디젤’ 차량이 가솔린 자동차보다 ‘더 깨끗하고 친환경적’이라며 거액을 들여 슈퍼볼 광고, 온라인 소셜 미디어 캠페인, 지면 광고 등을 포함한 세간의 이목을 끄는 대대적인 마케팅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다국적 석유·가스 회사인 BP도 유사한 문제로 홍역을 치러야 했다. BP는 ‘Beyond Petroleum(석유를 넘어)’라는 슬로건을 사용하며 재생에너지에 대한 투자를 강조했지만, 여전히 석유와 천연가스에 대한 투자가 압도적으로 많아, 워싱하는 기업으로 비난을 받아야 했다. 이뿐 아니라, 페이스북, 아마존 등도 여러 친환경 약속을 내놓았지만 이와는 상반된 행동을 보이며, 에너지 소비와 데이터 센터의 환경적 영향을 축소하지 않고 물류 및 창고 작업자들의 근로 조건과 환경 영향에 대한 개선을 하지 않아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최근 지속가능경영과 ESG 경영이 화두가 되면서, 워싱에 대한 우려는 더욱 커졌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명품의 경우 가품, 일명 짝퉁이 더 많아지는 것처럼 ESG 경영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며 가짜 ESG 경영이 더 많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 겉으로는 착한 척, 친환경적인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
[농업의 미래, 미래의 농업] 식량은 미래 성장산업이 될 수 있을까?

지난해는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이 더 많았다. 동유럽 곡창지대에서 시작된 전쟁으로 식량 가격이 폭등하면서 전 세계 서민들은 치솟는 물가로 고통받았다. 중국에서는 사상 최악의 가뭄으로 양쯔강이 말랐고, 파키스탄에서는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겼다. 올해는 슈퍼엘니뇨가 시작되면서 세계는 또다시 폭염과 가뭄, 연이은 산불로 시름이 깊어 간다. 서민들은 벌써 내년 식품 물가를 걱정한다. 하지만 모두가 다 나빴던 건 아니다. 식량 생산이 원활하지 못하면 더 호황인 업종도 있다. ABCD라는 별칭 또는 곡물 메이저로 불리는 ADM, 벙기(Bunge), 카길(Cargill), LDC가 그 주인공이다. ABCD 중 맏형 격인 카길은 지난해 매출액 1770억 달러로 최고를 갱신했다. 전년보다 120억 달러가 더 증가한 수치였다. 나머지 세 기업의 매출액도 전년 대비 평균 110억 달러 더 늘었다. 기후가 불규칙해져 농산물 생산에 차질이 커질수록 곡물 거래기업의 수익은 증가한다. 기상학자들은 내년을 더 걱정한다. 올해 폭염을 몰고 온 슈퍼엘니뇨가 내년에는 더 극성을 부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내년 이후의 식량 사정 역시 호전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하는 이유다. 그 이후는 더 나아질까? 그럴지도 모른다. 한두 해 좋아질 수도 있겠지만 커지는 기후변화의 영향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80% 이상의 곡물을 해외시장에서 구매하고 있다. 국제 곡물 시장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외교·안보 분야 최정상급 싱크탱크인 채텀하우스는 “일본과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위험에 노출된 국가 중 하나”라며 식량공급망의 취약성을 경고한다. 이것은 단순히 공급망의 문제에

정유미 포포포 대표
[기차에서 일합니다] 소멸 위험 지역이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되기 전에

