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4일(일)
혐오를 연대로 바꾼 자원봉사의 힘

[이강현·권미영 대담] 코로나 팬데믹 3년… 자원봉사를 말하다

대규모 봉사는 줄었지만 시민 주도 자원봉사 늘어
모든 시민 ‘책임’ 다해야 공동체 무너지지 않아
팬데믹 활약한 자원봉사 사회적 분위기 전환시켜

코로나 3년. 자원봉사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집합적 형태의 대규모 자원봉사는 줄었지만 시민이 주도하는 ‘비공식 자원봉사’의 영역은 오히려 확장하는 추세다. 착한 가게를 지정해 ‘돈쭐’ 내는 온라인 캠페인을 벌이는 것, 산책을 하며 플라스틱 쓰레기를 줍는 것, 지역의 크고 작은 문제를 고민하는 모임을 만드는 것도 자원봉사에 해당한다.

자원봉사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은 이때, 미국에 있던 이강현(77) 회장이 잠시 입국했다. 우리나라 자원봉사 역사에서는 입지전적 인물이다. 주요 자원봉사 단체와 조직, 제도와 정책이 대부분 그의 아이디어와 기획을 거쳐 탄생했다. 1991년 우리나라 최초의 자원봉사 전문기구인 ‘한국자원봉사연합회’를 만들었고, 1996년 자원봉사관리자 양성을 목표로 하는 ‘볼런티어21(현 한국자원봉사문화)’을 창립했다. 2008년에는 아시아인 최초로 세계자원봉사협의회(IAVE) 회장에 뽑혀 7년간 국제사회의 자원봉사 운동을 이끌었다.

그의 한국 방문을 누구보다 기다린 이가 권미영(56)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장이다. 중앙센터를 이끌면서 고민이 생길 때마다 이강현 회장이 10여 년 전 펴낸 ‘자원봉사의 길’이라는 책을 꺼내 읽는다. 팬데믹 시대에 자원봉사는 어떤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지난달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 회의실에서 이강현 회장과 권미영 센터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무너진 공동체를 회복하는 법

―최근 우리나라 자원봉사의 흐름을 어떻게 보는가.

이강현=자원봉사에는 두 개의 큰 축이 있다. 한 축은 사회복지 차원에서 개인의 어려움을 돌보는 것. 다른 한 축은 시민운동 차원에서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 두 축이 함께 움직인다. 과거 한국에서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회복지 성격의 자원봉사 활동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보다 큰 사회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는 ‘시민운동’ 차원의 자원봉사가 본격화되고 있다.

권미영=1997년 우리나라에 ‘자원봉사관리자 아카데미’라는 게 처음 생겼다. 자원봉사자 교육 과정은 더러 있었지만 ‘관리자’ 과정은 제대로 된 게 없었기 때문에 ‘1기’에 바로 지원했다. 그 아카데미를 만든 게 이강현 회장님이었다. 입학식에서 회장님을 처음 뵈었는데 그때도 ‘시민운동’을 강조하셨다. 민주사회의 시민에게는 권리와 책임이 동시에 주어지는데 책임을 다하는 방법 중 하나가 자원봉사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이걸 듣고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웃음).

―시민운동을 강조한 이유는?

이강현=사회복지 차원의 자원봉사도 꼭 필요하지만 어찌 보면 ‘현상 유지’라고 할 수 있다.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약리학을 전공하고 교수 생활을 하다가 마흔 중반에 자원봉사 운동에 뛰어들게 된 건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사회문제들을 보며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원봉사를 택했으니, 처음부터 사회변화를 목표로 자원봉사를 시작한 셈이다.

―자원봉사를 통해 공동체를 회복한다?

이강현=모든 시민에게는 책임이 있다. 타인에 대한 책임, 사회에 대한 책임, 자연에 대한 책임이다. 사람들이 서로 권리만 주장하고 책임을 이행하지 않을 때 공동체가 붕괴한다. 작은 공동체가 무너지면 더 큰 공동체가 무너진다. 작은 공동체를 보살피고 힘을 키워주는 게 자원봉사다. 자원봉사가 성과를 내고 사회변화를 일으키려면 좋은 관리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아카데미도 개설했다.

권미영=그게 벌써 25년 전이라니. 내가 지금까지 이 영역에서 이렇게 활동하는 건 그때 회장님이 주신 비전 덕분이다. 그 비전에 한발한발 가깝게 가기 위해 노력했다. IAVE 세계 회장으로서 국제사회에도 인사이트를 주셨지만, 한국의 자원봉사가 지금의 시민운동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

―이강현 회장님 프로필 맨 아래에 ‘2018년~현재 버지니아대학병원 자원봉사자’라고 적혀 있던데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계신 건가.

이강현=일주일에 두 번 세 시간씩 병원 안내데스크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방문객을 에스코트하기도 하고, 몸이 불편한 환자가 있으면 휠체어에 태워 데려간다. 방문객이 왔다 간 뒤에는 살균제로 곳곳을 닦아주는 일도 한다. 힘든 건 없다. 내가 좋아서, 신나서 하는 일이다.

한국 자원봉사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강현(사진 오른쪽) 전 세계자원봉사협의회(IAVE) 회장과 권미영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장이 만났다. 코로나 팬데믹 3년, 자원봉사의 역할과 사회적 가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경호 C영상미디어 기자
한국 자원봉사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강현(사진 오른쪽) 전 세계자원봉사협의회(IAVE) 회장과 권미영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장이 만났다. 코로나 팬데믹 3년, 자원봉사의 역할과 사회적 가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경호 C영상미디어 기자

조선의용대도 ‘자원봉사자’였다

―한국 자원봉사 역사를 돌아볼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이강현=’태안’이다. 2007년 12월 허베이 스피리트호 기름 유출 사고로 충남 태안 앞바다가 검게 물들자 전국 각지의 자원봉사자가 이곳으로 집결했다. 사고 당시 태안을 찾은 봉사자가 123만명이나 된다. 바닷가로 떠밀려 온 시커먼 원유를 바가지로 퍼내고 갯바위에 들러붙은 기름을 닦아내는 작업에 참여했다.

