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나은미래 x 아름다운재단 공동기획]
보이지 않는 아이들, 사라지지 않는 권리<3> 미등록 이주아동, 건강권은 어디에
“병원을 못 가니 우울증이 악화됐어요. 스무 살이 되면 추방당할 테니, 그냥 끝내려고 했죠.”
서울에서 태어나 24년째 한국에서 살고 있는 대학생 A(24)씨의 말이다. A씨는 한국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미등록 이주아동’이 됐다. A씨는 어린 시절을 모두 주민번호도, 건강보험도 없이 살아야 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제대로 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 부모의 체류자격이 사라진 순간, 아이의 건강권도 사라졌다
A씨의 부모는 몽골에서 한국으로 이주했다. 두 사람 모두 청각·언어 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몽골에서는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한국에서는 청각장애인도 일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주해 만났고, 결혼해 A씨를 낳았다.
부모는 취업 비자를 받아 입국해 체류 형태에 따라 최대 10년까지 머물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비자 기한이 만료됐고, 가족은 자연스럽게 미등록 체류자가 됐다.
“미등록 외국인이 자진 신고 후 출국하면 범칙금을 면제받을 수 있는 경우도 있었어요. 하지만 한 번 나가면 재입국이 보장되지 않았죠. 어린 자녀였던 저를 남겨둘 수 없었던 부모님은 결국 한국에 남을 수밖에 없었어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던 A씨에게 ‘미등록’ 신분은 아플 때마다 가혹한 현실로 다가왔다. “자주 아팠지만,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제대로 된 병원 진료를 받아본 적이 없어요. 심한 독감도 그냥 집에서 버텨야 했죠.”

국내 출생 외국 국적 아동은 본국 대사관에 90일 이내 출생 등록 후, 출입국사무소에서 외국인 등록을 마쳐야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그러나 본국에서 출생 등록을 거부하거나 지연하는 사례가 빈번해 많은 아이들이 의료 혜택에서 배제된다.
설령 비싼 병원비를 감당할 수 있더라도, 미등록 이주민은 병원 방문을 꺼린다. 출입국관리법 제84조는 공무원이 미등록 이주민을 발견하면 즉시 출입국관리국에 통보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로 인해 미등록 이주아동은 병원 방문 자체를 피하고, 건강권은 더욱 위협받고 있다.
◇ “건강권은 생존권적 기본권”
아름다운재단이 ‘이주와 인권연구소’, ‘사단법인 이주민과 함께’와 발표한 ‘2024 이주민 영유아 건강권 실태조사’에 따르면, 이주배경 아동의 미충족 의료율(필요한 치료나 검사를 받지 못한 비율)은 19.3%로, 한국 아동(2.4%)보다 8배나 높았다. 이들이 치료를 받지 못한 이유는 비용 부담(73.7%)이 가장 컸고, 시간 부족(52.6%)과 의료진과의 의사소통 문제(36.8%)도 주요 원인이었다.
몽골계 이주민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B씨는 심장질환으로 수술이 필요했지만, 건강보험이 없어 1000만 원이 넘는 병원비가 청구됐다. 부모는 보증금 300만 원을 내고, 아버지는 이삿짐센터에서 일하며 나머지 치료비를 마련해야 했다. 베트남 출신 부모를 둔 C씨의 상황도 비슷했다. 생후 13개월 무렵 갑작스러운 열성 경련으로 병원에 실려 갔으나, 입원 치료비가 300만 원을 넘어서면서 부모는 의료비 부담 때문에 결국 아이를 베트남에 있는 조부모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아름다운재단은 2024년부터 ‘미등록 이주민 영유아 의료비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은 7세 이하 이주 배경 아동을 대상으로 의료비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박수진 아름다운재단 공익사업팀 매니저는 “의료비 부담 때문에 병원에 가지 못해 상태가 악화되는 아이들이 너무 많다”며 “건강보험이 없는 이주 배경 아동의 경우, 최대 1억 4000만 원까지 의료비가 발생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는 ‘2019 경기도 미등록 이주아동 건강권 지원을 위한 실태조사’ 보고서를 통해 “국적이나 체류 자격과 관계없이, 미등록 이주아동을 보건의료 시스템 안으로 포함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러나 미등록 이주아동의 건강권 보장은 한국에서 ‘뜨거운 감자’다. OECD 국가 상당수는 건강권을 체류 자격과 분리해 모든 아동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불법체류 문제와 결부되면서 논의 자체가 진전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유엔아동권리협약 이후 선진국들은 아동의 건강권을 ‘생존권적 기본권’으로 규정하며, 미등록 체류 아동에게도 국민과 유사한 수준의 의료 지원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유럽 24개국 중 절반이 미등록 이주민의 자녀에게 별도의 절차 없이 출생증명을 제공해 의료 혜택을 보장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스페인은 1986년 제정된 건강 관련법에서 “스페인에 거주하는 모든 국민과 외국인은 건강과 보험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고 명시해, 미등록 이주민도 의료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규정했다.
해외에서는 미등록 이주아동에게도 의료권을 보장하는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해법 마련이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이들에 대한 한국 사회의 대응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조유현 더나은미래 기자
※ 다음 기사에서는 ‘한시적 체류’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미래를 조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