저출생, 인구, 지방. ‘소멸’이라는 키워드에 비상등이 깜빡인다. 전국 228개 기초지방자치단체 중 소멸 위험 지역은 과반이 넘는 118곳. 특단의 조치로 수백억원의 정부 지원금이 지역에 상륙 중이다. 지방소멸대응기금을 유치하기 위한 지역별 각축전이 벌어지면서 외부 기획자를 수혈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의 연구용역에 참여하면서 나는 예비 정주 인구의 시선으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지역의 면면을 살펴봤다. 잠시 머무는 곳이라 해도 어떤 경험으로 기억될 것인지가 중요한 지점이었다. 인구 유입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실효성 있는 공간 조성. 시작점은 선명했다. 워케이션(workation) 부지를 변경해 아파트 단지를 올려달라는 요구를 기점으로 삐끗. 결국 최종 조감도는 논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빌딩 숲이 됐다. 얼기설기 얽힌 이해관계와 결정권자의 입맛에 맞게 각색되는 동안 전문성과 차별성이 흐려지는 현상. 개점휴업 상태의 유령 건물로 남은 지역의 각종 지원센터와 공공기관 건물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지역별 혁신도시를 비롯해 국공립대 역시 주말이 되면 공동화 현상에 처한다. 일하는 공간이자 임시거처에서 주말이면 문화를 향유하고 아이를 교육하는 수도권으로 돌아간다. 돈을 버는 곳과 쓰는 곳이 다르다 보니 그나마 있던 인프라마저 흔들린다. 폐업 사인이 즐비한 원도심 1층의 쇼윈도를 지날 때면 대낮에도 스산한 기운이 감돈다. 지방소멸대응기금 기한이 10년으로 설정되었다 해도 매년 평가에 의해 100개 지역으로 예산이 쪼개지는 현재의 방식이라면, 앞으로 논밭 위에 수백 개의 나홀로 빌딩이 올라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거미줄처럼 첨예한 지역의 이해관계, 공공기관의 기준에 맞춘 수백 장짜리 계획서와 입찰 조건, 성과 보고를 위한 결과물.

임성택 법무법인 지평 대표변호사
[기업과 사회] 사회공헌을 넘어 지역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기업

시스코는 지난 25년 동안 180여 나라에서 1만개 넘는 IT교육 아카데미를 운영했다. 무려 17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무료로 교육받았다. 특히 저개발국가에 폭넓은 IT 기술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사람들은 일자리를 얻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었다. 궁극적으로 이 활동은 시스코가 진출하는 지역의 전문인력을 키워 회사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도 기여했다. 영국의 유통업체 테스코는 미국 시장에 진출하면서 의외의 선택을 했다. 빈민가에 신선한 야채와 음식을 파는 매장을 연 것이다. 그동안 빈민가에는 패스트푸드 매장은 많지만 신선식품을 파는 마트는 없었다. ‘음식사막의 오아시스’라고 불린 이 매장들을 통해 테스코는 빈민 지역의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하면서 비즈니스의 기회도 만들었다. 신선한 과일로 빈곤과 폭력을 몰아낸다는 평가를 받았다. 우리는 기업의 사회공헌을 이야기하지만 외국에서는 지역사회 참여(Community Engagement)를 이야기한다. 번역하면 기업과 지역사회의 ‘관계 맺기’다. 지역사회는 기업과 어떤 관계일까? 기업이 지역사회에 유익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기업이 지역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기업은 지역사회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사회공헌론’은 전통적이고 오래된 개념이다. 기업도 사회 안에 있으니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는 자선적이며 윤리적인 접근법이다. 솔직하게는 사회적 영향보다는 사업적 이익이 우선이다. 홍보나 마케팅의 목적이 크다. 기부금을 전달하거나 연탄을 나른 뒤 찍는 사진이 더 중요하다. 당연히 사회나 경제가 어려워지면 사회공헌은 축소된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사회공헌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기업시민’(Corporate citizen)이다. 기업도 시민으로의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의무’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사회공헌보다 한 걸음 나아간 것이다. 그러나

