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혁신가의 두 가지 언어] ‘취준생’이라는 취약계층의 등장, 기업이 할 수 있는 일은

올해로 겸임교수 4년 차다. 매 학기 학생들과 어울리며 수업을 넘어선 교류를 이어갔다. 때로는 대학 시절로 돌아간 듯 즐겁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3학년이 되고 취업 시즌이 시작되면, 학생들의 얼굴엔 근심이 드리워진다. 교내 카페에서의 짧은 수다도 사라진다. 웃음보다 침묵이 늘었고, 관계보다 경쟁이 앞선다. 학생들은 친구들과 멀어진 채, 외로운 취업 준비 기간을 보낸다. 대학 커뮤니티에는 이러한 형태의 ‘상실’이 있다. 취업 준비가 시작되면 우리는 서로를 잃어간다. 취업준비생, 이른바 ‘취준생’은 이제 명백한 취약계층이다. 임팩트 비즈니스 전문 조직 임팩트스퀘어는 사회 문제를 ‘구조적으로’, ‘다수의 구성원이’, ‘고통받는 상태’로 정의한다. 취준생은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한다. 고착된 저성장과 끝나지 않는 경기침체로 사회 초년생들의 노동시장 진입은 구조적으로 어려워졌다. 부지런히 문을 두드리지만,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몇 안 되는 인턴 자리를 얻기 위해 또 다른 인턴 경험을 쌓아야 하는 상황은 역설적이기까지 하다. 한 번 인턴십을 경험한 학생들은 이를 바탕으로 두세 번의 인턴을 하며 스펙을 강화하는 반면, 처음 한 번의 기회를 잡지 못한 청년들은 다음의 기회에서도 계속 소외되는 악순환에 시달린다. 이 같은 양극화 속에서 충분한 기회를 경험하지 못한 취준생들은 자신이 영원히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극도의 불안과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일부 청년들은 사회로 나가는 것을 아예 거부하거나, 사회와 단절되는 고립·은둔 상태로 접어들기도 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2023)에 따르면 청년들이 고립·은둔을 하는 원인 1위는 ‘취업 실패(24.1%)’였다. 54만 명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 고립·은둔 청년 중

[사회혁신가의 두 가지 언어] 우리의 성과 지표가 사회의 기대를 저버릴 때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 대부분의 조직은 사전에 성과 지표를 설정한다. 하지만 사업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현실은 예상과 다르게 전개되기 마련이다. 사람들의 상황이 변하고, 기획 단계에서 고려하지 못했던 새로운 요구가 생긴다. 이때 사업 담당자는 기존의 성과 지표보다 사회적으로 더 중요한 지표를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표 변경이 어려운 환경에서는 새로운 사회적 요구보다 기존 지표를 따를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임팩트 창출의 골든타임을 놓치는 일도 일어난다. 조직이 사전에 설정한 지표를 유연하게 바꾸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절차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자금 제공자나 관리 기관의 승인을 받은 성과 지표는 단순한 목표를 넘어 사실상 계약과 같다. 성과 지표와 연동된 예산을 변경하는 것은 계약서를 다시 쓰는 수준이라 많은 양의 서류 작업과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승인 절차가 오래 걸려 변화에 즉각 대응하기 어렵다는 것도 문제다. 이 때문에 사업 담당자는 새로운 지표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변경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사전에 설정된 성과 지표를 준수하는 것은 중요하다. 사업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에게 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기대하고 들어온 바가 있는데, 갑자기 지표가 변경되어 지원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는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일 것이다. 따라서 사업의 기본적인 지표는 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기존 지표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목표가 생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변화하는 환경, 변하지 않는 성과 지표 비영리단체 ‘십시일방’은 보육원 등에서 자란 자립준비청년(보호종료아동)들의 자립을 돕는 단체다. 십시일방은 매년 10여 명의

이호영 임팩트리서치랩 CRO·십시일방 대표
[사회혁신가의 두 가지 언어] 비영리조직들이 ‘비영리 대행사’로 남지 않으려면

비영리조직들이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설립 당시부터 많은 자본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직접 후원자를 모집하거나, 민간·정부의 공모 사업에 지원하여 재원을 확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초창기부터 많은 수의 개인 후원자를 확보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다수의 비영리조직들은 지원 사업의 도움을 받는다. 초기 자본이 없는 비영리조직이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지원 사업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지원 사업들은 자금 사용 규정이 엄격하다. 직접적인 사업 운영비 외에는 자금을 지출할 수 없다. 모든 돈이 ‘사업 자체’를 위해서만 쓰였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사업을 운영하는 ‘조직 자체’를 위해서는 돈을 쓰거나 투자하기 어렵다. 사실 돈을 배분하는 주체가 애초에 돈의 사용 목적을 그렇게 정했기 때문에 이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자금 제공자는 자신의 돈이 목적 사업에만 쓰이기를 원한다. 하지만 결국 그 사업을 디자인하고 수행하는 것은 비영리조직이다. 비영리조직이 생존하거나 성장하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되면 자금 제공자는 언젠가 ‘돈이 있어도 사업을 수행할 역량 있는 조직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대기업이 ESG 경영의 일환으로 협력업체들의 역량 강화에 투자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대기업이 의뢰한 일감을 겨우겨우 쳐내는 환경 속에서 협력업체가 발전을 모색하기는 어렵다. 협력업체들이 서서히 사라지거나 경쟁력을 잃어가면 산업 생태계가 무너지고 결국 대기업도 타격을 입는다. 그렇기 때문에 대기업이 협력업체의 성장을 돕는 것은 상호 생존을 위한 경영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는 비영리 생태계에서도 이와 같은 전환이

