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도 배우로서 인정받고 자신감 찾아갑니다”

장애인 배우 길러낸 ‘메자닌 극단’ 지난 8일 서울 대방동에 있는 여성플라자 아트홀 ‘봄’의 무대에선 노란 머리에 갈색 눈을 가진 아버지와 아들이 초콜릿 파이를 굽고 있었다. 아버지가 뒤돌아선 사이 계란을 껍질째 넣고, 설탕과 밀가루를 들이붓는 아들의 모습에 관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발달 장애 아동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한국어 단어가 적힌 ‘커닝페이퍼’를 보며 내뱉는 아버지의 어설픈 대사엔 박수까지 치며 깔깔댔다. 제8회 장애어린이축제 해외 초청작으로 올려진 오스트리아 메자닌 극단의 연극 ‘초콜릿 파이’는 비장애인 배우 한 명과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장애인 배우 한 명이 초콜릿파이를 구우며 생기는 에피소드를 다룬 극이다. 비장애인 관객은 다운증후군을 앓는 배우가 상대방의 연기에 시의적절하게 반응하며 능숙하게 극을 이끌어가는 모습에 놀라워했고, 장애 아동들은 외국 배우가 어설픈 한국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연극이 끝나고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함께 연극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실행에 옮긴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바로 이 무대를 기획하고 만든 연극배우이자 연출자인 마르티나 콜빙거-라이너(Martina Kolbinger-Reiner·46·사진) 씨를 찾아 나섰다. “독일 국경도시 파사우(Passau)와 오스트리아 그라츠(Graz)에서 총 5년 동안 연극과 영화를 배우고 극단을 세우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러다 공동대표를 맡기로 한 파트너의 아들을 만났습니다.” 파트너의 아들은 발달 장애 아동이었다. “그 친구가 연극을 보면서 무척 좋아하는 거예요. 잘만 하면 장애인이라도 연기를 하며 극에 참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극단 메자닌(Mezzanin)은 1989년 그렇게 탄생했다. 하지만 메자닌 극단을 운영해 온 21년은

[Cover story] 인터뷰―월드비전 한국 박종삼 회장 “우리의 나눔은 개미군단의 승리이자 생명 나눔”

아동 결연사업 규모 세계 4번째짧은 역사 속 ‘기적’의 성적모금이 가장 잘된 시기는 IMF 때”우리는 충분히 스스로를자랑스러워할 자격 있어” 전쟁을 직접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극한의 굶주림과 공포를 이해하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어려운 일’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이뤄졌던 때가 1950년, 6·25전쟁 이후다. 당시 한국 거리에는 굶고 병든 아이들이 넘쳤다. 전쟁을 피해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 하나 부지하기 어려운 시절. 커다란 트럭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아이들의 시체를 보고, ‘어린 생명을 돕자’는 구호단체가 생겨났다. ‘한국 월드비전 60년, 세계 월드비전 60년’의 역사도 그렇게 시작했다. 당시 14살 소년이었던 월드비전 박종삼(75) 회장도 1950년 그 추운 겨울을 ‘거리의 소년’으로 지독하게 났다. “길에서 잠자며 며칠 굶주리고 나니, 지나가는 사람 주머니에서 동전이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고 했다. 살아남으려면, 다른 사람의 생명까지도 도와줄 수 있으려면, 실력을 갖춰야 한다고 깨달았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아남았고, 그 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사람들에게 보답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서울대 치과대학을 나와 진료 봉사에 나섰고, 무의탁 청소년들을 위한 마을을 세웠다. 20년 넘게 교수로도 봉직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쉼 없이 달려온 시간들. 그는 “학교 정년 퇴임식 날, 비로소 쉴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식은 오래가지 않았다. 월드비전 이사들이 찾아왔다. 그간 쌓은 모든 지식과 네트워크를 월드비전의 성장을 위해 쏟아달라는 요청이었다. “완고하게 거절하는 저에게 한 분이, 얼마 안 있으면

