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케어러 지원, 법 제정 다음은?…일본 사례가 던진 질문

일본, 지자체 조례·기존 복지기관 활용해 가족돌봄 지원
온라인 커뮤니티·단기 숙박 등 사례 소개

가족을 돌보는 국내 아동·청년의 주당 평균 돌봄시간은 21.6시간, 돌봄을 주로 책임지는 경우에는 32.8시간에 달한다. 우울감을 경험한 비율도 61.5%로 일반 청년(8.5%)의 7배가 넘는다. 보건복지부가 2023년 발표한 가족돌봄청년 실태조사 결과다. 올해 3월 국내에서도 가족돌봄 아동·청년을 위한 첫 지원법이 시행됐지만, 지원 대상에서 제외되는 사각지대와 돌봄 부담을 실질적으로 줄여줄 서비스 부족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한국보다 먼저 초고령사회에 진입해 가족돌봄 문제를 경험한 일본에서는 어떤 해법을 찾고 있을까. 28일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돌봄 커뮤니티 N인분이 개최한 ‘한일연수보고포럼-지금, 저기에서 이제, 여기, 우리의 연결’에서는 일본의 케어러 지원정책과 민간의 현장 실천 사례가 소개됐다. 지난 7월 일본 간사이 지역의 지원기관과 시민사회단체를 방문한 참가자들은 법과 지원기관을 마련하는 것뿐 아니라 기존 복지제도를 연결하고, 당사자가 참여할 수 있는 지원체계와 돌봄에서 벗어나 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새 기관보다 기존 제도 활용…지역·민간 협력 

한국과 일본은 케어러 지원정책을 마련해 온 과정부터 다르다. 한국이 중앙정부 주도로 법률과 지원기관을 마련했다면, 일본은 지역의 당사자와 시민사회단체가 먼저 움직이고 지방자치단체의 조례와 지원사업으로 발전한 사례가 많다.

강내영 연구공방 사람 수석연구위원은 이날 발표에서 “한국은 제도를 먼저 만들고 지역사회가 이를 실행하는 방식이 강하다면, 일본은 당사자와 주변 사람들이 운동을 통해 지역사회를 변화시키고 그 힘으로 제도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일본에서는 2020년 사이타마현을 시작으로 올해 6월까지 36개 지방자치단체가 케어러 지원 조례를 제정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교토시다. 2022년 돌봄 당사자와 지원단체 19곳이 결성한 ‘교토케어러네트’가 조례 제정을 추진했고, 2024년 11월 시의회 의원 전원의 동의로 조례가 제정됐다. 이후 2025년 추진협의회 구성, 2026년 지원계획 수립을 거쳐 지난 7월 모든 연령의 케어러를 대상으로 하는 상담창구가 문을 열었다.

주목할 점은 당사자들의 참여가 조례 제정 이후에도 이어졌다는 것이다. 교토케어러네트는 정책을 논의하는 추진협의회에도 참여하며 제도 운영에 관여하고 있다. 강 연구위원은 “한국에서는 정책과 제도를 만드는 데 많은 힘을 쏟지만 이후에는 손을 놓는 경우가 많다”며 “일본은 조례 시행 이후에도 당사자 네트워크가 협의회와 정책 결정 과정에 계속 참여한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지원 현장에서는 새로운 기관을 설립하기보다 기존 복지서비스의 문턱을 낮추는 방식이 활용되고 있다. 2016년부터 육아와 가족 간병을 동시에 수행하는 ‘더블케어러’ 상담창구를 운영하는 오사카부 사카이시가 대표적이다. 사카이시는 기존 지역포괄지원센터를 활용하면서 더블케어 가정에 노인 단기입소 이용기간 연장, 보육소 입소 심사 가산점 등의 혜택을 제공한다.

김연정 관계공감심리상담센터 연구자는 사카이시에서 만난 한 가족의 사례를 소개했다. 치매가 의심되는 70대 남편과 발달장애가 있는 초등학생 딸을 돌보느라 휴직과 퇴직을 반복하던 50대 여성에게 담당 직원이 의료기관을 연결하고 직접 학교에 동행해 가정 상황을 설명한 사례다. 고령자와 아동을 별도의 지원 대상으로 보지 않고, 가족 전체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복지·의료·교육기관이 함께 대응한 것이다.

