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냐 나이로비 외곽 루이루의 한 공장. 태양광으로 가동되는 생산라인에서 1분에 한 대꼴로 조리용 화덕인 쿡스토브가 만들어진다. 기존 쿡스토브보다 숯 사용량을 40% 가까이 줄이고, 실내 연기는 60% 넘게 감소시킨 제품이다. 이 공장을 세운 케냐 기업 BURN은 2010년 작은 스타트업으로 출발해 지금까지 아프리카 12개국에 500만 대가 넘는 쿡스토브를 보급했다. 현재 케냐에서만 2500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으며, 나이지리아에도 공장을 세웠다. 쿡스토브 생산과 보급을 통해 환경 개선은 물론 고용 창출과 아프리카 내수시장 확대에도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BURN이 최근 몇 년 사이 급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탄소 배출권이 있다.
기후변화 대응은 결국 산업을 바꾸는 일이다. 같은 생산 활동을 하더라도 온실가스 배출이 없거나 적은 설비와 공정으로 전환하는 것이 저탄소 산업으로의 전환이다. 문제는 비용이다. 새로운 설비에 투자하는 데 큰돈이 들고, 기존 설비를 폐기할 때도 비용이 발생한다. 여력이 있는 선진국은 정부 예산과 금융을 통해 전환 비용을 감당할 수 있지만, 개발도상국은 그럴 여력이 부족하다. 개도국의 기후변화 대응이 번번이 자금 문제에 가로막히는 이유다.
이처럼 막힌 자금 조달의 통로를 열어줄 수 있는 것이 탄소 배출권이다. 흔히 탄소 배출권 구매를 기업이 비용을 지불하고 ‘탄소중립’을 달성하는 수단으로만 인식하기 쉽다. 그러나 개도국 입장에서 탄소 배출권은 외부 자금을 통해 산업 전환 비용을 조달하는 통로다. 탄소 배출권을 둘러싼 논쟁은 많지만, 제대로 설계한다면 개도국에 새로운 산업이 뿌리내리도록 돕는 마중물이 될 수 있다.
◇ 탄소 배출권, 개도국 산업 전환의 마중물
대표적인 사례가 태국 방콕의 전기버스 전환사업이다. 2023년부터 방콕의 시내버스 2000대 이상이 태국 기업이 설계하고 생산한 전기버스로 전환됐다. 전기버스는 일반 버스보다 가격이 높아 전환 비용을 충당하려면 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태국의 버스 요금은 최대 25바트로 묶여 있어 기존 요금만으로는 수익을 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스위스 KliK 재단의 국제감축사업이다. KliK 재단은 이 사업을 통해 발행된 국제감축실적(ITMO·Internationally Transferred Mitigation Outcome)을 구매하고, 그 대금은 전기버스와 기존 버스의 총소유비용 차이를 메우는 데 사용됐다. 그 결과 요금을 올리지 않고도 전기버스를 운행할 수 있게 됐다. 태국은 도시의 매연을 줄이는 동시에 전기버스 제조 기반과 안정적인 수요를 확보하며 저탄소 산업으로의 전환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BURN의 방식은 조금 다르다. 고효율 쿡스토브는 기존 제품보다 3~4배 이상 비싸다. 각 가정은 고효율 쿡스토브를 사용하면서 절약한 숯 구매 비용만으로도 몇 달 안에 제품 구매 비용을 회수할 수 있다. 하지만 낮은 소득으로 생활하는 가정에는 초기 구매 비용 자체가 부담이다.
이에 BURN은 고효율 쿡스토브 보급으로 발생하는 탄소 배출권을 선판매하고, 수익의 60%를 소비자 가격 보조에 사용해 일반 가정의 구매 부담을 낮췄다. 가격이 내려가자 시장이 확대됐고, 공장과 협력업체가 새로 들어섰으며 쿡스토브 판매원이라는 일자리도 생겨났다. 공장이 아프리카에 있는 만큼 세금도, 기술도, 숙련된 인력도 아프리카에 남는다. 최근 BURN이 발행한 일부 탄소 배출권에는 품질 인증 마크인 CCP(Core Carbon Principles) 라벨까지 부여됐다. 무결성 논란이 많은 쿡스토브 기반 탄소 크레딧의 신뢰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 탄소 크레딧 선구매가 키운 기후테크 산업
탄소 배출권은 개도국에서 신기술을 활용하는 기후테크 기업의 성장도 뒷받침한다. 2022년 케냐에서 창업한 옥타비아 카본(Octavia Carbon)은 공기 중 이산화탄소를 직접 포집해 땅속에 저장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케냐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동아프리카 대지구대에는 지열발전소가 밀집해 있고, 포집한 탄소를 저장할 수 있는 암반도 있기 때문이다. 옥타비아 카본은 이러한 조건을 바탕으로 나이로비대 출신을 비롯한 현지 엔지니어 40여 명과 함께 장비를 직접 제작하고 있다.
높은 초기 투자 비용은 탄소 제거 실적을 미리 구매하는 ‘선구매’ 방식으로 해결했다. 옥타비아 카본은 시범 설비를 짓기도 전에 유럽과 미국의 탄소 제거 구매사들에 약 110만 달러어치의 크레딧을 선판매했고, 이를 발판으로 500만 달러의 투자를 유치했다. 옥타비아 카본이 케냐에서도 관련 사업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자 벨기에와 프랑스의 스타트업, 스위스의 클라임웍스(Climeworks)도 잇따라 케냐에서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현지에서는 이 지역을 ‘그레이트 카본 밸리(Great Carbon Valley)’라고 부른다. 한 스타트업이 개척한 길을 따라 새로운 산업단지가 형성되고 있는 셈이다.
이 사례들의 공통점은 탄소 배출권 수익이 해당 국가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같은 탄소 배출권을 개발하고 판매하더라도 개발사가 배출권만 발급받고 떠난다면 현지에는 감축설비만 덩그러니 남을 수도 있다. 수익이 어디에, 어떤 형태로 흘러가느냐에 따라 탄소 배출권은 단순한 감축 인증서에 그칠 수도, 한 나라의 산업을 키우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파리협정 제6.4조에 따른 국제감축 메커니즘이 개도국 지역사회와의 편익 공유를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한국 정부는 2035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달성하기 위해 약 2940만~3480만 톤의 국제감축실적을 활용할 계획이다. 이러한 활동은 단순히 한국의 감축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넘어 해당 개도국의 산업을 함께 키우는 일이 될 수 있다.
탄소 배출권, 특히 개도국에서 만들어진 탄소 배출권은 무엇을 남기는가. 비용 효율적인 온실가스 감축 수단을 넘어 그 나라에 새로운 산업이 뿌리내리도록 하는 것. 그것이 탄소 배출권을 제대로 활용하는 길이 아닐까.
유수현 에이티알 주식회사 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