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만든 문화예술 무대, 도시를 바꾸다

대교·GS칼텍스·파라다이스, 예술 무대로 사회적 가치 실험
청년 작가·도시·로컬 협력…기업 사회공헌의 새 길을 열다

“해외의 조형물이 도시의 랜드마크가 되듯, 이제는 한국의 신예들이 ‘K-조형’으로 세계 무대에 나설 차례입니다.”

지난달 26일, 서울 강남 코엑스. ‘제2회 대한민국 사회적 가치 페스타’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한 세션 무대에 오른 대교문화재단 유동찬 차장이 힘주어 말했다. 대교문화재단은 20여 년간 ‘대교국제조형심포지엄’을 통해 신예 작가들의 등용문을 열어왔다.

(왼쪽부터) 박상미 블루버드씨 대표, 김현철 GS칼텍스 예울마루 운영지원팀장. 유동찬 대교문화재단&세계청소년문화재단 차장, 김해래 파라다이스문화재단 부장이 지난달 26일 사회적 가치 페스타의 ‘문화로 말하다 : 기업이 만드는 새로운 가치’ 세션에서 연설 후 질의응답을 진행하고 있다. /김지영 인턴기자

유 차장은 “2000년을 기점으로 조소과가 급격히 줄었다”면서 “조형예술은 큰 작업 공간이 필요한 데다 작품 거래도 활발하지 못하고, 특히 석조·청동조각 강좌는 노동 강도가 높아 대학에서도 폐강되는 추세”라고 창작 환경을 설명했다. 그는 “이들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마련한 무대가 바로 ‘조각대전’이었다”고 설명했다.

2000년 ‘조각대전’으로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2012년 ‘교학상장(敎學相長·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스승과 제자가 함께 성장한다)’의 철학을 담아 심포지엄으로 변모했다. 방식도 독특하다. 참여 작가로 선발된 조형 예술 관련 전공 대학생·대학원생들은 매년 여름 17박 18일간 국내외 작가들과 합숙하며 대형 조각을 제작·전시한다.

학생들의 호응은 뜨겁다. 유 차장은 “한여름에 돌가루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새벽 세네 시까지 작업하는 경우도 많다”면서 “자격 요건이 학생이다 보니 일부러 졸업을 늦추거나 석사 과정에 진학해 참여하려는 이들도 있다”고 전했다.

대교국제조형심포지엄은 지금까지 529명의 작가를 배출했다. 국내외를 통틀어 신예 작가만을 대상으로 하는 유일한 심포지엄이다. 2020년 전시된 작품 ‘파수꾼’은 우수성을 인정받아 문화교류협력 부문 외교부 장관상을 받았다.

◇ 쇠퇴한 공업도시, 문화로 부활하다

스페인의 쇠퇴한 산업 도시 빌바오가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도시 이미지를 바꾼 ‘빌바오 효과’. 문화 시설이 도시 재생과 경제 활성화를 이끄는 현상을 뜻한다. 스페인에 빌바오 효과가 있다면, 한국에는 ‘예울마루 효과’가 있다.

1960년대 정부 주도의 국가산업단지 조성과 항만 인프라로 산업 도시로 성장한 여수. 이곳에 2012년 GS칼텍스재단과 여수시가 함께 만든 복합 아트센터 ‘예울마루’가 문을 열면서 도시는 문화의 옷을 입기 시작했다.

김현철 GS칼텍스재단 예울마루 운영지원팀장은 “여수는 GS칼텍스의 석유화학 전략 거점이었다”면서 “지역사회와의 공존이 중요한 업종이기에, 지역민의 마음을 얻는 것이 중요했다”고 말했다. 또한 “2012년 여수 세계박람회 당시 지역의 문화 인프라 필요성에 부응해 예울마루를 개관했다”고 밝혔다.

