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금)

“민주주의 플랫폼 더 확대돼야… ‘광장의 힘’ 일상서 발휘될 것”

[시민력(力)이 큰다] ③시민 목소리 내는 터 만드는 조아신 더이음 대표·권오현 빠띠 대표

조 대표, ‘열린소통포럼’ 등 총괄 기획
권 대표, 온라인 토론장 ‘빠띠’ 운영
시민력 극대화돼야 진정한 민주주의
축적된 시민력이 인터넷 만나니 ‘폭발’
지역·가정 등 일상에서 부조리 변화 고민

지난 2일 서울 정부서울청사에서 만난 조아신(왼쪽) 더이음 상임대표와 권오현 빠띠 대표. 두 사람은 시민의 정책 참여 활성화를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신영 C영상미디어 기자

‘지식의 지휘자’로 불리는 미국 출판인 존 브룩만은 새천년을 앞둔 1999년, 전 세계 석학들에게 이메일로 질문했다. “지난 2000년을 통틀어 인류 최고의 발명품은 무엇인가?” ‘마취제’ ‘피임약’ ‘0’ ‘확률 이론’ 등 기상천외한 응답이 쏟아진 가운데 스티븐 로즈 런던대학교 신경생물학과 교수는 ‘민주주의’를 답으로 제시했다. “인종과 계급, 성별의 억압에서 벗어나 시민이 주인인 사회를 건설할 가능성을 열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지난 2일 서울 정부서울청사 열린소통포럼에서 만난 조아신(47) 더이음 상임대표와 권오현(44) 사회적협동조합 빠띠 대표는 자발적으로 연대한 시민의 힘, 즉 ‘시민력(力)’이 극대화할 때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말한다. 행정과 민간의 가교 역할을 하면서 시민이 목소리를 낼 터전을 일구는 것이 이들이 하는 일이다.

조 대표는 문재인 정부 국민인수위원회가 국민의 목소리를 듣고자 마련한 ‘광화문 1번가’와 이를 발전시킨 국 정책 제안 플랫폼 ‘열린소통포럼’을 총괄 기획했다. 공감·소통·합의·토론·결정 등 민주주의 발전에 필요한 기술을 시민에게 가르치는 ‘민주주의기술학교’를 만들고 운영에도 참여한다. 권 대표의 명함에는 ‘우리는 민주주의를 개발한다’고 적혔다. 포털사이트 다음에 ‘아고라’라는 공론장을 연 IT 개발자인 그는 현재 빠띠를 통해 민주적인 커뮤니티·공론장 확대를 위한 디지털 플랫폼을 보급하고 있다. 서울시의 민주주의 플랫폼 ‘민주주의서울’의 총괄 기획자로도 활동했다.

시민력, ‘일상의 민주주의’ 이끈다

―시민력이 사회 변화의 동력으로 주목받는 시대가 열렸다.

권오현(이하 권)=반가운 변화다. 2016년 촛불 정국 이후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시대의 화두가 됐다. 당장 시민이 쓰는 언어부터 달라졌다. ‘민주주의’ ‘공론장’ 같은 단어가 일상에서 쓰인다.

조아신(이하 조)=미디어의 역할이 가장 컸다. ‘인터넷’이라는 도구를 손에 쥐면서 개인의 영향력이 커졌다. 누구나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주목받을 수 있다. 평범한 엄마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비영리단체 ‘정치하는엄마들’이 그 예다. ‘어린이생명안전법 통과 촉구’ ‘사립유치원 비리 근절’ 같은 의제를 설정하고 여론과 정치권을 움직이고 있다.

―더나은미래가 지난해 말 선정한 ‘2019년에 주목할 키워드’의 첫머리가 ‘시민력’이었다.

조=잘 뽑으셨다(웃음). 그런 시대가 왔다. 이제야 무르익었다는 느낌이다.

클레이 셔키 뉴욕대학교 언론대학원 교수는 저서 ‘많아지면 달라진다’에서 인터넷으로 연결된 시민이 혁명의 주체가 될 것이며, 공공의 역할은 ‘인터넷 시민 집단’이 무엇이든 시도하도록 독려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조 대표는 셔키 교수의 말을 빌려 “시민력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라며 “시민사회가 오래 축적한 힘이 기술과 만나 비로소 폭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올해를 돌아봤을 때, 시민의 힘을 느꼈던 사건이 있었나.

조=유튜브의 위력을 실감했다. 유튜브가 시민 한 명 한 명의 목소리에 영향력을 부여하고 있다. 블로그나 트위터도 있었지만, 이만한 힘은 없었다. 새로운 인물과 신선한 주장이 무한정 발굴되는 무대다.

권=눈에 띄는 큰 사건보다 일상에서 나타나는 소소한 변화에 주목한다. 예전에는 ‘부패한 권력과 싸우는 것’을 민주주의로 여겼다. 이제는 정치를 넘어 일상에서 민주주의를 찾는다. 몸담고 있는 지역사회나 회사, 가정의 부조리를 어떻게 바꿀지 고민한다. 권한은 나누고, 토론하고, 협력해서 성취한 작은 변화들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서로 공유하게 됐다는 점이 중요하다.

―시민력이 커지면서 시민단체들이 할 일이 줄어든 느낌이다.

