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 이사장 맡은 ‘사회적경제의 대부’ 송경용 신부
천국 같은 대학 생활, 지옥 같던 삶의 현장
약자 위한 사회가치연대기금 1년간 준비
“신용 등급 아닌 사람을 보는 ‘인간적 금융’ 만들 것”
신(神)을 믿지 않는 소년이 있었다. 가난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했던 어린 시절. 비쩍 마른 손으로 아이스케이크 장사, 호떡 장사, 신문팔이를 하며 어렵게 공부했다. 고단함보다 외로움이 커서 매일 울었다. 신이 있다면 이렇게 가혹할 리가 없었다. 스무 살이 되고도 인생의 목표를 찾지 못해 방황했다. 낮에는 번듯한 건축학도로 대학 캠퍼스를 누볐지만, 밤에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룸살롱 웨이터로 일했다. 너무나 대조적인 두 개의 세상을 오가며 혼란은 더 깊어졌다.
서울 상계동 판자촌 야학에서 어린 노동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답답했던 가슴이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들에게 뭔가 해줄 수 있어 기뻤다. 사회의 밑바닥에서 헌신하는 종교인들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마음이 흔들렸다. 자신도 모르는 새 입에서 기도가 새어나왔다. 스스로 ‘반(反)종교인’이라 칭하던 청년은 결국 사제의 길로 들어섰다. 송경용(59) 신부 이야기다.
판자촌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그는 기도만으로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나아지게 만들 방법을 찾아야 했다. 먹고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시작한 일이 ‘사회적경제’였다. 우리나라에 사회적경제의 개념조차 없던 1990년대 초, 노동자들을 불러모아 협동조합을 세우고 사회적 기업을 만들었다. 성공회 사제인 그가 ‘사회적경제의 대부’로 불리게 된 이유다.
지난달 말에는 국내 사회적경제 활성화를 위해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을 출범시켰다. 민간 기부와 출연, 출자를 통해 5년간 3000억원 규모로 조성되는 민관 협력 기금이다.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 이사장직을 맡은 송경용 신부를 지난 13일 서울 명동에 있는 기금 사무실에서 만났다.
상계동 야학에서 인생의 해답을 찾다
―’종교인’이라기보다는 ‘사회운동가’에 가까운 삶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종교인 송경용과 사회운동가 송경용은 본질이 같습니다. 줄곧 고통받는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가져왔고, 그들이 처한 삶의 정황을 어떻게 개선해 나갈지를 고민했어요. 종교적 관점에서는 그게 ‘사랑’이겠죠.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이 바로 ‘사회운동’이었습니다.”
―40년 전 연세대 건축공학과 1학년 시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야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습니까.
“선배들이 권유해서 갔어요. 경영학과 다니는 선배들이었는데, 어느 날 저를 부르더니 ‘상계동 야학에 네 도움이 꼭 필요한 친구들이 있다. 같이 가보자’고 했죠. 그때 이미 대학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그길로 선배들을 따라나섰어요. 1979년 9월 28일. 날짜도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어떤 회의가 들었던 건가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안 해본 일이 없었어요. 사과 장사, 배추 장사, 술집 접시닦이…. 대충 세어보니 열네 가지쯤 해봤더라고요. 대학 다니면서도 새벽 3시까지 일을 했어요. 그런데 일 마치고 다음날 학교에 가면 너무도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거예요. 내가 밤에 겪었던 일, 삶의 현장에서 목격했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밝은 세상. 뭐랄까, 대학 캠퍼스는 ‘천국’ 같았어요. 괴리가 심해 적응이 안 됐어요. 대학의 학과 공부도, 학생들이 모여서 나누는 담론들도 와 닿지가 않았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끊임없이 맴돌았어요. 내 또래 친구들은 어둠의 세계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데 나만 빠져나와 이렇게 지내도 되나. 이러고 살아도 되나…. 미안함과 죄책감이 컸죠.”
―그러다 야학에 가서 인생이 완전히 바뀐 거네요.
“첫날부터 거기서 먹고 자며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수업이 끝나면 적십자회관 마룻바닥에 누워서 잠을 잤죠. 거기서 만난 열세 살, 열네 살의 어린 친구들은 나에겐 제자가 아니라 삶의 스승이었어요. 아침 7시부터 밥도 못 먹고 공장에 가서 종일 일하고, 저녁 8시 반에 야학 와서 허겁지겁 라면 끓여 먹고는 공부를 하는 거죠. 어떤 고난에도 포기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이 나를 붙잡았습니다.”
