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토)

돌봄보다 서류가 먼저… 탁상 행정에 밀려난 아이들

문턱 높아진 지역아동센터

경기도 안양에 살고 있는 김정우(가명·8)군은 오후 2시쯤 학교를 마치면, 혼자 운동장을 배회한다. 작년엔 지역아동센터에서 공부도 하고 친구도 만났지만 올봄 이후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여섯 살 난 여동생을 혼자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린이집 하원시간인 오후 5시에 맞춰 동생을 찾은 후, 저녁 9시까지 퇴근하는 엄마를 기다린다. 남매가 안쓰럽지만 엄마는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야간 근무를 자청하고 있다. 따로 사는 아빠는 최근 생활비마저 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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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기사 본문과 관련이 없음. /조선DB

 
엄마는 야간근무를 늘리면서 김군을 따라 동생도 지역아동센터에 등록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올해부터 지역아동센터 이용아동 기준이 초~중학교 중심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동생을 보낼 만한 야간 어린이집을 찾아봐도 주변에는 없었다. 결국 정우는 동생을 위해 지역아동센터에 가는 대신 몇 시간씩 길거리를 헤매기로 했다.

최근까지 정우를 돌봤던 안양시 A지역아동센터장은 “조건에 맞지 않으니 도움이 필요한 남매 사이를 떨어뜨려 놓으라는 게 무슨 돌봄 제도인지 모르겠다”면서 “변경된 기준 때문에 돌봄을 받아야 할 아이들이 오히려 거리를 헤매게 됐다”고 전했다.

◇돌봄 필요해도 소득·나이기준 맞춰야…더 어려워진 돌봄 서비스

‘지역아동센터’ 이용아동 기준이 강화되면서 피해를 보는 아동들이 생겨나고 있다. 지난 1월 말 배포된 보건복지부의 새 지침에 따르면, 올해부터 센터에 신규 등록하는 아동은 ▲소득(중위소득 100% 이하, 4인 가구 기준 월 소득 439만원) ▲연령(초~중학교 중심, 농어촌인 경우 미취학 아동 포함) ▲돌봄의 필요성 등 3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해야한다. 작년과 비교해 문턱이 한층 높아졌다. 이전까지는 별도의 연령기준 없이, 우선보호아동(기초생활수급가정 및 차상위계층가정 자녀) 비율만 60% 이상으로 유지하면 서류상 요건에 미치지 못하는 아동도 센터에 갈 수 있었다.

전국의 지역아동센터는 4000여개, 이용 아동 수는 10만8900여명(전국지역아동센터실태조사보고서, 2014). 이 중 14% 이상이 변경된 기준과 충돌한다. 이미 센터를 이용하고 있는 미취학아동(3500여명), 고등학생(4000여 명)을 비롯해 최소 1만5000명은 ‘원래 돌봄 서비스를 받아선 안 되는 대상’이란 얘기가 된다.

현장에선 “아동의 사정이 모두 다른데, 서류 기준만으로 센터 이용을 제한한 건 탁상행정”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A지역아동센터장은 “김군의 경우 월소득 200만원 미만의 별거가정이어서 엄마가 꼭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데, 갑자기 여동생을 야간 어린이집에 보내려면 아이 혼자 버스로 세 정거장을 오가야 한다”며 “담당 공무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예외 인정을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원래 기준이 그런 것을 어떡하냐’면서 이런 상황은 전혀 참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중위소득 100%를 초과하는 가정의 자녀가 무조건 배제된 것도 문제다. 부모의 소득이 높다고 해서 돌봄 서비스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라도 익산에서 최근까지 지역아동센터를 이용했던 정현수(가명·18)군은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에 속했지만, 아버지의 방임과 새어머니의 학대 속에 방치돼온 케이스다. 새어머니의 가혹행위로 정신장애 판정까지 받은 정군은 담임선생님의 의뢰로 센터에 등록,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지속적인 돌봄 서비스를 받았다.

익산 B지역아동센터장은 “소득기준으로만 돌봄 필요성을 판단할 경우, 현수 같은 아이는 극단적 위기에 놓일 때까지 방치될지도 모른다”면서 “지역사회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전문가가 돌봄 필요성을 판단할 수 있는 여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전국지역아동센터협의회_온프렌즈_사진_지역아동센터_블러처리_2016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 아동권리과 관계자는 “복지 재원이 한정돼 있는 만큼 원칙을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면서 “예외규정이 있어서 기준에 미달해도 해당 공무원에게 신청서를 내면 자체 확인절차를 거친 후 돌봄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고 해명했다.

시·군·구청장이 승인할 경우, 센터를 이용할 수 있는 예외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효성은 의문이다. 행정 담당자가 이미 세워진 복지부 기준을 근거로 반려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김순구 전국지역아동센터협의회 정책위원장은 “현장 목소리 한 번 듣지 않고 바꿔버린 이용아동기준이 진짜 돌봄을 위한 것인지 행정상의 편의를 위한 것인지 의문”이라면서 “아이에게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만 확인되면 소득이나 연령 등의 기준에 관계없이 센터를 이용할 수 있도록 열어둬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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