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한국형 기본소득 어디까지 왔나
양극화 심화·산업구조 변화…
해결책으로 떠오른 ‘기본소득’
정치권도 여야 막론 기본소득 공들여
진보 “기존 복지 유지·확대해 도입을”
보수 “복지 정책 통폐합해 지급해야”
“한국은 ‘기본소득’(Basic Income)에서 세계적 모범 사례가 됐고, 앞으로도 모범 사례를 제시할 것이다.”
지난 4월 28~30일 경기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2021 대한민국 기본소득 박람회’. 200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박람회의 기조연설을 맡은 조셉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한국형 기본소득’에 대해 이같이 평했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특히 경기도에서 진행 중인 청년 기본소득 프로그램을 좋은 사례로 들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수천명 규모의 기본소득 실험이 이뤄지고 있지만, 경기도에서는 만 24세 청년 17만명을 대상으로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기본소득은 모두에게 지급되는 보편성이 핵심인 만큼 대규모 실험을 통해 타당성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본소득 실험에 해외 연구자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기본소득제는 1960년대부터 서구 국가들을 중심으로 논의된 정책 의제다. 학계에 따르면 ▲무심사 지급을 통한 ‘무조건성’ ▲집단 모두에게 지급되는 ‘보편성’ ▲지속적으로 지급되는 ‘정기성’ ▲가구가 아닌 개인에게 지급되는 ‘개별성’ ▲현금으로 지급되는 ‘현금성’ 등이 기본소득의 5대 원칙이다. 한마디로 전 국민에게 무조건 지급하는 현금성 소득을 뜻한다. 한국에서 기본소득 논의가 본격화된 건 10년도 되지 않았지만, 국내 상황에 맞게 적절히 도입되고 연구되면서 세계적으로 의제를 선도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기본소득에 관한 연구를 꾸준히 진행 중인 민간독립연구소 LAB2050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3월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기본소득제에 대한 찬성 의견은 61.8%로 집계됐다. 전년 5월의 57.4%에 비해 4.4%p 늘어난 수치다. 여론이 좋아지면서 정치권에서도 여야(與野)를 막론하고 기본소득 정책에 공을 들이는 분위기다. ‘기본소득 전도사’로 불리는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이슈를 선점하면서 초반에는 진보 진영의 정책으로 눈길을 끌었지만,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해 위원장직을 맡으며 국민의힘 ’10대 정책’ 1번으로 기본소득을 올리면서 보수 진영이 본격적으로 합류했다. 기본소득이 내년 대선까지 정책 의제로 주요하게 다뤄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서구에서는 보수 정당이 이끌어
우리나라와 달리 서구에서는 보수 정당을 중심으로 기본소득 논의가 이뤄졌다. 미국의 대표적 보수학자로 불리는 밀턴 프리드먼이 지난 1962년 ‘부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를 꺼내들면서 기본소득 논의가 시작됐다. 프리드먼은 기존의 사회복지제도를 모두 철폐하고 부의 소득세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장 질서 유지와 국가 운영의 효율성을 이유로 들었다. 프리드먼의 주장은 1970년대 전후 유럽으로 전파됐다. 다만 당시 유럽은 이미 복지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기에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지는 않았다. 높은 수준의 사회안전망을 갖추고 있어서 기본소득 도입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게 학자들의 설명이다. 이후 1979년 영국에 ‘대처 체제’가 들어서면서 신자유주의 깃발을 들어 올리게 되고, 보수 진영에서 프리드먼의 주장을 이어받아 기본소득 논의를 이어갔다.
전 세계에서 기본소득을 맨 처음 도입한 곳은 미국 알래스카다. 풍부한 석유 자원을 가진 알래스카는 석유를 팔아서 벌어들인 수입으로 영구 기금을 설립했다. 1982년부터 이 기금으로 6개월 이상 거주한 모든 주민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있다. 학계가 내세우는 기본소득 5대 원칙을 모두 만족시키는 형태다. 알래스카의 기본소득 도입 이후 전 세계 각지에서도 실험이 이어지고 있다. 2008~2009년 아프리카 나미비아 일부 지역, 2011~2012년 인도 마디아프라데시에서 기본소득 실험이 진행되기도 했다.