권미영=매일 새벽 5시. 서울에서 45인승 버스가 꽉 차서 출발했다. 자원봉사자들은 버스에서 김밥을 먹으면서 환경 교육을 받고 현장에 도착해 작업에 참여했다. 이런 표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죽기 살기로 닦았다.

이강현=전 세계적으로도 이런 사례가 없었다. 기름을 닦던 사람 중에서는 자원봉사자도 있었고 유급으로 고용된 사람도 있었다. 돈 안 받는 사람과 돈 받는 사람 중에 누가 더 열심히 닦을까. 자원봉사자가 더 깨끗하게 닦는다. 온 정성을 다해 닦는다. 유급 고용자들이 열심히 안 했다는 게 아니라 자원봉사자가 더 열심히 했다는 이야기다.

―한국인의 뿌리 어딘가에 자원봉사 유전자가 숨겨져 있는 걸까.

이강현=거슬러 올라가면 ‘홍익인간’의 정신도 자원봉사와 맞닿아 있다. 조선시대의 의병, 독립운동가도 모두 자원봉사자였다. 그게 현대에 와서 민주화 운동, 환경 운동, 문화 운동으로 발전했다. 자원봉사와 시민운동의 경계가 모호한 면이 있지만 시민운동을 하면서 월급 받지 않는 사람들은 다 자원봉사자로 봐도 된다. 자원봉사의 요건인 자발성, 무보수성, 공익성 등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권미영=최근에 자원봉사의 근현대사를 연표로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근대사에서는 동아일보가 일제 식민 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시작한 ‘브나로드’ 운동이 있었다. 전국 규모의 문맹 퇴치 운동이었는데 이것도 넓은 의미에선 봉사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의 독립 무장 부대인 ‘조선의용대’도 자원봉사자들이었다. 조선의용대 기념사진을 보면 영어로 ‘Korean Volunteers’이라고 적혀 있다. 자발적 의지를 가지고 무보수로 참여했기 때문에 이들 역시 자원봉사자다.

팬데믹에 드러난 자원봉사의 가치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자원봉사는 어떤 역할을 했나.

권미영=2020년 1월 말 코로나 상황이 심해졌다. 자원봉사가 필요한 곳도 점점 늘었다. 자원봉사를 멈출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에서 ‘코로나19 현장 대응 지침’을 만들어 2월 18일 전국에 배포했다. 안전하게 자원봉사 할 수 있는 방법을 공유한 것이다. 3월 11일에는 ‘마스크 양보 캠페인’을 시작했다. 마스크를 만들어 나눠주는 ‘마스크 의병’들도 생겨났다. 그러자 인터넷 키워드가 바뀌었다. 2월까지만 해도 죽음, 우한, 걱정, 혐오 등이 가장 많이 검색되는 키워드였는데 자원봉사, 기부, 응원 등의 긍정적인 키워드로 바뀌기 시작했다. 혐오와 불신이 가득했던 공동체가 신뢰와 연대를 되찾은 것이다.

―자원봉사가 사회적 분위기를 전환시켰다는 이야기인가.

권미영=확실히 영향을 미쳤다. 공동체가 어려울 때 빛을 발하는 게 자원봉사다. 수해나 태풍 등 재난이 발생했을 때 직접 자원봉사에 참여하지 못해도 봉사하는 모습만 봐도 엔도르핀이 샘솟는다. 그런 봉사자들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큰 위로를 받는다. 자원봉사는 피해 주민을 위로하는 활동인 동시에 공동체 전체를 위로하는 활동이다.

―어려운 점도 있었을 텐데.

권미영=풀뿌리 자원봉사 조직들이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위축된 점은 너무나 안타깝다.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하며 공동체에 유의미한 역할을 하던 단체들이 동력을 잃어버렸다. 풀뿌리 조직들을 모아 그들이 하던 스킨십 기반의 전통적인 자원봉사를 ‘리빌딩’할 수 있는 토론의 장을 열어보려 한다. 지역의 작은 조직들이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 자원봉사계의 핵심 과제다.

이강현=본래 자원봉사센터의 역할이 풀뿌리 조직을 지원하고 육성하는 것이다. 그들의 역량을 키워 지역의 문제를 풀어낼 수 있게 해야 한다. 지역에 있는 센터가 자원봉사 조직들을 돕고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면,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는 내셔널 캠페인 등 조금 더 큰 차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또 지역 센터들이 겪는 어려움을 조사해 장애물들을 제거해주는 역할도 해야 한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대, 변하지 않는 자원봉사의 본질은 무엇인가.

권미영=자원봉사는 시민성의 표현이고 민주주의의 요소다. 예전에는 자원봉사가 서비스 전달 체계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시민들의 참여 체계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자원봉사가 성과를 내고 사회적 영향력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봉사자들이 좋은 경험을 갖고 민주시민으로 성장하게 돕는 것도 중요하다.

이강현=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게 자원봉사다. 봉사하는 사람도 행복하고 도움받는 사람도 행복하다. 그러므로 정부는 자원봉사를 진흥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국민을 행복하게 만드는 게 정부의 역할이니까.

김시원 더나은미래 기자 blindlette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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