―건축학도였는데 어떻게 신부가 됐습니까.
“원래는 반(反)종교인이었어요(웃음). 어쩌다 야학생들을 데리고 교회에 가면 그렇게 우리를 무시했어요. 야학생들 입성이 꾀죄죄하잖아요. 화공약품 쓰는 공장에서 맨몸으로 일하다 보니 이빨도 다 무너지고 코뼈도 주저앉고…. 교회 가면 못 들어오게 했어요. 화가 나서 싸우기도 했죠. 성당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런 반감을 갖고 있었는데, 판자촌 주민들을 돕던 종교인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바뀌었어요. 산동네에서 가난한 이들을 돌보던 수녀님들, 제 스승이신 허병섭 목사님과 정일우 신부님.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판자촌 철거민들과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는 그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됐죠.”
―종교에 관심이 생겼다고 해서 모두 종교인이 되는 건 아니죠.
“그건 기도를 잘못해서 그렇습니다(웃음).”
송경용은 1982년 군에 입대하면서 잠시 야학을 떠났다. 1984년 제대하자마자 상계동을 찾았지만 모든 것이 무너진 뒤였다. 야학생들이 살던 상계동 173번지가 재개발과 함께 강제 철거됐다. 송경용 이사장은 “그 폐허 앞에서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현기증을 느꼈다”고 했다. “대여섯 평도 안 되는 판잣집이었지만 그곳 사람들의 삶을 지탱해주던 소중한 보금자리였는데, 재개발이란 이름으로 강제 철거를 한 거예요. 한동안 꼼짝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어요. 그리고 기도했죠. ‘하느님, 제가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때 기도를 잘못한(?) 덕분에 신부의 길을 걷게 됐고, 여태 이 자리를 못 떠나고 있는 겁니다(웃음).”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사회적경제’
―1986년 신학대에 입학하고 1993년 사제 서품을 받았지만 한 번도 교회를 연 적이 없습니다. 대신 ‘나눔의 집’을 열었지요?
“신학대에 들어간 그해 상계동에 조그만 집을 하나 얻었습니다. 교회 간판을 붙이긴 싫었어요. 고민을 하다 ‘나눔의 집’이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요즘엔 나눔이란 말이 흔하지만 당시만 해도 낯선 단어였죠. 철거촌에서 우리 사회의 폭력과 그늘을 지켜보며 원인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독식’과 ‘독점’이라는 결론을 얻었어요. 그 반대말이 뭘까 했더니 ‘나눔’이었죠. 서로 존중하며 연결돼 있는 것. 그게 나눔이에요. 나눔의 집을 가난한 이들의 교회이자 공부방이자 사랑방으로 만들자는 생각을 했어요. 후에 삼양동(1988)과 봉천동(1991)에도 나눔의 집을 열었죠.”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았을 텐데요.
“당시만 해도 ‘사회복지’라는 게 없었어요. 보호가 필요하고 먹을 것이 필요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는데, 나라는 이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어요. 마을버스 요금을 하루아침에 말없이 올려버리면 몇㎞씩 그냥 걷는 수밖에 없었죠. 공부를 가르치고 야학을 하는 걸로는 안되겠다. 함께 먹고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회적경제’를 시작하게 됐죠.”
―사회적경제는 어떻게 접하게 됐나요?
“1990년대 초에 정부가 경쟁력 있는 분야로 산업 구조를 재편하겠다면서 노동집약적 산업을 다 없애버렸어요. 육체노동으로 먹고 살던 수백만 노동자가 별안간에 실업자가 됐죠. 산동네의 삶은 더 비참해졌어요. 해외에서는 이런 빈곤과 불평등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 궁금했어요. 이것저것 찾아보고 공부하다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부작용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사회적경제’에 대해 알게 됐죠. ‘이윤’이 아니라 ‘사람’을 우선시하는 경제활동이라고 하더군요. 사회적경제 사례로 소개된 일본과 스페인의 노동자협동조합 이야기를 보다가 ‘이거다!’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1992년 9월 ‘봉천동 나눔의 집’에 불이 나면서 송경용 이사장의 ‘사회적경제 실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산동네 기술자들이 잿더미가 된 나눔의 집에 모였다. 함께 집을 지으며 어떻게 먹고살지 이야기를 나누다 ‘건설노동자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여성들도 할 일이 있었다. 대부분 1급 미싱사로 봉제 기술자들이었다. 그들을 불러 ‘나눔물산’이라는 봉제 공장을 만들었다. 반찬을 잘 만드는 여성들만 따로 모아 도시락 공장인 ‘행복나래’를 세웠다. 청소 회사인 ‘푸른환경’을 만들어 특별한 기술 없는 남자들을 합류시켰다. 남산 1~3호 터널을 봉천동 주민 250여 명이 매일 밤 청소했다.