조=가령 ‘제로 웨이스트(Zero-waste)’ 운동만 봐도 사람들이 알아서 실천하고, 참여를 독려한다. 20년 넘게 시민사회에서 일하는 입장에서 굉장히 이채롭다. 원래는 환경단체가 할 일인데, 그냥 스스로 하는 거다. 시민과 시민단체가 경쟁하는 데까지 왔다.

권=조직이 꼭 필요했던 때가 있었다. 시민단체가 스피커 역할을 했다. 주장을 관철하려고 시민을 모으고, 조직된 힘으로 위력을 행사해 문제를 해결했다. 지금은 스스로 영향력을 뿜어내는 시민이 곳곳에 있다. 이들이 활동할 토양을 다지는 것이 시민단체의 새로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조아신(왼쪽) 대표는 “‘열린소통포럼’과 ‘민주주의서울’ 모두 민간 주도로 만들어졌지만, 궁극적으로는 행정이 스스로 시민의 참여를 유도할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권오현 대표는 ‘민주주의서울’을 기반으로 개발한 ‘데모스X’라는 이름의 시민 참여 플랫폼을 오픈소스로 공개했다. 시민 참여 플랫폼을 활용하고자 하는 지자체·기관은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이신영 C영상미디어 기자

행정과 시민의 파트너십 구축 필수

조 대표와 권 대표는 2000년대 초반에 처음 만났다. 당시 조 대표는 함께하는시민행동에서 ‘시민 주권 운동’을 펴고 있었고, 권 대표는 민주노동당에서 IT 기반 ‘전자 정당’을 만드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시민을 가운데 두고 통하는 게 많았다. 20년 가까이 교류하면서 특히 민주주의 확대를 위한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조 대표는 ‘광화문 1번가’ ‘열린소통포럼’을 기획했고, 권 대표는 ‘빠띠’ ‘민주주의서울’을 선보였다. ‘행정과 시민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라는 고민에서 나온 결과물들이다.

―시민을 공론장에 끌어들이는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권=정책이 결정되는 과정을 보면 ‘공론’도 없고 ‘숙의’도 없다. 정책은 결국 시민을 위한 것인데, 정작 시민의 의견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 투표로 대리인을 뽑는 것만이 민주주의가 아닌데, 시민이 정책 결정에 참여할 방법은 없을지 고민했다. 그 결과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시민의 의견을 모으고, 시민과 전문가가 함께 정책을 논의하는 플랫폼을 만들게 됐다.

조=많은 시민이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닫는다. 목소리는 내고 싶은데, 목소리가 받아들여질까라는 의심을 거두지 못해서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간에 플랫폼은 사람들이 부담없이 의견을 공유하고 토론하게 한다. 여기서 얼마나 정제된 의견이 나올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나중의 문제다.

―취지는 좋지만, 속도가 의문이다. 성과가 좀 나왔나.

조=지난해 열린소통포럼에서 발굴된 국민 제안 72개 가운데 38개가 실제로 정책에 반영됐다. 26건은 추진되고 있다. 다만 숫자보다 행정 내부의 변화를 짚고 싶다. 열린소통포럼의 경우 시민이 제안하면 행정은 반드시 피드백을 줘야 한다. 결과는 모두에게 공개된다. 이런 절차를 당연한 일로 행정 스스로 인식하게 하는 과정이다. 공무원의 선의나 열정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권=서울시는 올해부터 10개 공공기관에 비상용 생리대를 비치하고 있다. 서울시 공무원이 먼저 제안해서 3개월간 준비하고, 한 달간 공론화 과정을 거쳐 나온 정책이다.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시민과 행정이 함께 정책을 만들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절차를 밟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런 경험이 쌓여야 행정과 민간 모두 효능감이 높아진다.

―주로 어떤 사람이 민주주의 플랫폼에 참여하나.

조=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하다. 30~40대가 가장 많다.

권=길고양이 관련 토론 자리가 있었는데, 경기도에서 온 한 40대 남성이 스스로 ‘캣맘’이라고 소개하더라. 주제의 성격상 젊은 여성이 많으리라 예상한 내 선입견을 깨닫는 동시에 깨지는 순간이었다. 세대나 성별을 떠나서 정말 다양한 의견이 모인다.

―시민의 요구에 행정이 제대로 발맞추고 있다고 보나.

조=과거에는 행정이 정책 결정 권한을 온전히 쥐고 있었다. 시민이 의견을 내도 ‘민원’ 이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도 시민이 정책 결정 파트너라는 인식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들어줄게’가 아니라 ‘얘기해 보자’가 돼야 한다.

권=시민력의 확대는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다. 지금은 행정에 ‘이질적 유전자’가 주입되는 과정이라고 본다. 결국 적응하게 될 것이다.

‘광장’은 뭉친 시민의 힘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민주주의가 이곳에서 꽃을 피웠다. 조 대표와 권 대표는 역설적으로 광장이 필요없는 시대를 꿈꾼다. 권 대표는 “민주주의 플랫폼이 더 많아지면 광장의 힘이 시민의 일상에서 발휘되는 시대가 열릴 것이다”고 말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뿜어져 나온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한 세대가 지나갔다. 조 대표는 “소수 엘리트가 사회를 이끈 시대가 함께 저물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 누가 이 사회를 이끌 것인가. ‘나의 힘’에 집중하는, 이 힘을 변화의 에너지로 기꺼이 사용할 의지가 있는 모든 시민이 주역이 될 것이다.”

[장지훈 더나은미래 기자 jangpr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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