[세계 Top 10 사회적 기업가를 찾아서] ⑦ 美 ‘컬리지 서밋’ 창업자 JB슈람

저소득층 대학 진학 돕는 ‘내비게이터’ “가난하다고 꿈까지 가난할 순 없다” 1993년 화창한 어느 봄날. 네 명의 학생이 ‘요벨청소년센터’를 찾았다. 미국 워싱턴DC의 주택단지에 위치한 이 센터는 저소득층 청소년들을 위한 방과 후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다. 당시 원장을 맡고 있던 JB슈람(JBSchramm·47) 씨를 찾아온 아이들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어려운 가정형편, 본받을 역할 모델(role model)과 멘토의 부재, ‘대학’에 대한 정보 부족과 자신감 부족 등으로 센터 아이들 대부분이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것에 안타까워하던 때였다. “모처럼 용기를 내 찾아온 아이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다”는 슈람씨는 하버드 신학대학원 재학 시절 신입생 학업 상담 조교로 일하면서 얻은 노하우를 모두 쏟았다. 대학에서 작문을 가르치는 친구, 학교에서 멘토로 봉사하는 친구에게 도움도 청했다. 한걸음에 달려와 준 고마운 친구들과 함께 그는 네 아이들의 에세이를 비롯한 입학서류 작성을 도왔다. 그리고 몇 개월 후 네 명의 아이들은 각각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브라운대학교를 비롯해 코네티컷대학교, 몽고메리카운티 커뮤니티칼리지에 입학했다. 교육 분야의 세계적인 사회적 기업인 ‘컬리지 서밋(College Summit)’의 출발을 만든 첫 결실이었다. 친구들은 한 번의 봉사로 여기고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슈람씨는 대학 진학의 ‘시장 격차’ 문제를 고민하며 그 문제 해결을 자신의 삶으로 만들었다. 그의 노력에 아쇼카재단과 스콜재단, 슈밥재단은 각각 2000년, 2006년, 2007년 ‘올해의 사회적 기업가’로 선정하며 화답해줬다. 2010년엔 미국의 국가 봉사 프로그램 조직인 CNCS(Corporate for National and Community Service)로부터 사회혁신펀드를 지원받았고, 오바마 대통령은 노벨평화상 상금 중

“외롭지만 꼭 필요한 사업에 도전… 또 다른 기적이 꽃필 겁니다”

신인숙 하트하트재단 이사장 발달장애 아동 ‘윈드 오케스트라’부모·공무원… 모두 불가능이라 말해5년 동안 연주회만 50~60회 열어 발달장애 아이들로 구성된 ‘윈드 오케스트라’ 얘기를 들은 건 4년 전이었다. 낯선 사람들과 있으면 극도로 예민해지고, 눈조차 마주치기 힘든 아이들이 모여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가능해?’라는 혼잣말 후엔, 곧바로 그 사실을 잊었다. 그 후 2년. 그때 들었던 아이들이 미국에서 공연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무대에 선 아이들의 모습을 동영상을 통해 보곤, 목이 메었다. 훌륭한 공연 뒤에는 눈물 없이는 듣기 힘든 이야기와 고통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곤 또 그 감동을 잊었다. 그리고 두 달 전, ‘윈드 오케스트라’를 만든 하트하트재단의 식구들을 만났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아파도 병원을 갈 수 없고, 배우고 싶어도 책을 읽을 수 없는 아이들에게 태양광 램프를 보내는 사업을 시작한다고 했다. 이 기발한 아이디어와 감각은 누구한테서 나오는 걸까. 하트하트재단의 신인숙(61) 이사장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복지관 운영부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하트하트재단이 설립된 지 22년이 넘었습니다. 처음 만들 때만 해도 종합 사회복지관에 대한 욕구가 높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 재단 사업이 다른 복지관이나 백화점 문화센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만 할 수 있는 사업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의료 사각지대에 집중하자고 결심했습니다.” ―기억납니다. 청각환자 지원 사업이었지요 “청각 환자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지원하는 것과 화상 환자에게 피부 이식 수술비를 지원하는 것, 미숙아 지원 사업 등이 대표적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의료 보험에 해당되지 않아 저소득층에서는

“성공 요인이요? ‘나만의 것’으로 꿋꿋이 밀고 나가세요”