GS 칼텍스 예울마루의 모습. /GS 칼텍스 예울마루 홈페이지

2019년 예울마루는 여수의 섬 ‘장도’까지 부지를 넓히며, ‘예술의 섬’으로 불리게 됐다. 이곳에 문을 연 창작스튜디오는 예울마루의 레지던시 사업 거점으로, 작가에게 거주 공간과 경제적 지원을 제공해 창작 활동을 돕는 프로그램이다. 2020년 1기부터 올해 6기까지 총 30명의 작가가 입주해 작업에 전념했다. 장도 창작스튜디오는 시민에게 일정 기간 무료로 개방돼, 관람객이 작업 현장을 직접 보고 작가와 교류할 기회도 제공한다.

예울마루는 매년 수많은 관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지난해만 10만 명이 다녀갔고, 누적 프로그램은 4400회에 달했다. 쇼팽 콩쿠르 한국인 최초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국내에서 촉박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음에도 “예울마루에서만큼은 꼭 공연하고 싶다”며 무대에 올랐다. 지휘자 정명훈, 소프라노 조수미, 소설가 한강 등 세계적 거장들도 이곳을 거쳐갔다.

김현철 예울마루 운영지원팀장은 “남해안에 예술의 전당 같은 문화 인프라를 세우는 것이 최초의 목표였다”며 “이제는 사회적 임팩트를 창출하고 확산하는 것이 새로운 목표”라고 말했다.

더불어 예울마루는 국내 최초의 한센인 회복자 정착촌인 도성마을에 활동 기반을 둔 ‘애양오케스트라’도 지원하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영화 ‘프롬’으로 제작돼 올 하반기 개봉을 앞두고 있다.  

장충동,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하다

“기업이 문화예술에 투자해 사회 변화를 만드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성입니다.”

김해래 파라다이스문화재단 부장이 한 말이다. 재단은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주제로 한 ‘파라다이스 아트랩’을 통해 공모로 선정된 예술가들과 작품을 제작하고, 완성작을 페스티벌에서 선보이는 사업이다. 지금까지 36개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김 부장은 “보통 이런 사업은 제작 혹은 전시만 지원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는 두 가지 사업을 결합했다”라고 설명다.

이 사업은 7년 전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에서 시작해 지난해 장충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 부장은 “장충동은 족발만 유명하지, 골목 풍경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며 “본사가 인근에 있어 그 아름다움을 오래 전부터 체감했고, 이를 시민과 나누고 싶었다”고 말했다.

오는 19일 개막하는 ‘2025 파라다이스 아트랩 페스티벌, 장충’. /파라다이스 블로그

지난해 열린 ‘2024 파라다이스 아트랩 페스티벌, 장충’은 3만 명의 방문객을 모았다. 지역 상권과의 협력으로 꿀건달, 태극당 등 9개 가게가 특별 메뉴와 할인 혜택을 내놨고, 작품 ‘1974 장충동: 문학소녀의 비밀편지’는 70년대 장충동을 배경으로 당대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문학인의 이야기를 AI와 OCR(Optical Character Recognition·이미지 속 문자를 디지털 텍스트로 변환하는 기술) 기술로 복원해 주목받기도 했다.

김 부장은 “족발로만 알려진 장충동 골목에 미디어 파사드(건물 외벽에 LED 조명, 프로젝터, 디스플레이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영상, 이미지, 텍스트 등을 투사하는 대규모 미디어 아트)를 구현하고 체험형 전시 공간을 마련했다”며 “공모 출품작 중 로컬 이야기를 담은 작품에는 가산점을 주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 “한번은 상인회장이 꽈배기를 건네주며 고생한다는 말을 했다”며 “그때 우리의 진심이 주민들에게 전해졌음을 느꼈다”고 했다.

한편, 파라다이스문화재단은 오는 19일 장충동 일대에서 ‘2025 파라다이스 아트랩 페스티벌, 장충’을 개최한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장충동 골목을 무대로 예술의 실험을 이어간다.

김지영 더나은미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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