김정태 엠와이소셜컴퍼니 대표
[혁신의 목격자] 10년을 돌아보니 보이는 세 가지 변화

한 달 간의 안식휴가를 다녀왔다. 대표가 된 지 10년만에 처음이었다. 10년 전 MYSC 매출은 2억2000만원을 간신히 넘겼고, 영업손실 3억원을 기록했다. 설립 이후 자본전액잠식을 경험하면서 영리법인을 폐업하고 비영리법인으로의 전환을 고민하던 시기였다. 지금은 매출 100억원을 넘어서며 투자 운용자산 600억원 이상, 130개 이상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다. 10년전 임팩트투자는 누적 4건이 고작이었다. 국내 최초의 사회혁신 전문 컨설팅·임팩트투자사를 표방했던 MYSC에게 당시는 무척이나 곤고한 시기였다. 사회혁신과 임팩트투자는 과연 언제 지속가능해질까란 질문은 그 당시 사치스러운 질문이었다. 한국에서 사회혁신과 임팩트투자는 과연 지속가능할까란 질문이 진실에 가까웠다. 안식휴가는 10년이 지난 오늘의 현실에서 다시 그 질문을 마주해볼 수 있는 여유였다. 그때로부터 지금은 어떤 부분이 달라졌을까? 크게 세 가지의 변화를 개인적으로 반추해봤다. 첫째, ‘임팩트’라는 영역이 경제계와 자본시장의 메인 스트림에 포함됐다. 과거에 ‘임팩트’는 영리와 비영리 사이에 있는 무언가, 또는 두 섹터의 융합이라는 관점만으로도 충돌되는 버거운 논의들이 지배했다. ‘MYSC는 비영리법인일 줄 알았다’고 말하는 분들을 종종 만나기도 했다. 나 역시 그런 관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2016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소셜 벤처링’(social venturing)이란 2박 3일 워크숍에 참여했을 때다. 참가비만 1만 달러가 넘었지만 초대를 받아 참여한 이곳에서 나는 응당 ‘소셜’이란 단어를 보고 사회적기업가들 또는 대기업의 사회공헌 담당자들이 모일 것으로 생각했다. 참가자들은 놀랍게도 바클레이스, 비자, 마스터카드 등 다국적 대기업의 신사업 또는 혁심 담당임원들이었다. 이보다 조금 더 이른 시기 모태펀드에 ‘임팩트투자’ 출자 계획이 있는지 문의한 적이 있었다. 담당자는 짧게 회사

양경준 크립톤 대표
[로컬 패러다임] 청년 창업가 육성의 조건

지난해 6월 전국에서 일제히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났다. 거의 모든 지역의 후보자들이 ‘청년 창업 지원’을 핵심 공약으로 내건 것이다. 왜 그랬을까. 지역경제 활성화에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일까. 과거에는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공약으로 대기업 유치를 약속했다. 지금은 이런 공약이 먹히지 않는다. 수도권 규제 완화로 대기업이 수도권으로 이전하고 임금 인상과 강화된 노동법 때문에 지방에 있던 공장이 폐쇄되거나 해외로 이전하는 추세를 막을 수 없다. 현실 인식이 부족한 일부 정치인들을 제외하고 이 정도는 이미 학습됐다. 그다음으로는 산업단지 조성 공약이 유행했다. 그러나 우후죽순으로 만들어진 지방산업단지 중 성공 사례가 거의 없다는 것 역시 이미 학습이 끝났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카드가 청년 창업 육성이 됐다. 이 카드는 효과적일 가능성이 높다. 스타트업이 창출하는 일자리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지역경제를 살리는 유일한 방법은 양질의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다. 일자리 창출의 주체는 이제 대기업도 중소기업도 아닌 스타트업이 됐다. 문제는 지역 창업을 활성화하거나 스타트업을 지역에 유치하는 것이다. 하지만 청년들은 창업과 취업의 기회를 찾아 지역을 떠나고 있지 않은가. 스타트업얼라이언스의 통계에 따르면, 2019년 이후 지금까지 10억원 이상의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 중 90%가 수도권에 밀집해 있다. 수도권의 편리함과 효율성에 익숙해진 창업가들을 어떻게 지역으로 끌어내린다는 말인가. 해법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는 변화는 서울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대한민국에 최초의 창업 붐이 일었을 때부터 스타트업은 투자사들이 자리 잡은 강남 테헤란로에 몰려있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정유미 포포포 대표
[기차에서 일합니다] 멘토와 선무당, 그 균열과 균형 사이