1인 창조기업가들의 재능기부 클래스 지난 19일 일요일 오후, 직장인이 전부 빠져나가 조용해진 여의도의 한 카페에 ‘초대받은’10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였다. 중소기업청과 조선일보 더나은미래가 마련한 ‘1인 창조기업가들의 재능기부 클래스’를 듣기 위해서다. 이날 ‘재능기부’의 주인공은 스타벅스, 커피빈 등 글로벌 프랜차이즈 커피숍 틈에서 맛과 품질을 무기로 성공한 ‘주빈커피’의 송주빈(51) 대표였다. 1999년 대방동의 한 작은 가게에서 종업원 1명과 시작한 그의 커피 인생은 현재 3개의 커피숍과 1개의 로스팅 공장, 종업원 22명을 거느리며 월 매출 2억원을 기록할 만큼 성장했다. “저는 대기업 엔지니어 출신입니다. 해외 출장 기회가 많아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커피를 마셨죠. 마시면 마실수록 매력있는 게 커피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사업을 해보고 싶다 생각했었죠.” 그러던 차에 과장 진급에서 떨어졌다. 그는 그 길로 사표를 쓰고 커피숍을 준비했다. “건물 2층인 이 자리에 커피숍을 열기로 하고 인테리어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공사 시작 이틀 후, 1층에 스타벅스가 들어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주변에서는 다들 공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접으라며 뜯어말렸다. “하지만 상관없었어요. 저는 제 커피에 자신이 있었거든요.” 하루 4시간씩 가게 앞 테니스장에서 커피콩을 볶았다. 좋은 커피의 맛을 내기 위해서는 생두를 볶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연기가 많이 나서 어쩔 수 없이 밖에서 생두를 볶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이 너무 쳐다봐 민망했다”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재능기부 클래스의 또 다른 강사였던 홍대 앞 생면국수 전문점 ‘요기’의 배태진(44) 대표 역시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을 해서 성공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홍익대

“청각장애 학생들의 자신감 회복을 돕고 싶어”

사회적 기업 ‘헤드플로’ 전하상 대표 코넬대 장애지원 프로그램으로 배움에 대한 목마름 해소… 이 시스템을 혼자 누리기 안타까워 사회적 기업 세울 것을 결심했죠 지난주, 영어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한 교실을 찾았다. ‘미래에 하고 싶은 일 5가지’라는 주제로 말하기를 훈련하는 날이었다. 교실 3면을 둘러싼 칠판 곳곳에 학생들은 자신만의 리스트를 적고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보통의 교실 풍경과는 달랐다. 교실 오른편 스크린에 자막처럼 글씨가 계속 올라왔다. 강의 내용뿐만 아니라 심지어 농담까지, 교실 안의 모든 이야기가 올라왔다. 자세히 보니 교실 한쪽에서 보조강사가 모든 내용을 타이핑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말하기를 훈련하면서 갑자기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른다. 지휘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제자리에서 점프도 한다. 바로 청각장애인을 위한 영어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헤드플로(Headflow)’의 교실 풍경이다. 헤드플로는 청각장애인에게 영어 프로그램, 리더십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청각장애인 학생들을 위해 수업에서의 모든 ‘말’을 타이핑해 화면에 띄운다. 강세·억양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학생들을 위해 발을 세게 구른다거나 점프를 높이 하는 것, 지휘를 하거나 그래프를 그려보는 것 등으로 느낌을 설명한다. 이러한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개발한 사람은 본인 스스로도 청각 장애를 갖고 있는 전하상(24·사진)씨다. 헤드플로의 설립자이자 대표이기도 하다. “저 스스로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제대로 배워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청각장애인들이 얼마나 배움에 목말라 있는지 절감할 수밖에 없다”는 전하상씨. 그는 언제부터 안 들렸는지조차 모른다고 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입 모양을 보고 이해하고, 유치원이나 학교에서도 다른

