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영리조직들이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설립 당시부터 많은 자본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직접 후원자를 모집하거나, 민간·정부의 공모 사업에 지원하여 재원을 확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초창기부터 많은 수의 개인 후원자를 확보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다수의 비영리조직들은 지원 사업의 도움을 받는다.
초기 자본이 없는 비영리조직이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지원 사업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지원 사업들은 자금 사용 규정이 엄격하다. 직접적인 사업 운영비 외에는 자금을 지출할 수 없다. 모든 돈이 ‘사업 자체’를 위해서만 쓰였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사업을 운영하는 ‘조직 자체’를 위해서는 돈을 쓰거나 투자하기 어렵다.
사실 돈을 배분하는 주체가 애초에 돈의 사용 목적을 그렇게 정했기 때문에 이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자금 제공자는 자신의 돈이 목적 사업에만 쓰이기를 원한다. 하지만 결국 그 사업을 디자인하고 수행하는 것은 비영리조직이다. 비영리조직이 생존하거나 성장하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되면 자금 제공자는 언젠가 ‘돈이 있어도 사업을 수행할 역량 있는 조직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대기업이 ESG 경영의 일환으로 협력업체들의 역량 강화에 투자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대기업이 의뢰한 일감을 겨우겨우 쳐내는 환경 속에서 협력업체가 발전을 모색하기는 어렵다. 협력업체들이 서서히 사라지거나 경쟁력을 잃어가면 산업 생태계가 무너지고 결국 대기업도 타격을 입는다. 그렇기 때문에 대기업이 협력업체의 성장을 돕는 것은 상호 생존을 위한 경영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는 비영리 생태계에서도 이와 같은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지원 사업이 끝난 뒤 비영리조직에게 남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사업을 운영해본 경험이 있는 직원들이 남는다. 이들은 비영리조직의 인적 자산이 된다. 하지만 지원 사업이 연장되지 않거나, 유사한 사업을 따내지 못하면 말이 달라진다. 사업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충당하던 인건비(일반적으로 총 사업비의 10~15%) 또한 사라진다.
더이상 인건비를 줄 수 없기 때문에 해당 직원은 떠난다. 그렇게 조직에 잠시 쌓였던 인적 자산이 휘발된다. 얼마 뒤 새로운 지원 사업에 선정돼도 그 사업 또한 종료되기 때문에 상황은 반복된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면서 비영리조직의 업력은 길지만 인적 자산과 노하우는 쌓이지 않고 리셋되는 답보 상태가 된다.
비영리조직에게 그나마 오래 남는 것은 ‘이러한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트랙 레코드다. 비영리조직은 사업 수행 실적을 홍보 자료로 활용하거나, 이를 기반으로 전문성을 어필해 또 다른 공모 사업에 지원할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 비영리조직의 생존과 성장에 간접적인 도움은 될 수 있어도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사업 수행 이력을 기반으로 유사한 지원 사업에 또 선정된 들 사업 종료 후 조직 내에 물적 자산이나 금융 자산이 쌓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원 사업을 끝마친 비영리조직은 마치 연탄처럼 ‘좋은 일을 수행했다’는 역사 정도를 남기고 떠난다.
물론 비영리조직이 지원 사업이 아닌 다른 곳에서 스스로의 자산을 쌓을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개인 후원자들의 동의를 얻어 후원금의 일부를 조직의 자산으로 쌓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앞서도 이야기했듯 초창기 비영리조직이 유의미한 자산을 축적할 정도로 많은 수의 후원자를 확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미 자본이 형성된(established) 비영리조직들의 상황은 다르다. 이들은 보유한 자산을 운용해서 나온 수익만으로 목적 사업을 수행할 수 있다. 은행에 예치하면 이자가, 부동산에 투자하면 임대수익이 발생한다. 자산은 소진되지 않고 오히려 커져간다. 그렇기 때문에 직원들에게 고용 안정성을 보장할 수 있고 인적 자본의 크기를 계속 키워갈 수 있다. 물론 돈이 아닌 다른 이유로 인적 자본(직원)의 유출이 발생해 잠시 주춤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든든하게 받쳐주는 물적·금융 자산이 있기 때문이다.
