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지가 필요한 이유는 특정한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특정한 상황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2023년, 미국 시빅테크 단체 ‘코드 포 아메리카(Code for America)’에서 데이터 과학자로 일하면서 ‘우리에게는 다른 데이터가 필요하다’는 책을 썼다. 이듬해 학계로 돌아와 2025년 1월부터 노스캐롤라이나대 채플힐(UNC-Chapel Hill) 정책학과 교수로 부임한다.
이 책은 미국 대학 교수로서의 연구 실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학술 도서가 아닌 대중서이고,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썼기 때문이다. 더구나 돈을 벌기 위해 쓴 책도 아니다. 오히려 집필 과정에서 ‘급속 노화’를 경험했다.
책 출간으로 필자가 개인적으로 얻은 것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펜을 든 이유는 사회적 의미 때문이다. 이 책은 공익 목적의 데이터 과학을 한국에 처음 소개한 한국어판 저서다. 나아가 복지가 필요한 이유가 ‘사람이 문제여서가 아니라 상황이 문제이기 때문’임을, 그리고 데이터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경험을 ‘보이게’ 만드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한다.
◇ 가난은 ‘보이지 않는 문제’다
가난은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필자가 10년 넘게 살아온 샌프란시스코 항만 지역을 찾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란다. 거리에 노숙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시(市) 통계에 따르면 노숙자는 2005년 5404명에서 2015년 7008명으로 늘었고, 지금은 8323명에 이른다. 거리에서 사는 삶은 위험하다. 그래서 이들은 자연스레 모여 ‘노숙자촌’을 이룬다. 한국에서 온 방문객들이 이런 지역 근처 호텔에 묵었다가 뜻밖에 노숙자촌을 마주하고 당황하는 경우도 있다.
노숙자의 모습은 미국이라는 강대국, 그러나 불완전한 선진국이 안고 있는 빈곤의 한 단면일 뿐이다. 인구 약 90만 명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식사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가정은 전체의 10%, 약 9만 명에 이른다. 노숙자는 전체 인구의 1%에도 못 미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빈곤’ 속에서 살아간다. 미국 전체로 보면 3억4000만 명 중 5000만 명 이상이 여전히 가난이라는 사회적 위기 안에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경험 역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미국의 복지제도는 대체로 지원 절차가 까다롭다. 미국 비자를 신청해본 사람이라면 행정 절차가 얼마나 복잡한지 짐작할 것이다. 수많은 서류와 정해진 날짜의 인터뷰, 끝나지 않는 대기 시간. 복지 서비스 신청은 이와 다르지 않다. 비자는 한 번이면 끝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이 절차를 반복해서 겪어야 한다. 미국에서 7000만 명 이상이 이용하는 대표적인 저소득층 의료보험 ‘메디케이드(Medicaid)’는 자동 갱신되지 않는다. 주마다 다르지만, 6개월이나 1년에 한 번씩 재신청해야만 보험이 유지된다.
◇ 복잡한 절차가 만든 ‘보이지 않는 장벽’
미국의 최대 저소득층 지원정책인 보충 영양지원 프로그램(SNAP)은 매달 끼니를 걱정하는 가정에 지원금을 제공한다. 4100만 명이 넘는 미국인이 이 제도의 혜택을 받는다. 재정은 연방정부가 부담하지만, 실제 운영은 주(州)와 지방정부가 맡는다. 그래서 주마다 제도의 이름과 운영 방식이 다르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이를 ‘캘프레시(CalFresh)’라고 부른다.
한때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온라인 신청 페이지에는 소득 관련 질문만 212개에 달했다. 연방정부가 필수로 요구하는 항목은 이름, 주소, 서명뿐인데도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제도의 오남용을 막기 위해서다. 더 많은 정보를 요구하면 허위 신청을 걸러낼 수 있다는 논리다. 취지는 나쁘지 않지만, 문제는 그 비용을 형편이 어려운 신청자들이 떠안아야 한다는 점이다. 복지제도의 절차가 복잡할수록, 정작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들은 탈락하거나 포기한다. SNAP의 평균 이용자는 저소득층의 일하는 어머니다. 생계를 위해 일하면서 아이를 돌보는 사람들이다. 이미 벅찬 이들의 삶을, 정부 문을 두드리는 순간 더 어렵게 만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2014년, 미국의 대표적 시빅테크 단체 ‘코드 포 아메리카(Code for America)’는 복지 신청 절차를 단축하는 디지털 플랫폼 ‘겟캘프레시(GetCalFresh)’를 선보였다. 필자가 담당했던 일 중 하나가 바로 이 사이트의 성능을 디자인과 데이터로 개선하는 작업이었다. 불필요한 질문을 줄이고, 꼭 필요한 항목만 묻도록 디자인을 바꿨다. 복잡한 스크린샷이나 안내문이 필요 없을 만큼 직관적으로 구성했다.
그 결과는 분명했다. 기존에 한 시간 걸리던 온라인 신청 시간이 10분, 즉 6분의 1로 줄었다. 이처럼 복지 서비스를 더 단순하고 접근 가능하게 만드는 일, 그것이 필자가 하는 일이자 앞으로도 계속해나갈 일이다.