‘따로 또 같이’ 힘 모아 부산 중앙동의 활력 되찾다

‘또따또가’원도심 문화창작공간 “미군 부대에서 시레이션(C-ration)이라고 전투 식량을 담는 박스가 나왔어. 이게 안에 기름종이가 발라져서 비가 안 샜다고. 이 박스랑 판자를 엮어 만든 박스집들이 용두산 공원에 바글바글했다니까.” 부산 중구 토박이 임금칠(64)씨가 전하는 중앙동의 옛 모습은 한 끼 밥벌이를 위해 뛰어다니는 사람의 활력으로 가득찼다. 그 후로도 중구는 “무역이면 무역, 장사면 장사, 안 되는 일이 없었다”고 했다. 중구, 그중에서도 중앙동은 부산 일번지였다. 그랬던 곳도 다른 오래된 도심처럼 쇠락하기 시작했다. “서면 쪽에 호텔이 생기면서 상권이 흩어지기 시작”하더니, 1998년 시청이 이전하면서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다. 1990년대 초반 8만명에 달했던 숫자가 98년 이후에는 5만명으로 줄었다. 빈 건물이 늘어갔다. 이렇게 활력을 잃어가던 중구에 최근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문화 바람’ 덕분이다. 임금칠씨는 지난 9월 어르신 여덟 분과 함께 용두산 공원에서 사진 전시회를 열었다. “14살 때부터 신문 배달하고, 인쇄업을 하면서 맺어온 사진과의 인연이 전시회까지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그것도 평생을 곁에 두고 살아온 용두산 공원에서의 일이다. 어르신들에게 무료 사진 수업을 진행하고 전시회까지 치른 사진작가 프리야 김(39)씨는 지역에서 열리는 조그마한 전시회에 많은 후원이 쏟아져 깜짝 놀랐다고 했다. “중구노인복지회관 후원으로 전시회에 참여하신 어르신들 사진엽서를 1000부씩 만들었어요. 엽서 뒷면에 전시회 소개를 넣었는데 그건 인쇄골목에 계시는 분이 실비로 해주셨어요. 사진 인화비하고 전시회 포스터, 플래카드는 ‘또따또가’에서 제공했죠.” 지난 7월에는 ‘또따또가’에 입주한 몇몇 예술가들이 ‘중앙동 인쇄 골목에 화분을 놓자’는 취지로 자선 콘서트를 열었다. 작업실에서 나와

“10년 후 가장 큰 이슈는 ‘다문화’ 건강한 사회 통합 프로그램 필요해”

한용외 인클로버재단 이사장 기업 사회 공헌과 사회복지 쪽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름이 ‘한용외’ 전 삼성사회봉사단 사장이었다. 삼성재단과 삼성그룹 전체의 사회 공헌을 총괄했던 사람. 될성부른 사람은 확실히 키워주고 보수적인 삼성 조직문화 속에서도 아니다 싶으면 ‘No’라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였다. 하지만 인터뷰는 녹록하지 않았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얘기할 때 사회 공헌은 ‘책임’이 아니라 ‘재량’이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정당을 위한 정치를 하기 때문에 미래를 내다보는 정책이 나오지 않는다고 일갈했다. 무엇보다 인터뷰를 위한 시간 확보가 쉽지 않았다. 사재(私財) 10억원을 기부해 만든 다문화지원재단 인클로버(www.inclover.or.kr) 활동과 사회복지를 주제로 한 박사 논문 집필, 최근 임명된 중앙국립박물관 이사장 역할까지 하느라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쓰고 있었다. 인터뷰는 지난 4일 과천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다문화 캠프 현장과 9일 집무실에서 두 번에 걸쳐 진행됐다. 다문화는 인생 2막을 시작하는 한 이사장에게 큰 화두(話頭)로 보였다. ―다문화 지원재단을 만드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앞으로 5~10년 이후에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이슈가 무엇일지를 고민해보니 다문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문제를 조직적으로 조사, 연구하고 해결하려는 재단이 필요했지요.” ―정부는 물론이고 기업에서도 다문화 프로그램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다문화 프로그램은 한글과 한국 문화를 중심으로 한 주입식 통합 프로그램입니다. ‘한국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고유성을 인정해줄 때 통합 속도가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국의 책을 읽고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통합 프로그램이

