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혁신발언대] 경도인지장애, 진단 다음의 자리가 중요

서정주 사이임팩트 대표

“경도인지장애 진단을 받은 분들은 그다음 어디로 가시나요?”

지난 9월 서울 은평구청에서 열린 ‘건강이웃’ 사업 성과공유회에서 한국에자이 관계자가 던진 질문이다. 한국에자이와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서울광역치매센터, 은평구치매안심센터가 처음 사업을 논의할 때부터 반복해서 제기했던 문제이기도 하다.

보건복지부의 2023년 치매역학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의 치매 유병률은 9.25%다. 여러 조사에서는 국내 경도인지장애(MCI) 추정 인구가 300만 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경도인지장애는 정상적인 노화에 따른 인지 변화와 치매의 중간 단계로, 치매로 진행될 위험이 높은 상태다.

은평구치매안심센터 유미숙 부센터장에 따르면 경도인지장애가 있는 사람은 정상 인지기능을 가진 사람보다 치매로 진행될 위험이 4~5배 높다. 치매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정작 치매로 이어질 수 있는 이 중요한 시기에 우리 사회가 제공하는 지원은 충분하지 않다. 진단은 받았지만, 그 이후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찾기 어렵다.

이번 성과공유회에서 만난 한 경도인지장애 당사자도 비슷한 시간을 보냈다. 약속을 자주 잊어버려 주변에서 검사를 권유했지만, 자존심이 상해 검사를 미뤘다고 했다. 사람들과의 만남도 피했다.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발음이 어눌해지고 몸과 마음이 점점 병들어가는 것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그렇게 사회와 멀어지던 그에게 변화의 계기가 찾아왔다. 한국에자이와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의 지원으로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 은평구에서 5개월간 시범 운영한 ‘MCI 노인일자리’ 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경도인지장애 진단을 받은 어르신 10명과 기존 노인일자리 참여자인 ‘건강이웃’ 10명을 짝지어 함께 활동하도록 설계됐다. 참여자들은 매주 가정을 방문하며 서로 관계를 맺고 사회활동을 이어갔다.

사업에 참여한 어르신은 “사람과 환경이 이렇게도 사람을 달라지게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변화는 수치로도 나타났다. 5개월간 참여자들의 인지기능 검사(MoCA) 점수는 평균 1.6점 상승했고, 우울감은 감소했으며 자아존중감은 높아졌다. 물론 소규모 시범사업의 결과만으로 장기적인 치매 예방 효과까지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진단 이후 위축됐던 사람들이 다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역할을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확인했다.

처음에는 함께 활동하는 건강이웃 선생님이 이것저것 가르쳐주려 하는 것이 서운하기도 했다는 한 어르신은 시간이 지나며 관계를 새롭게 받아들이게 됐다고 했다. 가르침을 받는 학생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동료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 사업이 주목할 만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도인지장애 당사자를 일방적인 돌봄과 보호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도움을 받는 사람에게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역량이 있고, 사회 안에서 수행할 역할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이러한 접근은 국제적인 치매 예방 연구의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를 비롯한 국제사회에서는 신체활동과 인지활동, 사회적 관계를 함께 고려하는 다영역 복합중재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일본 도쿄도 건강장수의료센터연구소의 추적연구에서도 고령자의 사회활동 참여와 뇌 위축 속도 사이의 연관성이 보고된 바 있다.

은평구의 작은 시범사업은 이런 연구 결과를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보여준 사례다. 거창한 시설이나 새로운 치료 기술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일하고 관계를 맺는 일상적인 활동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찾은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시도가 지속될 수 있느냐다.

민간 기업의 지원과 한시적인 사업 예산만으로는 안정적인 운영을 보장하기 어렵다. 사업이 끝나고 예산이 끊기면, 어렵게 사회적 관계를 회복한 어르신들이 다시 고립될 가능성도 있다.

노인일자리 참여를 희망하는 수요에 비해 공급은 여전히 부족하다. 전국적으로 노인일자리 참여 가능 인원 약 115만 명 가운데 20만 명이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는 통계도 있다. 은평구에 등록된 경도인지장애 당사자는 약 2800명이지만, 실제 추정 규모는 3만7000명에 이른다.

이번 사업에 참여한 경도인지장애 어르신은 단 10명이다. 유미숙 부센터장의 말처럼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이들 외에도 훨씬 많은 당사자가 여전히 참여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2024년 시행된 ‘인지증기본법’을 통해 치매 당사자의 존엄과 의사결정 참여, 사회적 활동을 중요한 정책 원칙으로 제시했다. 치매 환자를 일방적으로 보호하는 관점에서 벗어나, 당사자와 함께 정책과 지원체계를 만들어가겠다는 방향이다.

장애계가 오랫동안 강조해 온 ‘우리 없이 우리에 관한 결정을 내리지 말라(Nothing About Us Without Us)’는 원칙은 치매와 인지저하 정책에도 적용돼야 한다. 당사자가 무엇을 할 수 없는지부터 판단하기보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묻고 그 선택을 실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전혀 새로운 제도를 발명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미 운영 중인 노인일자리 제도 안에서 경도인지장애 당사자가 참여할 수 있는 유형을 마련하고, 은평구의 시범사업과 같은 모델을 확대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갖추는 일이다.

성과공유회에서 만난 한 어르신은 이렇게 말했다. “MCI라고 해서 일을 못하는 게 아닙니다.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있어야 하고, 같이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사업을 처음부터 함께 설계해 온 사람으로서 이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현장에서 확인한 변화가 한 번의 성과공유회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내년부터라도 경도인지장애 당사자가 공적 노인일자리 사업 안에서 사회적 역할을 이어갈 수 있도록 제도화 논의가 본격화되기를 기대한다.

경도인지장애가 있어도 일할 수 있어야 한다. 일할 자리가 있어야 하고, 함께 일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갖춰질 때 경도인지장애 진단은 사회에서 밀려나는 출발점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와 역할을 찾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 기회를 만드는 일을 더 이상 민간의 선의와 한시적인 예산에만 맡겨둘 수는 없다. 경도인지장애 당사자가 지역사회 안에서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제는 공적 제도가 응답해야 할 때다.

서정주 사이임팩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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