이호영 십시일방 대표
[사회혁신가의 두 가지 언어] 임팩트 오마카세

오마카세의 사전적 정의는 손님이 주문할 음식을 가게의 주방장에게 일임하는 것이다. 주방장은 손님의 취향, 알레르기, 포만감 등을 고려하여 알맞은 음식을 내어준다. 정해진 메뉴를 제공하는 일반 음식점과 비교했을 때 오마카세는 손님에게 맞춤형 다이닝 경험을 제공한다는 특징이 있다. 임팩트를 창출하는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것을 이에 대입해 보았다. 먼저 일반 음식점처럼 사전에 정해진 제품·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이 있을 것이다. 이 방식은 균질한 제품과 서비스를 많은 사람들에게 스케일업(scale-up)하여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른 방식은 오마카세처럼 상대방의 상황에 적합한 제품/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방식은 개인 맞춤형 제품과 서비스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스케일딥(scale-deep)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필자는 각각의 특성을 띤 서로 다른 2개의 비영리단체를 설립하고 운영해 본 경험이 있다. 하나는 ‘십시일밥’이고 다른 하나는 ‘십시일방’이다. ◇ 십시일밥, 사전에 정해진 것을 제공하는 ‘일반 음식점형’ 십시일밥은 취약계층 대학생들에게 식권을 무료로 제공하는 일을 한다. 학교마다 다르지만 취약계층 대학생 1명당 약 20~30장의 식권을 전달한다. 필자가 대표로 있던 기간 동안 약 10만 장의 식권을 전달했으니, 중복 인원을 제외하더라도 2000여 명의 취약계층 대학생에게 도움이 전달되었다. 하지만 누군가 ‘십시일밥 식권을 받는 사람들의 삶이 변했나요?’라고 묻는다면 필자는 ‘식권을 신청하신 분들께 식권을 보내드렸을 뿐, 그분들의 삶에 깊이 있는 변화를 일으켰다’고 까지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한 사람의 고된 삶이 식권 몇장으로 인해 나아질 수 없다. 한 끼 식사 걱정을 더는 것 외에 그가 겪을 수많은 어려움이

이호영 임팩트리서치랩 CRO·십시일방 대표
[사회혁신가의 두 가지 언어] 영리와 비영리의 경계가 명확해져야 하는 순간

필자가 한양대학교에서 가르치는 강의 중 하나는 ‘사회적 기업가 정신’이다. 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사회 문제 해결 아이디어를 도출하는 팀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중요한 점은 그 아이디어가 ‘수익 모델에 기반한 지속가능한 모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수업을 들었던 학생에게 연락이 왔다. 필자에게 연락이 온 학생은 사회적 가치를 접목한 창업을 준비하고 있는 학생이었다. 자신이 초기 창업 자금을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 명확한 수익 모델이 없어서 고배를 마시고 있다고 했다.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창업 아이디어의 사회적 가치는 충분했다. 하지만 해당 아이디어에 수익 모델을 접목하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다른 예시지만 일하기 어려운 정도가 심한 장애인들의 사회 참여를 돕는 일, 부모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어린아이들에게 교육을 제공하는 일 등이 사업 대상자의 특성상 수익 모델을 가지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다. 학생의 아이디어도 위와 같은 맥락이었기 때문에 단체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전부 자체적인 수익 모델을 통해 조달하겠다는 접근보다는, 해당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로부터 기부금을 받는 등의 방법을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럼에도 학생은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수익 모델을 떠올리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필자는 학생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필자가 만약 수업을 들은 학생들로 하여금 ‘수익 모델이 있어야만 지속가능한 사회혁신이다’라는 확고한 믿음을 갖게 했다면 그것은 필자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으며, 수업의 메시지가 잘못 전달되고 있음을 의미했다. ◇ 나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이호영 십시일방 대표
[사회혁신가의 두 가지 언어] 우리에게는 새로운 선발 기준이 필요합니다

필자가 운영하는 비영리단체 ‘십시일방’은 아동보호시설 등에서 거주하다 만 18세가 되어 홀로서기를 시작한 자립준비청년에게 주거와 교육을 제공하는 일을 한다. 서류와 면접 심사를 통해 매년 10명의 자립준비청년을 선발하는데, 사업 초기에 아래의 선발 기준을 적용했다. ‘자립 계획’과 ‘성장 가능성’에 60점이나 배점하니 이미 자신만의 계획이 확고하고 성장 궤도에 오른 청년들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다시 말해 굳이 십시일방이 아니어도 어차피 알아서 잘했을 청년들일수록 선발의 우선순위를 가져가는 것이다. 이렇게 선발된 청년들은 역시나 알아서 잘했고, 나는 그들이 낸 성과를 잘 정리해 대외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서 좋았다. 기부자분들께도 ‘여러분이 후원해 주신 돈으로 이렇게 좋은 결과를 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선발된 자립준비청년 모두가 ‘어차피 잘했을’ 청년들은 아니었다. 사업 초기에는 십시일방이라는 단체의 인지도가 낮아 지원율이 1대 1에 불과했다. 그래서 심사 점수가 낮은 청년까지 선발됐다. 이들은 알아서 잘하는 청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는 이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났고 이 청년들의 삶 또한 많이 좋아졌다. 나는 이들에게 나타난 변화야말로 ‘십시일방’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중대한 변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듬해부터는 십시일방 사업의 지원자가 많아져 경쟁률이 3대 1까지 치솟았다. 지난번과 동일한 심사 기준을 적용했는데 지원자가 많다 보니 높은 점수를 받은, 어차피 잘할 것 같은 청년들 위주로 선발이 마무리됐다. 덕분에 취업, 진학 등 대외적으로 공표할 만한 성과는 충분히 얻었다. 다만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이런 의문이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