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학대 예방체계, 이대로 괜찮은가](1) 전국 아동보호전문기관 전수조사
작년 12월, ‘아동학대 범죄 및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하 아동학대 특례법)이 제정됐다. 울산에서 계모의 학대로 갈비뼈 16대가 부러져 사망한 ‘울주군 서현이 사건’이 계기가 됐다. 2000년 아동학대 예방 사업이 시작된 지 13년간의 숙원 사업이 풀린 셈이다. 아동학대 사건에 개입할 법적 기반은 확보됐지만, 과연 대한민국 아동보호 체계는 바뀌게 될까. 조선일보 더나은미래는 오는 9월 아동학대 특례법 시행을 앞두고 아동학대 예방정책을 긴급 점검해봤다. 편집자 주
“사실 인터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와 서현이를 돌봐주던 상담원, 많은 분에게 이 사건은 여전히 큰 아픔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당시 서현이 사례 상담 팀장이었던 김지수(가명)씨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사건 발생 3년 전인 2011년 5월 13일, 포항 아동보호 전문기관에서 상담팀장으로 근무하던 김씨는 “동네 유치원에 다니는 한 아이의 몸에서 멍이 발견됐다”는 신고 전화를 받고 상담원 2명을 현장에 파견했다. 긴 옷 차림의 서현이 옷을 벗기자 발바닥, 배와 등에 심한 멍 자국이 발견됐다. “학대 행위자였던 박씨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자신의 행위가 학대인지는 몰랐다고 말했지만, 폭행 사실은 순순히 인정하면서 앞으로 절차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했습니다.”
5일간 현장 조사와 면담을 마친 뒤, 아동보호전문기관은 전체 회의를 소집해 서현이를 ‘원가정에서 보호하되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서비스 개입을 진행하자’고 결정했다. 사례를 전담하는 상담원으로는 A씨가 선정됐다. “직접 현장조사를 했던 터라 서현이 사례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일을 하더라고요.” 이후 두 달 동안 가해자인 박씨(13회)와 친아버지(1회), 유치원 교사를 통한 모니터링(6회) 등 20차례 상담이 이어졌다. 김씨는 “온몸에 있는 멍자국을 비롯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서현이와 상담원이 병원을 방문해 소견서를 받았으며, 박씨의 동의를 얻어 심리 치료 계획도 수립했다”고 말했다. 물론 전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서현이의 친아버지는 기관의 개입 사실에 상당한 거부감을 표현했다고 한다. 다행히 긍정적인 징후가 여기저기서 발견됐다. 긴 옷과 바지만 입고 유치원에 다니던 서현이가 치마를 입기 시작했으며, 박씨도 상담 과정에서 “아이와 함께 여행을 가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아동보호전문기관의 개입을 거부하면서 비극이 시작됐다
7월 22일, 가해자 박씨는 “새 출발을 하고자 한다”는 말을 남기고 서현이와 함께 인천으로 이사를 갔다. 포항 아동보호전문기관은 25일 인천 아동보호전문기관에 그간의 자료를 정리한 사례 이관 안내 공문을 발송했다. 인천에선 다음 날 회의를 열어 상담원을 지정하고 박씨에게 상담 및 가정방문을 권유했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했다. 일주일 뒤 지정 상담원이 다시 연락했으나 그녀는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다. 김씨는 “당시만 해도 학대 행위자가 거부하면, 아동보호전문기관이 강제로 개입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다”면서 “1년에 걸친 심리 치료와 양육 상담 계획이 예정대로 진행됐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현이를 향한 박씨의 학대도 재발했다. 포항 아동보호전문기관의 마지막 개입 후 약 6개월이 지난 2012년 1월, 서현이는 ‘상세 불명의 두개골 내 손상’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3월에 울산 울주로 이사를 간 뒤에는 상황이 더욱 악화돼 5월에는 대퇴부 골절, 10월에는 양쪽 손과 발에 각각 2도 화상을 입었다. 박씨는 이에 대해 각각 “아이가 학원 계단에서 넘어졌다” “샤워하다가 실수로 화상을 입었다”고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주변의 무관심과 아동보호전문기관 개입의 부재 속에서 서현이는 1년 뒤 싸늘한 죽음을 맞이했다.
사건이 매스컴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자 상담원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특히 A씨는 상처가 너무 큰 나머지 현재 휴직 후 심리 치료를 받고 있다. “사건 발생 후 진상조사위원회에서 A씨를 만났었는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더라고요. 선임으로서 아이와 직원을 함께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은 가슴 한구석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김씨가 씁쓸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울주군 서현이 사건’ 그 후 6개월…
법만 통과되고 인프라 예산 0원
상담원 1명당 연간 58건 사례 맡아
출동하는 경찰 아동학대 인식 꼴찌
◇법원과 경찰의 사례 개입 명시… 현장은 “실효성 없는 법 조문으로 끝날 가능성 높아”
서현이 사건이 발생한 지 2개월 후, 아동학대 특례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지난 2월 28일에는 정홍원 국무총리 주재로 제5차 아동 정책 조정위원회를 열어 ‘아동학대 예방 및 피해 아동 조기 발견·보호 종합 대책’을 심의·확정했다. 주 내용은 ▲아동학대 처벌이 강화되고(아동학대 치사 시 최대 무기징역) ▲신고 의무자 대상을 늘리고 신고 의무를 강화하며(과태료 500만원) ▲신고 접수 시 아동보호전문기관 직원과 사법경찰이 같이 출동하고 ▲검사가 학대 여부를 판단·조사 후 기소유예 결정을 내리는 것 등이다. 전문가들은 “이제 아동학대 문제를 더 이상 복지 서비스로 접근하지 않고, 범죄로 인식하게 됐다는 게 가장 큰 변화”라고 설명한다. 특례법 소관 부처 또한 법무부 관할이다.