“점을 AS 받는다고요?” 저녁을 먹으러 가던 택시 안에서 선배는 잠깐 점집에 들르자고 했다. 여기까지 온 김에 점을 보라는 호객행위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내 생시(生時)를 풀던 역술가는 웨딩드레스 디자이너를 하면 대성할 팔자라 호언장담했다. 난생처음 삥을 이렇게 뜯기는구나 허무한 쓰나미가 스멀스멀 몰려왔다. 드로잉은커녕 내가 쓴 글씨도 못 알아보는 천하제일 악필이 디자이너라니요. 그것도 웨딩? 창업한 이래 이런 선무당을 집중적으로 만났다. 시니어 인턴 지원 사업으로 모신 선생님은 어느 주말 내비게이션도 길을 잃는 논두렁 밭두렁 사이의 전원주택으로 나를 불렀다. 여기서 집을 짓고 산 지 십 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텃세가 심하다는 정착기가 1절. 앞으로 농업이 유망하니 여기 들어와 농사를 지으라는 충고가 2절. 지역에서 자리 잡으려면 일자리 지원금을 받아 “날 고용하세요!”라는 3절에 들고 간 샤인머스캣 보따리를 풀던 손이 머쓱해졌다.  현장 실사를 겸해 사무실에 찾아온 한 컨설턴트는 두 시간 동안 딸 자랑만 늘어놓았다. “정 대표가 딸 같아서”라는 코멘트에 코털까지 쭈뼛 소름이 돋아 재채기를 쏟으며 서둘러 배웅했다. 처음 정부 지원사업을 통해 배정된 멘토는 초면에 “이거 진짜 할 거예요?” 물으며 다리를 삐딱하게 꼬았다. 덕분에 내가 누군가의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가 샘솟았다.  심혈을 기울여 몇 달 만에 만든 시제품을 선보이는 자리에서 어떤 심사위원은 “애 엄마가 운동화 질끈 묶고 달릴 생각을 해야지. 또각거리면서 하이힐 신고 다니는 꼴인데?”라며 코웃음 쳤다. “누구보다 잘 만들 수 있는 역량을 보여드리려 몇 달을 밤새워 만들었다”며 애써

임성택 법무법인 지평 대표변호사
[기업과 사회] 소비자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20여 년 전 회사 동료가 비건 선언을 했다. 그때는 같이 갈 식당이 없었다. 식당에 가면 그는 밥과 야채 반찬만 먹어야 했다. 이제는 비건이 유행이다. 비건 식당뿐 아니라 비건 빵집, 비건 아이스크림 가게도 등장했다. 일반 식당도 비건 메뉴를 내놓고 있다. 우유와 버터가 없는 빵과 아이스크림. 그런데 맛도 좋다. 몇 년 전 국가인권위원회에 어느 군인이 진정을 제기했다. 군 식당에서 비건을 고려하지 않아 차별받고 있다는 취지였다. 흥미로운 이 사건은 국방부가 비건 메뉴를 개발하겠다고 답해 종결됐다. 우리나라 채식 인구는 약 250만명으로 전체의 3~4%로 추산된다. 관련 사업은 크게 성장하고 있다. 한 사람이 일주일에 한 번 채식을 하면 1년에 15그루의 나무를 심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만큼 축산업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는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채식을 하면 2050년까지 매년 약 80억t의 온실가스 배출을 줄일 수 있다고 추정했다.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무려 22%다. 소비가 환경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난 비건이 될 자신은 없다. 그래도 일주일에 하루는 고기를 먹지 않는 ‘간헐적 비건’이 될 용의는 있다. 소비자는 기업의 가장 중요한 이해관계자다. 소비자가 없으면 기업은 존립할 수 없다. 기업의 이익은 모두 소비자에게서 나온다. 그럼 소비자가 기업을 바꾸고, 나아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나쁜 기업에 혼쭐을 내고 착한 기업에 돈쭐을 내서 기업을 바꿀 수 있을까? ‘개념있는 소비’를 통해 환경을 살리고 기업이 인권을 존중할 수 있도록 추동할