평화·화해에 대해 토론… ‘대화’로 허문 불신의 벽

케냐 평화 주도한 자반 아푸두 2007년 12월 27일 열린 케냐의 대통령 선거는 온 나라를 유혈사태의 소용돌이로 밀어넣었다. 개표 과정에서 조작이 있었다는 의혹이 일며, 두달에 걸쳐 1500명이 죽고 30만명이 집을 잃었다. 폭력과 증오의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듯 보였다. 하지만 피를 흘렸던 도심 한가운데서 평화를 위한 재건의 외침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자반 아푸두(30)씨가 2009년 주도한 케냐청년평화회의(Kenya Youth Peace Summit)가 48개 부족의 200명과 함께 포럼을 열고 평화와 화해에 대해 토론하며 갈등이 해결되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분쟁 해결의 주인공으로 손꼽히는 아푸두씨를 지난 18일 부산 인디고 유스북페어 현장에서 만났다. “이웃이 이웃을 죽이고, 친구가 친구를 죽이는 상황들이 펼쳐졌습니다. 아무도 대화를 하려 하지 않은 채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들만이 떠돌고 있었습니다.” 불과 2년 전에 지켜보았던 참상들을 떠올리는 자반씨는 힘든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좀처럼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2007년 12월 30일부터 폭동이 있었습니다. 이 폭동이 격화되던 2008년 초, 주변 친구들과 연속해서 얘기를 나눴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우리가 깨달은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지금 수많은 폭력이 일어나고 있지만, 매우 많은 사람들이 폭력이 멈추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자반씨와 친구들은 케냐청년평화회의(Kenya Youth Peace Summit)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폭력사태가 정점에 달했던 2008년 1월과 2월에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평화를 위한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자반씨와 함께 토론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청년들이 주축이 된 이 모임은 자반이 활동하고 있던 SOS-Childrens Villages라는 NGO는 물론, SOS와

[세계 Top 10 사회적 기업가를 찾아서] ⑥ 인도 ‘베어풋 컬리지’ 벙커 로이 대표

“희망 잃은 주민에 용기 북돋우니 ‘맨발의 기적’ 일어나” 델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차를 타고 장장 10시간을 움직였다. 바로 ‘베어풋 컬리지(Barefoot College)’의 창업자이자 대표인 산짓 벙커 로이(Sanjit Bunker Roy·65)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베어풋 컬리지는 인도의 가난한 시골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고 그 기술과 재능을 개발하도록 돕는 비영리 단체다. 국제구호단체가 전문가들을 파견해 ‘제공’하는 형태였던 기존의 지역사회개발 모델과 달리,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며 결정해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자력으로 개발해 나가도록 돕는다. 이러한 혁신성 때문에, 베이풋 컬리지는 스콜(Skoll) 재단과 슈밥(Schwab) 재단 등 세계적인 기관들로부터 우수한 사회적 기업으로 선정되었다. 올해 초에는 타임(Time)지가 선정한 ‘100명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에도 뽑혔다. 로이 씨가 베어풋 컬리지를 설립한 것은 1971년이다. 지역사회개발에 관심이 있던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가 찾아간 작은 마을, 틸로니아로 왔다. “약 5년간 우물을 파는 기술자로 일했어요. 정말 서툴고 숙련되지 않은(unskilled) 채였죠. 그렇게 5년간 함께 일하고 함께 살면서, 인도의 농촌 마을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일자리를 찾아 농촌을 등지는 청년들, 남겨진 노인과 여성, 아이들은 결국 소득거리가 없어 가난하고 무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머리뿐 아니라, 가슴으로, 삶으로 이해하게 되면서 베어풋 컬리지를 시작했죠.” 지역사회개발이란 존중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그는 “마을을 어떻게 개발할 것인지, 삶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한 지혜는 바로 그 마을에서 살아가는 주민들 스스로에게 있다”며 베어풋 컬리지의 정신을 반복해 강조했다. 그래서 단체의 이름도 맨발의 농촌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고 도우며