과연 현장 반응은 어떨까. 더나은미래가 중앙 아동보호전문기관의 협조를 얻어 지난 24일부터 2주일 동안 전국 아동보호전문기관 50곳 중 47곳(지자체 운영 3곳 제외)을 대상으로 ①서면 인터뷰 ②설문 조사 ③기관장 인터뷰를 통해 전수(全數)조사한 결과, “실효성 없는 법 조문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아동학대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인프라’에 대한 지원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아동보호전문기관 47곳 상담원들의 업무량을 조사한 결과, 상담원 한 명당 무려 58건에 달하는 아동학대 사례를 맡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한 해 동안 새롭게 신고받은 사례는 평균 37건, 여기에 누적 사례와 사후 관리 사례까지 포함한 수치다. 미국과 같은 아동 선진국에선 아동학대 기관 상담원 한 명당 연간 10명 내외로 규정한다.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에 따르면, 아동학대 사례가 종결될 때까지 걸리는 평균 기간은 231.5일이다. 현장 조사(3.5일)와 사후 관리(90일)까지 포함하면 1년 정도 걸리는 셈이다. 지역의 한 아동보호전문기관에서 근무하는 상담원 B씨는 “한 여아는 분리 보호와 심리 치료부터 시작해 학습 지원과 의료 지원, 대학 진학까지 10년 가까이 걸린 적도 있다”고 말했다. 경상 지역 아동보호전문기관 관장은 “상담원들 업무가 가중되다 보니 강제로 업무를 종결시키게 하기도 한다”면서 “현 사례 관리 업무와 행정 업무, 거기에 특례법 개정으로 추가될 업무를 담당하기엔 턱없이 열악하다”고 했다.
47곳 중,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서 운영하는 7곳은 행정 업무를 전담할 인력을 1명씩 두고 있었으나, 대부분은 사례 상담사가 행정 업무까지 병행해야 한다. 그러나 특례법 시행을 위해 책정된 2014년도 예산은 0원이다. 지난 2월, 보건복지부에서 신고 의무자 교육을 위해 요청한 125억이 기획재정부와 예산협의과정에서 전액 삭감됐기 때문. 내년도 재정안 예비협의에서 보건복지부가 아동보호 예산 436억을 증액 요청한 것도 전액 삭감된 건 마찬가지다. 특례법 제정 후 ‘호언장담’하던 정부가 정작 예산 지원은 못 하겠다는 상황이다.
◇손으로 얼굴 때린 행위… 경찰 46%는 “아동학대 아니다”
현장 상담원들은 아동학대 특례법 시행과 관련, ‘학대 피해 아동을 보호할 근거가 강화됐다'(27%), ‘학대 행위자에게 직접 개입해야 하는 거부감이 해소됐다'(13%)며 기대감을 엿보였다. 그동안 민간기관으로서 아동학대 가해자들의 협박과 위험에 노출된 부담을 덜게 된 데 따른 반응이었다. 하지만 ‘법원, 경찰, 검찰 등 공조기관 종사자에게 아동학대 인식 및 예방교육 강화가 필수적으로 시행돼야 한다'(16%)는 답변이 매우 높아, 사법기관과 공조할 때 학대 판정이 소극적이 될 것에 대한 우려도 엿보였다.
실제 이화여대 노충래·정익중 교수팀(사회복지학)이 여성·아동 전담 검사 51명, 판사 54명, 여성청소년계 경찰관 85명 등 190명을 대상으로 ‘법 집행담당자의 아동학대 인식 조사 결과’ 법 집행자의 아동학대 인식이 일반인보다 낮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이 중 경찰의 민감도가 가장 약했다. 일례로 손으로 머리, 얼굴 등을 때린 행위에 대해 판사는 85%가 이를 아동학대로 인식했고, 검사는 70%, 경찰은 54%만이 아동학대로 인식했다.
1998년 친아버지와 계모가 딸을 굶겨 죽인 뒤 집 앞마당에 묻고, 당시 5세였던 남동생 영훈(가명)이를 학대했던 ‘영훈이 남매 사건’은 2000년 아동복지법 전면 개정 및 아동보호전문기관 설립으로 이어졌다. 14년이 흐른 지금, 어렵게 마련된 아동학대 특례법이 ‘빈껍데기’ 법안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한 실효성 있는 정책 대안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