김 연구자는 “학교에 가서 이렇게 처리하라고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직원이 직접 동행해 상황을 설명하고 함께 대응한 사례”라며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 제도 안에서 지원의 문턱을 낮추고, 사람이 직접 움직인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 발굴 넘어 관계로…돌봄에서 쉴 공간도 필요

행정의 지원이 미처 닿지 못하는 영역에서는 민간단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영케어러와 관계를 맺고 있다. 일본 민간 지원의 특징은 처음부터 돌봄 상황을 설명하거나 지원 자격을 증명하지 않아도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는 점이다.

부모의 정신질환을 경험한 아동·청년을 지원하는 비영리단체 ‘CoCoTELI’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운영한다. 참여자들은 온라인에서 게임이나 취미, 일상적인 고민을 나누다가 필요할 때 동료 상담가와 전문가를 통해 의료·복지서비스로 연결된다. 2025년에는 103명이 참여했고, 151차례의 활동이 진행됐다.

영케어러 당사자들이 만든 ‘후센노카이’는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교류회 ‘쓰도이’를 운영한다. 장애나 질병이 있는 사람의 형제자매를 지원하는 ‘호쿠리쿠 쿄다이회’는 모든 형제자매를 영케어러로 규정하지 않고, 각자가 겪는 어려움과 삶의 경험을 먼저 듣는 데 집중한다. 세 단체 모두 지원 대상을 정해놓고 서비스를 제공하기보다, 당사자가 편안하게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필요한 지원을 연결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현아 N인분 활동가 겸 미술치료사는 “영케어러를 지원 대상으로 찾아내는 ‘발굴’을 넘어,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발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당사자가 자신의 경험을 말하거나 활동에 참여할 정도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당사자가 관계를 맺는 것을 넘어 돌봄에서 잠시 벗어나 쉴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교토시 유스서비스협회가 2023년 10월부터 운영하는 ‘오리오리노이에’다. 가족돌봄에서 잠시 벗어나 머물 수 있는 단기 숙박 공간으로, 정원은 2명이다. 한 달에 최대 3박까지 머무를 수 있으며, 낮잠을 자거나 식사를 하고 혼자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상담이나 프로그램 참여를 의무로 요구하지 않는다.

이곳은 이용자의 안전과 사생활 보호를 위해 주소도 공개하지 않는다. 돌봄을 받는 가족이 아닌 돌보는 당사자가 집을 떠나 쉴 수 있도록 하는 ‘레스파이트(일시 휴식 지원)’의 한 형태다.

임혜숙 상상나래사회적협동조합 이사는 오리오리노이에를 “필요할 때 가끔 돌아갈 수 있는 집”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영케어러 지원에 상담과 프로그램뿐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새로운 시설을 짓기보다 기존 청소년센터나 돌봄시설에 방 하나와 하룻밤의 쉼을 마련하는 방식도 대안으로 제안했다.

일본 사례가 한국에 던지는 과제는 분명하다. 영케어러를 발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기존 복지서비스를 통해 돌봄 부담을 줄이고, 당사자가 관계를 맺고 쉴 수 있는 환경까지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 연구위원은 “케어러 지원을 개별 사업으로 접근하기보다 어떻게 생태계를 만들고 서로 순환하는 관계를 구축할 것인지 큰 숲을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번 행사는 ‘제1회 대한민국 영케어러 위크’ 기간에 진행됐다. 지난 23일 시작돼 29일까지 진행되는 대한민국 영케어러 위크는 영케어러가 처한 현실을 사회에 알리고, 당사자를 조기에 발견해 필요한 지원으로 연결하는 협력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국내 첫 공동행사다. 추진협의회에는 국가아동권리보장원, 대한의료사회복지사협회, 한국사회복지관협회, 지자체 청년미래센터 등 공공기관과 학계, 복지 현장, 당사자 단체를 아우르는 총 18개 기관이 참여했다. 공익미디어 <더나은미래>는 미디어파트너로 참여해 영케어러의 현실과 제도적 과제, 국내외 지원 사례 등을 연속 보도하고 있다.

조유현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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