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전쟁이 에너지 안보 위기 촉발, 글로벌 기후 전환 ‘먹구름’ [글로벌 이슈]

석탄·원전 가동 늘리고 환경 규제 완화 등 각국 긴급 대응 나서
세계 인구 75% 화석연료 순수입국…재생에너지 전환 요구 커져

중동 전쟁이 이어지면서 전 세계 석유와 액화천연가스(LNG)의 약 20%가 지나가는 호르무즈 해협의 에너지 운송에도 차질이 생기고 있다. 여파로 에너지 시장 불안이 커지자 유럽과 아시아 각국은 석탄·원전 가동을 늘리고 환경 규제를 완화하는 등 긴급 대응에 나섰다. 에너지 안보 위기가 기후 전환 정책을 압도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동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에너지 운송이 흔들리면서 국제 유가와 가스 가격이 급등하자 각국 정부가 가격 규제와 보조금 확대 등 대응에 나섰다. 에너지 안보 위기가 기후 전환 정책을 압도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Unsplash

중동 주요 산유국의 생산 차질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따른 해상 운송 불안이 겹치면서 국제 유가는 3월 둘째 주 브렌트유 기준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 103달러까지 치솟았다. 2022년 에너지 위기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유럽 TTF 가스 가격도 하루 새 40% 이상 급등하며 에너지 시장 전반의 불안이 커졌다.

◇ 유가 급등 대응 나선 각국…가격 규제·보조금 총동원

각국 정부는 에너지 가격 상승이 물가 급등과 경기 둔화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가능한 정책 수단을 적극 동원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3월 18일 전 회원국들에 가스 수입 규정의 유연한 적용 방안을 담은 지침을 내놓을 계획이다. 일부 비러시아산 파이프라인 가스와 LNG 화물에 대해 도착 5일 전 원산지 증빙을 요구하는 ‘사전 승인(prior authorisation)’ 규정이 공급 지연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자 이를 보완하려는 조치다.

필리핀 정부는 전기요금 상승 억제를 위해 시장 개입에 나섰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은 최근 유가 급등에 대응해 정부 기관의 주 4일 근무제 도입과 연료·전력 소비 10~20% 감축을 지시했다. 에너지부는 LNG 가격 상승 여파로 다음 달 전기요금이 최대 16% 오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자 민간 전력시장 가격 규제와 인도네시아산 석탄 공급 확대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집트는 연료와 운송비 상승이 빵값 인상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민간 제빵점의 비보조 빵 가격 상한을 설정했다. 말레이시아는 휘발유 보조금을 유지·확대하기로 했다. 브라질과 이탈리아 등에서도 세금이나 보조금 조정을 통한 가격 안정 대책이 거론된다.

에너지 가격이 출렁이자 EU의 가스 수입 규정 완화, 필리핀의 전력시장 개입, 한국의 석유 최고가격제 도입 등 각국 정부가 에너지 가격 급등에 대응하고 있다. /뉴시스

이재명 정부도 유가 급등에 대응해 석유 시장 개입을 강화했다. 정부는 13일부터 석유제품 최고가격제를 도입해 휘발유·경유·등유 가격 상한을 설정했다. 정부가 석유 가격에 상한선을 설정한 것은 1997년 유가 완전자유화 이후 약 30년 만이다.정부는 정유사와 유통업계와 함께 가격 안정 대책을 협의하는 한편 주유소 가격 인상 움직임과 불법 유통에 대한 점검도 강화하고 있다.

◇ 화석연료 의존으로 인한 반복적 위기…”재생에너지 전환해야”

이 같은 대응은 단기적으로 에너지 가격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지만 동시에 기후 정책 추진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에너지 가격 상승이 산업 경쟁력 문제로 직결되면서 일부 환경 규제 완화 요구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EU가 추진 중인 ‘산업 가속화법(Industrial Accelerator Act)’ 초안에서는 당초 논의됐던 철강 배출 라벨 도입 조항이 빠진 것으로 나타났다. 로이터가 검토한 초안에 따르면 해당 라벨은 기업의 행정 부담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로 제외된 것으로 나타났다. 엑손모빌·토탈에너지스 등 주요 석유·가스 기업들도 공급 충격 가능성을 이유로 EU 메탄 배출 규제 시행 연기를 요구하고 있다.

화석연료 의존 구조 자체가 에너지 안보를 오히려 약화시킨다는 분석도 나온다. 글로벌 재생에너지 연합(GRA)은 13일 발표한 ‘재생에너지 행동계획(Renewables Action Plan)’에서 전 세계 인구의 약 75%가 화석연료 순수입국에 살고 있다고 밝혔다. 화석연료 공급이 일부 지역에 집중돼 있어 지정학적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에너지 가격 충격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각국이 가격 규제와 시장 개입 등 에너지 대응에 나서는 가운데 화석연료 의존이 환경 부담을 키우고 에너지 안보 취약성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Unsplash

실제로 파키스탄은 화석연료 수입 의존도를 낮추면서 최근 에너지 가격 급등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았다. 파키스탄은 태양광·풍력·수력·원자력·자국산 석탄 등 국내 전력원을 확대해 전체 전력 생산의 약 74%를 국내 에너지원으로 충당한다. 파키스탄 정부에 따르면 수입 LNG 발전 비중도 약 10% 수준에 그쳐 글로벌 LNG 공급 차질이 전력 생산에 미치는 영향도 제한적이다. 2022년 현물 LNG 확보 실패로 대규모 정전을 겪은 이후 국내 전원 확대 정책을 추진하면서 외부 에너지 가격 충격에 대한 의존도를 낮췄다.

브루스 더글러스 글로벌 재생에너지연합(GRA) 최고경영자는 “재생에너지 전환을 가속하는 것이 장기적인 에너지 안보와 회복력을 위한 가장 빠르고 비용 경쟁력 있는 해법”이라고 말했다. 에너지 안보와 기후 전환을 동시에 달성하려면 재생에너지 확대와 전력망 투자, 에너지 자립 기반 강화가 함께 추진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에너지 위기는 화석연료 의존 구조의 취약성을 다시 드러냈다는 평가가 나온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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