핀란드는 2017년부터 2018년까지 정부 차원에서 기본소득 실험을 진행했다. 25세부터 58세까지 전국에서 임의로 선정한 실업자 2000명에게 매월 560유로(약 72만원)를 2년간 지급하고 효과를 검증하는 방식이었다. 핀란드 사회보건부가 지난해 5월 발행한 기본소득 실험 최종 보고서에 따르면 ▲고용 촉진 ▲행복감 고취 ▲타인에 대한 신용과 신뢰 향상 등에서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에는 캐나다에서 기본소득 실험이 진행 중이다. 지난해 6월 앵거스 레이드(Angus Reid) 연구소가 캐나다인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59%의 캐나다 국민이 기본소득을 찬성했다. 이곳에서는 진보 성향의 신민주당이 지속적으로 기본소득 도입을 촉구하는 가운데 보수 성향의 자유당도 화답하는 모습이다. 캐나다 CBC에 따르면, 자유당 대의원들은 지난 4월 진행된 정책 총회에서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냈다. 캐나다 의회 예산담당관은 “기본소득 도입으로 캐나다의 빈곤율을 1년 만에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형 기본소득, 진보가 만들고 보수가 가세
우리나라의 기본소득 정책 논의도 캐나다와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다. 진보 진영이 문을 열고 보수 진영이 가세해 판을 키우는 형태다. 진보 진영은 기존의 복지 정책을 유지 혹은 확대하면서 기본소득 도입이 가능하다는 입장이고, 보수 진영은 기존의 현금성 복지 정책을 통폐합해 기본소득으로 지급하자는 주장이다. 전자는 ‘증세’가 기반이다. 후자는 증세 없는 기본소득을 목표로 한다.
기본소득이 국내에서 주요 정책 의제로 등장한 것은 2015년이다. 당시 성남시장이던 이재명 지사는 시에 3년 이상 거주한 19~24세 청년들을 대상으로 연 100만원의 지역화폐를 지급했다. 청년 모두에게 무조건적으로 지급했기 때문에 ‘수당’이 아닌 ‘배당’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사실상 한국의 첫 기본소득 실험이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경기도지사가 된 이후에는 ‘청년 기본소득’을 도입, 증세 없이 도내 24세 청년 17만명에게 연간 100만원의 청년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있다. 이 지사가 구상하는 기본소득은 국민 모두에게 1인당 연간 600만원을 지급하자는 것이다. 다만 증세가 필요한 만큼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자는 설명이다. ▲일반예산을 절감해 증세 없이 1인당 연 50만원 지급 ▲조세 감면을 축소해 연 100만원 지급 ▲증세를 통해 연 600만원 지급 등의 과정을 단계적으로 거치자고 제안했다. 장기적으로는 연 300조원이 소요되는 그림이다.
지난해 ‘기본소득 1호 법안’을 대표 발의한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도 진보 진영의 대표적인 기수다. 법안의 핵심 내용은 2022년부터 매월 30만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2029년에는 매월 50만원 정도를 지급하자는 것이다. 30만원을 지급할 때는 증세 없이 가능하지만, 50만원을 지급하려면 증세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조 의원은 이를 위해 연 311조원의 예산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전 국민 60만원 기본소득 지급을 위해 만들어진 기본소득당의 용혜인 의원은 목적세(기본소득 토지세·탄소세)를 도입해 고소득자 중심으로 세금을 더 받아 예산을 마련하겠다고 설명한다. 용 의원의 계산대로라면 연 380조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보수 진영에 기본소득의 불씨를 당긴 김종인 전 위원장은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던 2016년부터 기본소득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그는 민주당 비대위 대표로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 나서 “불평등과 격차를 해소하는 방법의 하나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김종인 전 위원장을 필두로 김세연 전 국민의힘 의원, 윤희숙·김웅 국민의힘 의원 등이 기본소득 정책을 내놓고 있다.
김세연 전 의원은 김종인 전 위원장과 마찬가지로 2016년부터 기본소득에 관심을 가져왔다. 20대 국회 당시 초당적 연구 모임 ‘어젠다 2050’을 이끌며 기본소득에 대해 공부했다. 김세연 전 의원은 ‘3단계 시나리오’를 주장한다. 1단계는 월 30만원 지급이다. 재원은 연간 약 180조원이 소요된다. 제도 도입 10년 이후인 2단계에 접어들면 기존의 공적부조 가운데 기본소득 취지와 부합하는 일부 제도를 흡수 통합하고 재원을 추가 투입해 모든 국민이 중위소득의 50%를 보장받을 수 있게 하고, 3단계에서는 최종적으로 증세를 통해 모든 국민이 중위소득의 50%를 기본소득으로 받을 수 있게 한다는 계획이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연 500조원이 필요하다.