◇ 비영리조직이 오래 가려면 자산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큰 결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현실에서 초창기 비영리조직들이 자산을 쌓을 방법은 무엇일까? 이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고민과 실행을 하고 있는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지원 사업의 주체인 중대형 재단이었다. 자산이 없는 비영리조직이 아니라 이미 충분한 자산을 형성한(established) 재단이 왜 이런 변화를 주도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지원 사업의 주체(중대형 재단)와 수행 기관(초창기 비영리조직) 사이 권력 관계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곳은 결국 힘을 가진 쪽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미국의 코러스 재단(Chorus Foundation)은 ‘성공적인 소멸’을 지향한다. 코러스 재단은 보유한 기금을 활용해 비영리조직들의 자산 조성, 토지 매입, 제조 설비 구매, 대출 기금 조성 등 생산 수단 확보를 돕는다. 비영리조직들이 장기적인 재정 안정성을 구축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본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파트너 비영리조직들에게 재단이 가진 경제 권력을 이양하는 것이며, 코러스 재단은 이러한 방식의 소멸을 ‘성공적인 소멸’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코러스 재단의 설립자 파하드 에브라히미(Farhad Ebrahimi)는 SSIR(Stanford Social Innovation Review) 2025 특별호 <Power & Trust>를 통해 ‘성공적인 소멸은 재단이 문을 영원히 닫은 후에도 파트너 조직을 통해 재단의 유산이 오래도록 이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파하드는 ‘가장 중요한 점은 재단이 사라진 후에도 자원 배분이 지속될 수 있도록 공동체가 스스로 자원을 배분할 수 있는 대안적인 인프라 구축에 지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코러스 재단이 보유한 자산과 경제력을 다수의 비영리조직에게 이양하고, 비영리조직들이 안정적이고 주체적으로 생태계의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재단이 소멸한다고 표현했지만 이것은 결코 소멸이 아니며 오히려 영생하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코러스 재단의 정신과 유산이 여러 비영리조직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세상에 발현되기 때문이다.
◇ 권력을 이양 받은 경험
초창기 비영리조직은 자산이 없고 경제력이 없다. 필자가 자립준비청년들에게 안전한 주거지와 교육을 제공하는 비영리조직인 ‘십시일방’을 처음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매년 10명의 자립준비청년을 선발하고 이들에게 장기간 주거지를 마련해주기 위해서는 수억 원에 달하는 전세보증금이 필요했다. 하지만 초창기 비영리조직인 십시일방에게 이러한 큰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필자가 알아봤을 때 월세나 교육 프로그램 등을 지원해주는 사업들은 있었지만, 전세보증금으로 활용될 목돈을 지원해주는 사업은 없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지원 사업들은 ‘기한 내 소진’을 원칙으로 한다. 예를 들어 1년이라는 사업 기간 내 모든 돈을 써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십시일방의 전세보증금은 소진되지 않고 회수하여 계속 사용된다. 누군가 십시일방에 살다가 독립해 나가면, 회수한 전세보증금으로 새로운 사람을 돕는 환류 모델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한 내 소진을 원칙으로 하는 일반적인 지원 사업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필자는 목돈을 마련하지 못해 사업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코러스 재단이 비영리조직의 자산 조성에 기금을 사용함으로써 권력의 이양을 시작한 것처럼, 2021년에 국내 금융회사인 비씨카드에서 십시일방이 전세보증금을 쌓아갈 수 있는 결정을 해주었다. 비씨카드는 사업 운영을 위해 필요한 소모성 재원 뿐 아니라 전세보증금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금을 지원했다.
덕분에 십시일방은 비씨카드의 지원 사업을 수행한 이후 ‘사업 운영 실적’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자산’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해당 자본은 향후에도 비씨카드와 함께 자립준비청년을 위한 주거 지원 사업인 BC십시일방 사업에 활용된다. 십시일방 입장에서는 조직의 소멸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고, 비씨카드는 사회공헌 자금을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환류하여 사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만약 비씨카드의 후원금을 모두 소진하는 형태로 사업을 운영했다면 십시일방은 4년이 지난 오늘도 전세보증금으로 사용할 목돈을 자체적으로 보유하지 못한 조직일 것이다. 그리고 해당 지원 사업이 종료되면 또 다른 소모성 기금을 찾아다니는 일들을 반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전세보증금이라는 자본을 기반으로 비씨카드와 함께 장기적인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조직이 되었다.
이는 필자가 국내에서 경험한 권력의 이양이다. 파하드 에브라히미는 SSIR 2025 특별호 <Power & Trust>를 통해 ‘필란트로피 자금을 집행하는 주체들은 자원을 배분하고, 의제를 설정하며, 전략을 결정하기까지 하는 막대한 권력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 막대한 권력을 개별 비영리조직으로 이양하면 ‘자원 배분 결정력을 가진 비영리조직’, ‘장기적인 전략을 수립하고 미래에 투자하는 비영리조직’의 탄생에 기여할 수 있다.
이호영 임팩트리서치랩 CRO·십시일방 대표
필자 소개 임팩트를 측정·평가하는 전문 기관인 (주)임팩트리서치랩에서 최고연구책임자(CRO·Chief Research Officer)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한양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대학생들에게 지속가능경영과 소셜벤처 창업, 임팩트 측정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학교 재학 시절 취약계층 청년들에게 무료 식권을 전달하는 비영리단체 ‘십시일밥’을 설립했고, 현재는 자립준비청년들에게 무료 주거지를 제공하는 비영리단체 ‘십시일방’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는 사회혁신 생태계의 N잡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