[진실의 방] 이상한 어른

D는 대구에 있는 보육원에서 자랐다. 엄마 아빠 없는 저런 애랑은 친구 하면 안 돼. 어른들이 D를 가리키며 말했다. 중학생 때는 친구와 길을 걷고 있는데 승용차 한 대가 D를 향해 돌진했다. 급하게 피하다가 길바닥에 쓰러졌다. 차에서 내린 운전자는 친구 엄마였다. 아들과 친하게 지내는 게 못마땅해 차로 위협한 것이다. 그때부터 D는 어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어른이 말을 걸어오면 무조건 욕을 했다. 무시하는 말을 들으면 주먹을 날렸다. 보육원을 나와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배가 고파서 편의점에서 음식을 훔치고 싸움을 하다가 재판을 받았다. 소년원에만 세 번을 들락거렸다. 윤용범 청소년행복재단 사무총장을 만난 건 열아홉 살 때다. 서울소년원을 출소한 직후였다. 윤 총장이 말했다. 이제부터 날 ‘아버지’라고 불러라. 소년원에 세 번 다녀왔다고 하면 다들 사람 취급도 안 하는데 아버지는 무슨. 참 이상한 어른이네. D가 차갑게 굴어도 윤 총장은 수시로 전화를 걸어 잘 지내나, 어려운 거 없나, 아버지가 도와줄게 하며 챙겼다. 1년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아버지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어느 날 윤 총장이 물었다. 아버지가 소원이 하나 있는데 고등학교에 다녀보면 안 되겠나? 스물한 살이라는 나이에 고등학교에 입학한 건 아버지 소원을 들어주고 싶어서였다. 졸업장을 받던 날 아버지는 꽃다발을 사 들고 D를 찾아왔다. 기념으로 같이 짜장면을 먹었다. 이제 너도 스물네 살이니까 홀로서기를 준비해야 한다. 윤 총장의 말에 D가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나 이제 여섯 살이에요. 아버지 만난 게 6년 전이니까 여섯

김정빈 수퍼빈 대표
[쓰레기공장 이야기] 시장의 원리에서 답을 찾다

지난 20일 세계은행 관계자들이 경기도 화성에 있는 아이엠팩토리를 방문했습니다. 아이엠팩토리는 폐페트병으로 ‘r-Flake’라는 재활용 소재를 만드는 수퍼빈 공장입니다. 세계은행은 UN 산하의 국제금융기구로 전 세계 빈곤 문제 해결을 사명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날 방문한 에너지환경 부문 선임담당관인 주누 슈레스타 박사는 지난 수년간 아시아 지역 내 플라스틱 폐기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전문가와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현장 방문은 4층에 있는 ‘공존의 공간’에서 시작해 한 층씩 아래로 내려가면서 진행됐습니다. 공존의 공간에는 업사이클 아티스트들이 기부한 강아지 조각, 전등 등이 있습니다. 일부 마감재는 페플라스틱을 사용했죠. 따로 마련된 유기동물 임시보호소도 운영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 공간에서 슈레스타 박사는 흔히 혐오시설로 인식되는 재활용 공장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는 모습이었습니다. 재활용이라는 행위는 결국 문화와 경험에서 시작되는 것이죠. 3층에서는 순환경제에 대한 콘텐츠를 소개했습니다. 순환자원회수기 ‘네프론’에 페트병과 빈캔을 넣어서 포인트를 적립하는 체험도 진행했습니다. 2층은 통제실입니다. 아래 1층에 있는 거대한 재활용 설비들이 공장 내 서버로 연결돼 생산 현장의 다양한 데이터를 추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재활용 소재 생산에 따라 얼마나 많은 탄소배출량이 감축되는지, 또 이렇게 생산된 재활용 소재들이 향후 포장재 산업뿐만 아니라 자동차·전기전자·섬유 산업 등에서 쓰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모든 플라스틱을 재활용하는 게 목표였다면 실현 불가능했을지 모릅니다. 재활용이 하나의 산업이 되기 위해서는 기존 다른 산업에서 필요로 하는 조건에 부합해야 하니까요. 우선은 PET와 같은 특정 플라스틱 소재를 결정하고 작은 범위에서부터 재활용의 새로운

이희숙 재단법인 동천 변호사
[모두의 칼럼] 산업보조금은 살리고, 사회보조금은 죽이고?

