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AI 기술은 빙산의 일각…인프라·제도 없인 확산 어려워”

‘2026 세계 바이오 서밋’서 의료 AI 확산 조건과 한국의 역할 조명

“글로벌 보건에서 AI 혁신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알랭 라브리크 세계보건기구(WHO) 디지털헬스·AI 국장이 지난 22일 서울 코엑스마곡에서 열린 ‘글로벌 보건을 위한 Health AI 기술의 새로운 지평’ 포럼에서 한 말이다. 그는 보건 현장에서 AI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기술뿐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인프라와 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제보건기술연구기금(라이트재단)과 아시아개발은행(ADB)이 공동 개최한 이번 포럼은 ‘2026 세계 바이오 서밋’의 부대행사로 마련됐다. 정부 부처와 국제기구, 국내 기업이 참여해 의료 AI를 글로벌 보건 현장에 도입하고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기반과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라브리크 국장은 빙산을 지탱하는 기반으로 전문인력 양성, 정부의 관리·감독 체계, 의료정보를 수집·관리하는 시스템, 병원과 기관 간 데이터 연동을 위한 공통 기준, 사이버보안 등을 꼽았다. 민간 투자 역시 명확한 규제와 표준이 마련돼야 활발해질 수 있다고 짚었다. 규제나 감독이 없는 환경은 오히려 기업의 투자 위험을 높인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그는 의료 AI의 혜택을 더 많은 국가로 넓히기 위해서는 국제협력이 필요하다고 봤다. 각국이 자국의 의료환경에 맞는 AI 기술을 평가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공통 기준을 마련하고, 규제 역량과 전문인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앞서 21일 열린 ‘2026 세계 바이오 서밋’ 개회식에서는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과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 WHO 사무총장이 ‘AI 헬스케어 서울선언문’을 공동 발표했다. 선언문에는 AI 의료기술의 혜택이 특정 국가나 계층에 집중되지 않도록 국제협력을 강화하고, 의료 현장에서 AI를 안전하고 책임 있게 활용한다는 원칙이 담겼다.

정 장관은 이날 의료 AI의 개발·검증과 다른 국가에서의 활용을 지원하는 국제협력 거점인 ‘WHO AI 허브’의 국내 설립을 위해 WHO와 실무 협의를 진행 중이라고도 밝혔다.

포럼에서는 박정환 보건복지부 의료인공지능데이터정책과장이 AI를 활용해 의료 접근성을 높이고, 이를 국제협력으로도 확대하겠다는 정부의 정책 방향을 설명했다. 실제로 지난 8월 확정된 ‘AI 기본의료 전략’의 12개 정책 과제에도 국제협력이 포함됐다. 박 과장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진료받는 곳에서 유용한 AI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 보건의료체계도 고민하는 과제”라고 말했다.

박 과장은 국제협력을 위한 세 가지 방안도 제시했다. 먼저 한국의 글로벌 AI 허브를 통해 여러 국가가 의료 AI의 성능과 안전성을 같은 기준으로 평가하고, 현지 의료환경에서 검증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구상이다. 컴퓨팅 장비가 부족한 병원도 외부의 AI 서비스를 이용해 진단 등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제안했다. 또 AI 도입에 따른 비용 부담과 보상 방식, 시범사업 이후의 운영 방안을 국가별로 비교·연구하는 협력도 구상하고 있다. 구체적인 사업 내용은 WHO와 참여국 등과 협의해 결정할 예정이다.

◇ 韓 기업의 의료 AI 해외 확산, 현지 맞춤형 기술 필요

한국의 의료 AI 기술을 중저소득국에 도입하고 지속적으로 활용하려면 기업의 현지 맞춤형 기술 개발과 함께 현지·국제사회 차원의 인프라 구축과 운영 체계 마련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카카오헬스케어는 AI가 의료진의 진료와 병원 업무를 지원하는 병원정보시스템을 개발해 해외 수출을 준비하고 있다. 전력과 통신망이 원활할 때는 AI를 활용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AI 기능을 끄고 환자 진료 기록을 관리하는 기본 시스템만 운영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신수용 카카오헬스케어 최고AI책임자는 “한국과 중저소득국은 IT 인프라 여건이 달라 첨단 AI 기술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며 “각국의 환경에 맞는 적정한 기술을 찾고, 적정한 가격으로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의료 AI 기업 루닛은 의료 분야에 특화된 소형 AI 모델을 개발했다. 다양한 분야를 다루는 대형 AI보다 적은 컴퓨팅 자원으로 작동해 의료 인프라가 부족한 국가에서 운영 비용을 줄일 수 있다. 김태수 루닛 AI 혁신 TF 리더는 “각국이 자국민의 데이터를 활용해 적은 비용으로 AI 모델을 개발할 수 있어야 한다”며 “개발자가 성능과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책임져야 실제 의료 현장에서도 안전하게 사용 가능하다”고 말했다.

현지에 맞춰 개발한 기술을 실제 의료 현장에서 활용하려면 공공의 뒷받침도 필요하다. 네이버 어플라이드 AI 그룹장은 기업이 중저소득국에 의료 AI를 공급할 때 공공이 보건의료 수요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기술을 먼저 시험할 의료기관을 선정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이후 기업은 AI 모델이 바뀌거나 새로운 데이터가 쌓이더라도 현지에서 자체적으로 모델을 학습시킬 수 있도록 필요한 기술을 전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현지 의료인력에 대한 교육 또한 중요하다. 자궁경부암 검진용 AI 기기를 해외에 공급해 온 NTL헬스케어의 변재학 부대표는 “현지 간호사나 조산사가 퇴직하면서 기기 사용법과 관련 지식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며 “제품을 공급한 이후에도 지속적인 교육과 지식 공유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의료 AI를 각국의 의료환경에 맞게 검증하고 관리할 수 있는 인허가 체계도 과제로 꼽혔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의료기기 규제 업무를 담당했던 이충근 분당서울대학교병원 교수는 현지 환자 데이터가 부족한 중저소득국에서는 일정 수준의 성능을 확인한 AI를 먼저 도입하고, 이후에도 모델을 개선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교수는 “모델이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리다 보면 환자에게 적시에 좋은 모델이 제공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의료 AI 규제 지침 가운데 기술의 위험성을 평가하는 공통 원칙은 국제사회와 공유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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