[세계 Top 10 사회적 기업가를 찾아서] ⑤ 英 ‘글로벌 에식스’ 창업자 던칸 구즈

“생수 팔아서 아프리카 생명수 끌어올립니다”… ‘One Water’ 브랜드 생수 판매 수익금으로 ‘플레이펌프’ 보급… 英 최고 사회적기업 반열 올라 사회적 기업이 가장 발전한 국가는 영국이다. 그 위상답게 영국에는 사회적 기업의 수가 5만5000개를 넘는다. 사회적 기업의 매출만도 50조원을 넘어, 국가 GDP의 2%, 고용의 5%를 담당하고 있다. 이 5만5000곳 중 올해 영국 기업이사기구(IOD)로부터 의장상을 수상하고, 지난해에는 사회적기업런던(SEL)으로부터 최우수 사회적 기업상을 수상한 기업이 있다. 바로 글로벌 에식스(Global Ethics)다. 철저히 시장 시스템 안에서 경쟁하면서 아프리카 빈곤퇴치에도 기여하는 글로벌 에식스의 노하우를 배워보고자 창업자, 던칸 구즈(Duncan Goose·41)씨를 찾았다. 사무실에서 나와 반갑게 인사하는 구즈씨의 손엔 샌드위치가 들려 있었다. 연속되는 회의 때문에 이렇게 점심을 때운단다. 정부 지원금이나 기부금 하나 없이 치열하게 시장에서 경쟁하는 그의 ‘기업가 정신’이 살짝 엿보였다. 점심시간을 뺏은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려는 찰나, 오히려 그가 적극적으로 질문한다. 한국의 사회적 기업은 어떠한지를. 구즈씨는 마케팅 및 사업기획 전문가였다. 미친 듯 일을 하던 29살(1998년), ‘이 일을 진짜 내가 원하는가’에 대해 스스로 묻기 시작했단다. 한참을 고민해보아도 답을 찾기 어려웠다. 결국 그는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결심했다. 2년간의 여행 경비는 집과 차를 팔아 마련했다. 자아와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그는 일부러 여행자들이 잘 가지 않는 곳들을 찾아다녔다. 지진을 겪기도 하고, 심지어는 총에 맞은 적도, 어느 부족에게 잡혀 경찰의 도움으로 구출된 적도 있다. 구즈씨는 “여행 중 온두라스에서 허리케인을 만난 것이 인생을 바꾼 계기”라고

“상처받기 싫어 관심 차단… 원래부터 무기력한 아이는 없어요”

대안학교 ‘성장학교 별’ 이끌어 가는 김현수 원장 “슬픈 사람들에겐 너무 큰소리로 말하지 말아요. 마음의 말을 은은한 빛깔로 만들어 눈으로 전하고 가끔은 손잡아 주고 들키지 않게 꾸준히 기도해주어요.” 이해인 수녀의 시 ‘슬픈 사람들에겐’의 첫 구절이다. 마음이 아프고 상했을 때, 우리는 다그치거나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조용히 어깨를 빌려주고 손을 잡아주는 가족과 친구가 필요하다. 마음이 아프고 상한 청소년들에게 그렇게 어깨를 빌려주고 손을 잡아주는 학교가 있다. 바로 대안학교인 ‘성장학교 별’이다. “예전엔 불행했는데 지금은 행복하다”는 준혁이(16). ‘성장학교 별’에 다닌 지 1년이 지났다. 왜 불행했는지 물어보자, 학교에서 친구들과의 관계가 힘들었단다. 아직도 준혁이는 그 시절이 편하지 않은지 고개를 돌린다. 상윤이(13)는 “60억명 중의 하나에 불과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스스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법을 배웠다”고 대견하게 말했다. 학부모 김보영(44)씨는 “따돌림 때문에 위축되어 있던 아들 동우(15)가 ‘성장학교 별’에 다닌 후로 밝아졌다”고 했다. “예전엔 너무나 우울하고 무기력한 모습이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밝고 적극적이에요. 수업 발표회 때도 어찌나 씩씩하던지…. 심부름 하나도 싫어하던 애가 요즘은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건 으레 자신의 일로 여겨요.” 학교폭력, 따돌림, 우울증,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등 다양한 어려움과 상처를 품었던 아이들. 이 아이들은 ‘성장학교 별’에서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법, 그 상처를 싸매는 법, 그리고 다른 사람의 상처를 바라보고 어루만져 주는 법을 배우고 있다. ‘성장학교 별’을 시작해 꾸려 나가는 사람은 신경정신과 의사이기도 한 김현수(44) 원장이다. 자신이 어린 시절 겪었던 상처들이, 다른 사람의 상처를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