“이런 변화가 봉천동 한곳에서만 일어나는 건 의미 없다고 생각했어요. 제도와 법이 뒷받침돼야 지속가능할 수 있죠. 그래서 정부에 취약 계층의 일자리와 자립을 돕는 ‘자활센터’를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요구가 받아들여져 1995년 5월 자활센터가 처음 설립됐고 지금은 전국에 281개가 생겨났어요. 자활센터 출신들이 1000여 개의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을 만들었으니 ‘사회적경제의 못자리’가 된 셈이죠.”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인간적인 금융’
―2003년부터 2009년까지 영국에 가서 사회적경제를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경험은 무엇이었나요.
“내가 살던 마을에서는 매주 목·금·토요일에 ‘파머스 마켓’이 열렸어요. 축제의 장이죠. 농민과 주민들이 모두 나와서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교류하고 물건을 사고팔아요. 그걸 지켜보면서 진정한 ‘사회적경제’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적경제라는 말에 왜 ‘사회’라는 글자가 붙어 있는지를 잘 생각해야 해요. 사회적경제는 경제적 관점에서 볼 게 아니라 사회적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경제적 지표로 보면 유럽에서 사회적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6~10% 정도예요. 하지만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50%가 넘죠. 파머스 마켓이 그래요. 매출로만 따지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마을의 역사가 되고 문화가 되고 교류의 장이 되면서 그 사회를 움직이는 원리로 작동하는 거예요.”
―사회복지법인 나눔과미래 이사장, 도시재생협치포럼 상임대표 등 여러 중책을 맡고 있습니다. 이번에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 이사장까지 맡아 어깨가 무거울 것 같습니다.
“최근 몇 년 새 국내 사회적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금융적 토대는 무척 빈약해요. 사회적경제 조직들이 투자나 융자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죠. ‘마중물’ 역할을 할 자본이 필요한 시점이 온 거예요. 지난해 2월 정부, 지자체, 시민사회, 학계, 금융계 등 각계 전문가들을 모아 사회가치연대기금 추진단을 꾸렸고, 추진단장을 맡아 1년간 준비를 했어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인간적인 금융’을 만드는 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인간적인 금융’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뜻이죠?
“일반 금융은 사회적 약자일수록 접근이 어렵죠. 접근이 돼도 ‘신용 등급’이라는 게 있잖아요. 융자를 받을 경우 빌릴 수 있는 돈은 적고 이자는 더 비싸죠. 금융 시스템 자체가 그렇게 돼 있어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인지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단지 내 월급이 얼마인지, 채무가 얼마인지, 부동산은 뭐가 있는지 이런 것들로 내 가치를 평가해요. 인간적이지 않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도 없어요. 그런데 ‘사회적 금융’은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를 중요시해요. 어떤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혹은 이 사람을 도와서 어떤 역량을 갖게 할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해줘요. 인간적이죠.”
송경용 이사장은 “사회적경제와 사회적 금융 활성화를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있다”고 말했다. 몇 년째 국회에 계류 중인 ‘사회적경제기본법’ 얘기다.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마을 기업 등 사회적경제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법이 ‘호적’ 같은거예요. 국가적으로 이들에게 정체성을 규정해주는 건데 그게 없으니 관리가 안 되죠. 또 법적 근거가 없으니까 기금을 확장하는 것도 어려워요. 사회적경제의 규모가 이렇게 커지고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정책이 됐는데 자꾸 이념적으로 판단해 막아서니 답답하죠. ‘협동’ ‘연대’ ‘나눔’이라는 사회적경제의 소중한 가치를 우리 정치인들이 꼭 좀 기억해줬으면 합니다.”
[김시원 더나은미래 기자 blindlette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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