윤희숙 의원은 지난해 8월 경제혁신위원장을 맡으며 ‘국민의힘표 기본소득’을 설계했다. 윤희숙 의원은 기존 현금 복지 제도를 통폐합해 마련한 재원으로 중위소득의 50% 이하 가구에 기본소득을 주자고 제안했다. 필요한 예산은 21조원. 최근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 나섰던 김웅 의원은 20세에서 29세의 청년들에게 매달 50만원씩 기본소득을 주자는 공약을 내걸었다. 연 40조원의 예산이 필요하지만 증세 없이 ‘저출산 예산’을 활용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이 밖에 오세훈 서울시장은 기본소득의 대항마로 ‘안심소득’을 선언했다. 연 소득이 일정액에 미달하는 가구에 미달 소득의 일정 비율을 현금 지원하겠다는 내용이다. 조은희 서초구청장은 ‘서초형 청년기본소득’을 구상 중이다. 서초구에 거주하는 24~29세 청년 300명을 대상으로 1인당 매월 52만원을 지급하겠다고 지난해 선언했지만, 현재 구의회에서 조례가 통과되고 있지 않아 지연되고 있다.
완전 기본소득? 한국 GDP 기준 1인당 월 80만원
전문가들은 60년 전 탄생한 기본소득이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고 설명한다. 미국 정치계도 기본소득에 눈을 돌리고 있다. 대표 주자는 앤드루 양(Andrew Yang)이다. 기본소득과 비슷한 성격의 ‘자유배당금’을 내세우며 지난해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에 나섰던 앤드루 양은 현재 강력한 차기 뉴욕시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김시호 연세대 글로벌융합공학부 교수는 기본소득이 주목받는 이유로 산업구조의 변화와 양극화의 심화를 꼽았다.
김 교수는 “4차 산업혁명과 이로 인한 노동시장의 급격한 변화는 신규로 사회에 진출하는 청년층과 신기술에 취약한 노년 계층에게 심각한 실업 사태를 가져오고 있다”면서 “이로 인한 청년과 노인 빈곤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기본소득이 국민에게 기본 생존권을 보장하고 경제성장에 따른 부의 재분배를 통해 사회를 건전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대선을 앞두고 한국의 기본소득 논의는 더 거세질 전망이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핵심 쟁점은 기본소득을 지급하면서 복지를 축소하느냐, 기존 복지체계를 그대로 두면서 기본소득을 도입하느냐다”라고 했다. 학자들이 설명하는 기본소득의 ‘5대 원칙’에 최대한 가깝게 정책 설계를 하는 게 중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증세를 피하려다 보면 무조건성이나 보편성 등의 원칙에 어긋나게 설계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백승호 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특정 계층에게만 지급되는 기본소득을 ‘범주형 기본소득’이라고 하는데, 이를 기본소득이 아닌 단순한 ‘사회수당’으로 봐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다.
진보 진영에서 제안하는 기본소득 안은 대체로 학계가 제시한 5대 원칙에 부합한다. 반면 김세연 전 의원 안을 제외한 보수 진영의 안들은 대부분 증세 없이 특정 세대와 계층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자는 내용이다.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장(제주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은 “기존의 현금성 복지제도를 통폐합해 기본소득을 주자고 한 김세연 전 의원의 안은 설계가 잘된 편이지만, 지급 금액 자체가 적어 ‘완전 기본소득’이 아닌 ‘부분 기본소득’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5대 원칙 이외에 ‘지급 금액’도 기본소득의 중요한 요건이라고 설명한다.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명예공동의장인 필리프 판 파레이스 벨기에 루뱅가톨릭대 교수에 따르면, 국내총생산(GDP) 25% 수준의 금액이 지급돼야 ‘완전 기본소득’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 기준으로는 1인당 매월 80만원 정도를 받아야 완전 기본소득에 해당한다.
김시호 교수는 “기본소득이 양극화와 불평등 해소의 대안으로 떠오른 정책이라면 최소한의 안정된 삶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 지급돼야 한다”면서 “앞으로 우리나라의 기본소득 정책 논의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조준혁 더나은미래 기자 presscho@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