◇ 데이터와 디자인이 사회 혁신과 만난다면
복지 서비스를 개선하는 것은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일이다. ‘큰 정부냐, 작은 정부냐’의 논쟁을 넘어, 더 나은 정부를 만드는 것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권은 늘 복지 예산의 크기와 자격 조건을 두고 다툰다. 하지만 그 논쟁 속에서 정작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직접 대변되는 경우는 드물다. 복지 서비스를 실제로 이용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얼마나 많은 벽에 부딪히고, 몇 번이나 포기해야 하는지는 거의 논의되지 않는다. 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한다면, 사회 혁신도, 비용 절감도, 새로운 가치 창출도 기대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보자. 2024년 현재 캘리포니아의 인구는 약 4000만 명이다. 이 가운데 SNAP에 지원할 수 있는 저소득층은 500만 명이 넘는다. 이들이 1년에 한 번씩 신청서를 낸다고 가정하자. 신청 절차를 단순화해 한 사람당 50분만 절약할 수 있다면, 그 가치가 얼마나 될까. 캘리포니아의 최저시급 16달러를 적용하면, 50분은 약 13.3달러의 가치를 갖는다. 작은 금액처럼 보이지만 500만 명이 모이면 총액은 67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960억 원이다. 행정 절차를 간소화하고 서비스 접근성을 높이는 것만으로도, 그만큼의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가난한 사람 한 명 한 명의 문제는 작아 보일 수 있지만, 그 총합은 결코 작지 않다.
복지 혜택의 오남용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흔히 “받지 말아야 할 사람이 받는 것(false positive)”을 우려한다. 과거 종이 쿠폰으로 운영되던 시절에는 그런 사례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이 제도를 한때 ‘푸드 스탬프(food stamp)’라고 불렀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 이후 SNAP은 체크카드 형태의 EBT(전자 혜택 카드) 방식으로 바뀌었다. 2017년 기준, 이런 오남용 사례는 전체 이용자의 1.5%에도 미치지 않는다. 반면 혜택을 받아야 할 사람이 제도를 몰라서, 혹은 절차가 너무 복잡해 포기하는 경우(false negative)는 여전히 20%에 가깝다. 즉, 복지의 진짜 문제는 ‘과잉 지원’이 아니라 ‘지원 포기’다.
◇ 복지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책임이다
필자는 지금 미국의 대학 교수이자 데이터 과학자다. 아내는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다. 그러나 우리도 처음 미국에 정착했을 때는 가난한 유학생이었다. 세계에서 물가가 가장 비싼 지역 중 하나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복지 서비스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아이를 낳지도, 키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제 그 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 됐다. 그동안 나는 뉴욕,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뉴멕시코, 매사추세츠 주 정부와 함께 복지 서비스 개선을 연구하고, 데이터로 제도를 고치는 일을 해왔다. 직업은 데이터 과학자에서 교수로 바뀌었지만, 내 사명은 달라지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가난’을 ‘보이게 만드는 일’—그것이 나의 직업이자 인생의 주제다.
나는 내가 돕는 사람들을 데이터 포인트가 아닌 한 사람으로 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그들의 처지였다. 가난이 남긴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월세를 내지 못해 쫓겨날까 두려워했던 순간, 식비를 감당하지 못해 마트에서 유통기한 임박 식품을 나눠받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정부에 손을 내밀며 느꼈던 부끄러움, 그 과정에서 받은 상처, 그리고 그 속에서도 만났던 시민단체 활동가, 공무원, 의사와 간호사들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이제 나는 복지 서비스를 설계하고 개선하는 입장에 서 있지만, 늘 기억한다. 누구나, 한때의 나처럼, 지금의 그들처럼 될 수 있다.
복지가 필요한 이유는 언제나 같다.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상황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진화론을 창시한 찰스 다윈은 가난을 생물학적 결핍이 아닌 사회적 조건의 산물로 보았다. 그리고 그 구조를 고치는 일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 공동체의 책임이다. 그는 ‘비글호 항해기'(1839)에서 이렇게 썼다. “만일 가난한 이들의 비참함이 자연 법칙의 결과가 아니라 사회 제도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실로 큰 죄악이다.”
김재연 미국의 공공 영역 데이터 과학자
필자 소개 학계와 실무를 모두 경험한 미국의 공공 영역 데이터 과학자입니다. 2026년부터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 채플힐(UNC Chapel Hill) 공공 정책학과에서 교수로 가르칩니다. 이전에는 미국의 대표적 시빅 테크 단체인 코드 포 아메리카(Code for America)에서 데이터 과학자로 일하며, 미국 정부와 협력해 가난한 사람들이 복지 서비스를 쉽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이외에도 하버드대, 존스홉킨스대, 미시간대의 공공 리더십, 시민사회, 정책 연구소에서 연구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연구자와 실무자가 함께 모여 데이터를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공익을 위한 데이터 라운드테이블(Data for Good Roundtables)’의 공동 설립자이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