얼마 전 대통령실은 민간단체 보조금 감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내년도 보조금 예산을 5000억원 이상 삭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어 기획재정부는 각 부처에 내년 예산안을 다시 작성할 것을 요구했고, 재검토 과정에서 국고보조금 사업이 대거 삭감·폐지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고보조금은 어떻게 쓰이고 있을까. 올해 국고보조금 규모는 약 102조원이다. 이 중 81%가 지방자치단체, 19%가 민간에 교부된다. 민간보조금은 개인, 영리법인, 개인사업자, 공공기관·학교, 비영리법인에 교부되는데, 분야별로 살펴보면 산업·중소기업·에너지 22%, 농림수산 20%, 문화·관광 18%, 교통·물류 9%, 사회복지 8% 등이다. 대부분이 산업과 농수산, 관광 분야에 지출되고 비영리단체들이 주로 활동하는 분야인 사회복지는 8%에 불과하다. 지난해 사회복지 분야 예산 비율은 16%였는데 1년 새 절반으로 줄었다.  대통령실 보도자료에 따르면, 2022년도 비영리민간단체(이하 비영리조직) 국고보조금 규모는 3조4452억원(직접지원과 매칭펀드 국비)으로, 전체 민간보조금 22조8800억원의 15%에 불과하다. 나머지 85%가 영리기업과 개인, 공공기관 등에 교부됐지만, 15%의 비영리조직에 대해 집중 감사가 진행된 것이다. 그리고 감사 결과를 근거로 비영리에 대한 예산 축소가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다르게 생각해 보면, 보조사업자 중 주식회사 감사에서 부정수급 사례가 발견됐다면서 향후 주식회사에 대한 보조금을 감축하겠다는 꼴이다. 이해 가능한 정책인가. 보조사업자의 도덕적 해이, 부정한 집행이 문제라면 개인, 영리, 비영리 등 구별 없이 위반 사례를 조사하고 문제 단체를 강력히 제재하는 것으로 해결해야 한다. 대통령실은 지난 정부에서 민간 단체 보조금이 급증했다며 비영리조직에 대한 특혜가 있었던 것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이 기간 민간보조금뿐 아니라 전체 국고보조금이 66조9000억원(2018년)에서 102조원(2022년)으로 증가했다. 이 중

[논문 읽어주는 김교수] ESG, 산산조각이 나다

“더 이상 ESG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투자자 중 하나인 블랙록의 CEO 래리 핑크는 지난달 25일 아스펜 아이디어스 페스티벌 행사에서 ‘ESG’라는 용어가 정치적으로 상대 진영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로 쓰이는 등 오용되는 것에 대해 “부끄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더는 ESG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동안 핑크가 보여준 행보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어서 많은 화제가 됐다. 실제 핑크는 2018년 블랙록의 연차보고서에서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시장에서 장기적으로 지속적인 성과를 내며 환경과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중요하다’며 공개적으로 ESG를 지지한 이후, 계속해서 기업에 ESG 이슈를 고려한 경영을 강조해 왔다. 나아가 2021년에는 기업들에 비즈니스 모델이 넷제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계획을 공개하도록 요청했다. 덕분에 작년 기준으로 미국 대기업의 82%가 탄소 배출량 감축 목표를 설정하는 등 많은 기업이 RE100과 같은 이니셔티브에 가입하며 탄소중립과 온실가스 감축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핑크의 이번 발언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ESG를 반대하는 미국 공화당의 어느 의원은 최근 몇 년간 자산운용사가 좌파의 압력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주장하며, ESG 추세를 멈추려는 노력의 승리라고 했다. 또한 보수 성향의 주주들은 올 1월부터 5월 말까지 ESG를 반대하는 내용의 결의가 최근 3년간 400% 이상 증가하는 실적을 거뒀다고 주장했다. 반면 여전히 ESG에 관심을 보이는 곳도 많다. 한국의 경우 ESG 성과를 내는 기업에 금리를 우대하는 정책이 운영되고 있고, ESG 역량이 부족한 중소·중견기업을 위한 공공과 대기업의 지원 프로그램이 제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