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1일(목)

[우리도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자궁경부암에 관한 불편한 진실

김형준 세계백신면역연합(GAVI) 선임 매니저

국제기구를 통해 개발도상국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를 얻은 지 10년이 넘게 흘렀다. 그 과정에서 한 가지 깨달은 불편한 진실이 있다. 부의 분배가 공평하지 않듯이, 사람들의 삶과 죽음도 그리 공평하지 않다는 점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이 죽고, 더 빨리 죽고 있었다. 그 죽음들의 상당 부분은 집 근처에 병원이 있었다면, 백신을 맞았다면, 모기장을 치고 잤다면, 심지어 깨끗한 물만 마셨어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그만큼 죽음에 더 가까운 곳에 살다 보니 역설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다양한 방법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이야기. 여성들을 살리는 백신의 이야기다.

매년 전 세계에서 약 66만 명의 여성이 자궁경부암 진단을 받고 있고, 그 숫자의 반 이상인 35만 명의 여성이 자궁경부암으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 쉽게 말해 매년 세종시 인구 정도의 여성이 자궁경부암으로 죽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통계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욱 불편한 진실이 숨어있다. 자궁경부암으로 죽는 여성들의 10명 중 9명은 개발도상국 여성이라는 것이다. 선진국 여성들의 자궁경부암으로 인한 사망은 지난 20년 꾸준히 감소하고 있지만, 개발도상국에서는 꾸준히 사망숫자가 증가하고 있다. 특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자궁경부암으로 죽는 여성의 숫자가 암 관련 사망의 1위를 차지한다. 어디서 태어나느냐가 어떻게 죽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궁경부암은 백신으로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질병이다. 자궁경부암의 90% 이상을 유발하는 인유두종바이러스(HPV)는 대부분의 성인들이 한 번쯤은 감염되는 흔한 바이러스다. WHO(세계보건기구)의 권고에 따르면 9~14세 여아에게 HPV 백신을 접종하면 90% 이상이 자궁경부암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개발도상국에서는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자궁경부암으로 죽고 있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자궁경부암 백신을 맞지 못해서다. 선진국에서는 자궁경부암 백신이 2000년대 중후반에 소개되면서 자궁경부암으로 인한 여성 사망이 꾸준히 줄어들었다. 한국도 2007년도부터 자궁경부암 백신이 소개되었다. 한 번에 20만 원이나 하는 비싼 자궁경부암 백신을 한국정부는 2016년부터 여성 청소년을 대상으로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반면 개발도상국에서는 비싼 자궁경부암 백신을 맞기도 힘들뿐더러 정부의 지원도 부족해 대부분의 여성들은 백신을 맞지 못한 채 그렇게 자궁경부암으로 죽어왔던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들을 살릴 수 있을까? 첫째, 자궁경부암 사망의 90% 이상이 발생하는 개발도상국에 백신을 공급해야 한다. 둘째로, 공급된 백신이 여성청소년들에게 실제로 접종할 수 있게 보건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개발도상국의 여성 청소년들이 예방접종이 본인들의 건강한 미래를 위한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주변에도 권유하고, 정부에게도 지속적인 백신 공급을 요구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야 한다.

필자가 일하는 세계백신면역연합(Gavi)은 지난 10년간 값비싼 자궁경부암 백신을 제약사들과 협상을 통해 공동구매로 훨씬 저렴하게 확보해 저개발국들에 공급하고 있다. 공짜로 제공하지 않고, 더 어려운 국가는 더 많이 지원하고, 조금 더 여유 있는 국가는 더 적게 지원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결국 나라가 잘 살게 되면 스스로 구매할 수 있게 도와주는 방식이다.

나이지리아에서의 HPV 백신 접종 현장. /Gavi

그렇게 공급된 백신이 실제로 소녀들에게 전달되기까지도 쉬운 일만은 아니다. 유니세프(UNICEF)와 세계보건기구(WHO)와 협력해 백신이 도착하고 안전하게 보관 및 전달될 수 있도록 보건 물류 시스템도 지원한다. 백신이 상하지 않게 적정 온도로 유지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백신 접종을 담당하는 보건 인력들이 새로운 백신 정보를 습득하고, 백신 프로그램과 캠페인을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을 한다.

유엔이 정한 지속가능한 개발계획(SDGs)이 마무리되는 2030년까지 개발도상국 1억 2000만 명의 여아들이 자궁경부암 백신을 Gavi의 지원으로 추가로 맞을 예정이다. 이로 인해 약 150만 명의 여성이 자궁경부암으로 죽는 것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추산된다. 그들은 건강하게 성장해 본인의 가정과 마을, 그리고 그 나라를 분명히 더욱 건강하게 만들 것이다. 백신의 힘은 사람을 살리는 이상의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성이 건강해야 가정이 건강하고 국가도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당연한 백신. 그리고 당연한 삶. 지구촌 어딘가에는 그 당연한 것들이 없음으로 인해 사람이 죽는다. 그리고 우리는 때로 그 죽음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알면서도 외면함으로 그 죽음들을 흘려보내기도 한다. 필자는 개발도상국을 돌아다니며 예방접종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많은 아동들에게 자궁경부암은 물론 소아마비, 폐렴 등 많은 질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노력해 왔다. 국제보건이란 분야에서 살릴 수 있는 생명들을 질병예방으로 살린다는 사명으로 일해왔다. 아마도 내가 태어나고 자란 한국에서 계속 있었으면 깨닫지 못했을 사람을 살리는 다양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제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내가 사는 것을 넘어 같이 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다양한 방법 중에 당신의 역할이 분명히 있을 거라 믿는다.

김형준 세계백신면역연합(GAVI) 선임 매니저

필자 소개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교 보건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 중입니다. 이전에는 국제기구 유니세프에서 약 10년간 근무하며 네팔, 가나, 말레이시아,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개발도상국 아동과 청소년의 건강한 삶을 위해 활동했습니다. 동시에 세계백신면역연합(Gavi)에서 선임 매니저로 일하며 백신으로 저개발국의 아동들을 살리는 사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개발도상국에서 보건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 일하며 질병 예방으로 사람을 살리는 다양한 방법을 경험했고, 이를 많은 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