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생명 구하고 보건 격차 줄이려면”…게이츠재단, 저소득국 위한 협력 강조

2026 세계 바이오 서밋서 AI 기반 보건의료 혁신 논의

“핵심은 AI 자체가 아니라, AI를 활용해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더 나은 보건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브래드 타이텔 게이츠재단 글로벌 보건혁신 애드보커시 부국장은 22일 서울 코엑스마곡에서 열린 ‘생명을 구하고 격차를 좁히다: 중저소득국을 위한 공평한 AI 기반 보건시장 구축’ 포럼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AI 기술이 보건의료 분야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지만, 그 혜택이 저소득국까지 도달하려면 지속적인 투자와 국제사회의 협력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포럼은 보건복지부와 세계보건기구(WHO)가 21~22일 공동 개최한 ‘2026 세계 바이오 서밋’의 부대행사로, 게이츠재단이 주최했다. 세계백신면역연합(Gavi), 글로벌펀드(The Global Fund), 감염병혁신연합(CEPI), 국내 백신 제조기업 유바이오로직스 등이 참여해 감염병 대응과 백신 개발·생산, 의료서비스 제공 과정에서 AI의 활용 가능성을 살펴보고, 저소득국의 기술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 감염병 분석 3~4일에서 12분으로…백신 개발·생산에도 AI 활용

이날 포럼에서는 AI가 실제 보건의료 현장의 업무 효율을 높이고 있는 사례들이 소개됐다. 감염병 정보 분석부터 질병 진단, 백신 수요 예측과 생산에 이르기까지 활용 범위도 다양했다.

감염병혁신연합(CEPI)은 콩고민주공화국의 에볼라 대응 과정에서 AI 기업 앤트로픽과 협력한 사례를 소개했다. 양측은 보건당국과 국제기구가 감염병 관련 정보를 분석하고 공유할 수 있는 AI 기반 작업 공간을 마련했다. 이를 통해 기존 3~4일이 걸리던 상황보고서 작성 시간을 약 12분으로 단축했다. AI를 활용해 백신 연구개발 투자 신청서 140여 건을 검토하면서 투자 의사결정 과정도 앞당겼다.

영상 메시지로 참여한 다이앤 스튜어트 글로벌펀드 대외협력·커뮤니케이션 부국장은 AI를 활용한 결핵 진단과 의료정보 처리 사례를 공유했다. 잠비아와 베트남 등에서는 AI가 흉부 엑스레이 영상을 약 5초 만에 분석해 결핵 진단을 돕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보건의료 시스템 간 정보 추출에 걸리는 시간을 최대 120시간에서 2시간으로 줄였다.

AI를 통해 백신이 필요한 지역을 사전에 파악하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Gavi는 현재 예방접종률과 각국 정부의 통계자료 등을 바탕으로 백신 수요를 추정하고 있다. 다만 급속한 도시화와 인구 이동으로 새롭게 발생하는 면역 공백까지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마사오 타카하시 Gavi 신규 투자 총괄은 AI가 이러한 한계를 보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인구구조와 이동, 기후변화 등의 데이터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면 백신을 한 번도 접종하지 못한 ‘제로도즈(Zero-dose) 아동’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을 예측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 백신 제조기업 유바이오로직스도 백신 개발에 컴퓨터 분석 도구를 활용하고 있다. 니파바이러스 백신 개발 과정에서 단백질 생산 효율이 높은 항원 설계안을 확보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생산설비의 고장 징후를 미리 파악하거나 백신 생산량과 원자재 발주 시점을 결정하는 데 AI를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 AI 기술 개발만으로는 부족…저소득국 보급 위한 조건은

AI를 활용한 보건의료 혁신이 현실화되고 있지만, 기술 발전이 곧바로 의료 격차 해소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날 참석자들은 AI 기술을 개발하는 것만큼이나 저소득국에서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빌 게이츠 게이츠재단 이사장도 지난 9월 발표한 ‘골키퍼스 보고서(Goalkeepers Report)’에서 AI가 강력한 평등화 도구가 될 수도 있지만, 기존의 격차를 더욱 확대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게이츠재단은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지난 9월 AI 기술과 관련 서비스에 대한 공평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향후 2년간 최소 10억 달러(약 1조3000억 원)를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가운데 약 40%를 보건의료 분야에 배정해 질병 진단과 의료진의 임상 의사결정 지원, 산모·신생아 의료, 신약·백신 개발 등에 활용할 계획이다.

현장에서는 AI의 예측 결과가 실제 백신 생산과 공급으로 이어지기 위한 조건도 논의됐다. 권태균 유바이오로직스 해외영업팀 선임은 경구용 콜레라 백신을 사례로 들었다. 콜레라 백신은 감염병 발생 여부에 따라 수요 변동이 커 제조기업이 생산시설 투자에 나서기 쉽지 않다. AI가 향후 수요를 예측하더라도 실제 구매가 보장되지 않으면 기업이 생산능력을 확대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권 선임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해에 걸친 최소 구매 물량 보장과 생산시설 투자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유바이오로직스 역시 구매 물량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게이츠재단의 지원을 통해 투자 위험을 낮추고 백신 생산능력을 확대한 경험이 있다.

Gavi도 AI의 예측을 실제 백신 공급으로 연결하려면 기관 간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타카하시 총괄은 “신뢰와 책임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며 각국 정부가 단순히 데이터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측 모델 개발에 참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국제기구와 제조기업 역시 정보를 공유하고 구매·생산 과정에서 역할을 분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소득국이 AI 의료기술의 단순한 도입 대상이 아니라 개발과 의사결정의 주체가 돼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좌장을 맡은 타이텔 부국장은 AI 의료기술의 현지 보급 방안에 대해 “AI 도구는 현지 상황과 의견을 반영해 실제 사용할 사람들과 함께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새로운 국제기구를 설립하기보다는 기존 기관을 활용해 각국 정부의 기술 도입을 지원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 사례로 르완다·세네갈·나이지리아 등에서 현지에 필요한 AI 기술과 도입 조건을 검토하는 ‘스케일링 허브(Scaling Hubs)’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각국의 보건의료 환경과 수요를 고려해 적합한 기술을 선정하고 실제 도입으로 연결하는 방식이다.

매츠 올센 CEPI 사업개발부장은 저소득국이 AI 개발에 필요한 데이터를 제공하고도 정작 기술의 혜택에서는 소외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저소득국은 개발 초기부터 의사결정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CEPI는 이를 위해 데이터를 국외로 이전하지 않고 현지에 보관한 상태에서 AI로 분석하는 방식을 추진하고 있다. 아울러 감염병 대비 AI 플랫폼을 활용해 개발한 백신이 저소득국에도 적정한 가격으로 공급되도록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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