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과 사회의 공존법<4> 러쉬
[인터뷰] 박원정 러쉬코리아 에틱스(Ethics) 디렉터
“지속가능성만으론 부족합니다. 빌린 돈에 이자를 더해 갚듯, 우리가 자연에서 얻은 만큼 돌려주는 걸 넘어 망가지고 버려진 곳까지 찾아가 환경과 지역사회를 다시 살려야 합니다.”
지난 20일, 러쉬코리아 본사에서 만난 박원정 러쉬코리아 에틱스 디렉터는 러쉬의 경영 철학을 이렇게 설명했다. 러쉬는 화장품 기업이지만, 독특한 환경 캠페인과 윤리적 원재료 구매로 유명하다. 지난해 6월 부산에서 열린 ‘고 네이키드(Go Naked)’ 캠페인은 직원들이 상의를 벗고 광안리 해변을 행진하며 플라스틱과 과도한 포장 사용 중단을 외쳐 화제가 됐다. 러쉬코리아가 벌이는 캠페인은 제품 판매 이전, 원재료를 구매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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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장 없애고 원재료에 투자”…러쉬가 말하는 ‘재생’의 가치
러쉬의 친환경 철학은 ‘지속가능성’을 넘어 ‘재생(Regeneration)’에 있다. 브라질너트 구매 과정이 대표적 사례다. 러쉬는 페루의 브라질너트 산지를 찾아 대형 자본에 의해 훼손된 환경을 복구하고, 재생농법을 현지 농부들에게 교육했다. 제초제 사용 없이 자연과 공존하며 브라질너트를 재배하도록 도왔다. 수확 또한 지역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재규어가 잠든 틈을 이용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농부의 경제적 자립을 돕고, 환경 회복에도 기여했다.
국내에서도 윤리적 구매는 이어진다. 현재 러쉬코리아는 경기도 연천의 팥, 충북 음성의 두부를 구매해 마스크팩을 만드는 ‘로컬 바잉’을 진행한다. 특히 농장에 대한 엄격한 가이드라인을 두어 이주노동자와 여성 인권 침해 여부, 유기농 재배 여부까지 점검한다.
러쉬는 샴푸바, 입욕제 같은 제품의 66%를 포장 없이 판매한다. 나머지 제품들은 모두 재활용 플라스틱 용기를 쓴다. 특히 검은색과 흰색 용기는 고객이 다 사용한 뒤 매장에 가져오면 할인이나 새 제품을 주는 용기 회수 캠페인 ‘브링잇백(Bring It Back)’을 진행한다. 2023년 러쉬코리아가 이렇게 수거한 용기만 21만8948개, 전체 판매량의 20%에 달한다.
이렇게 철저한 환경 정책을 지킬 수 있는 배경엔 러쉬만의 독특한 경영원칙이 있다. 박 디렉터는 “광고나 스타 마케팅을 하지 않고 절약한 비용을 공정무역 원재료 구매와 재생 플라스틱 사용에 투자한다”며 “제품 가치는 마케팅 대신 매장 안팎의 캠페인을 통해 소비자에게 직접 전달한다는 것이 러쉬의 철학”이라고 말했다.
◇ SNS까지 끊어버린 러쉬…소비자·직원 함께 뛰는 이유는?
러쉬의 캠페인은 제품 홍보를 뛰어넘는다. 대표적인 것이 ‘동물실험 반대 캠페인’이다. 러쉬코리아는 2013년부터 매장마다 ‘동물실험 반대(Fighting Animal Testing)’ 서명 존을 설치해 소비자 의견을 모아 국회에 전달했다. 2021년부터는 ‘동물대체시험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명 운동을 벌여, 지난해까지 6만6000명 넘는 시민의 서명을 모았다. 이를 바탕으로 22대 국회에선 남인순·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
SNS를 과감히 끊어버린 ‘디지털 디톡스 캠페인’도 눈길을 끈다. 2020년 러쉬코리아가 세계 정신건강의 날(10월 10일)에 하루 동안 SNS를 끊는 캠페인을 시작하자, 이듬해에는 전 세계 48개국으로 퍼져나갔다. 결국 2021년 러쉬는 블랙프라이데이를 맞아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틱톡, 왓츠앱, 스냅챗 계정 운영을 전면 중단했다. 현재까지도 러쉬 본사와 러쉬코리아 모두 해당 SNS를 활용하지 않는다. 박 디렉터는 “처음엔 내부에서도 반대가 많았지만, 오히려 더 큰 주목을 받았다”고 말했다.
러쉬 캠페인의 또 다른 축은 직원 참여형 캠페인이다. 매년 1월이면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비건 생활에 도전해 단체 채팅방에 인증샷을 올린다. 2024년에는 32명이 비건 도전에 성공해 물 약 11만리터를 아끼고, 이산화탄소도 237㎏ 줄였다. 7월엔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는 도전에도 나선다. 박 디렉터는 “직원들이 캠페인에 참여할수록 러쉬의 가치를 깊이 이해하고, 직장 만족도도 올라간다”며 “실제로 직원 설문조사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1위로 캠페인 참여가 꼽혔다”고 말했다.
올해는 특별히 전사 차원에서 러쉬의 철학을 공유하는 자리도 만들어졌다. 지난달, 서울 성수에서 러쉬의 역사와 이념을 되짚는 ‘리마인드 로드쇼’를 열었다. 전체 5층짜리 건물을 빌려 매장 직원과 본사 임직원들이 함께 러쉬 제품의 제작 과정과 브랜드가 추구하는 메시지를 직접 체험했다. 이번 행사에는 러쉬의 공동창업자 로웨나 버드도 참석해 그 의미를 더했다.
박 디렉터는 “전국 74개 매장이 각각의 특성을 살린 캠페인을 직접 기획하고 이끌 수 있게 하는 게 중장기적 목표”라고 밝혔다. 그는 “한 번이라도 플로깅(조깅하며 쓰레기를 줍는 활동)에 참여한 사람은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게 된다”며 “매장 직원들이 직접 캠페인을 기획·실행하는 ‘윤리팀(에틱스팀)’ 역할을 맡고, 이 성과를 회사의 고과평가에까지 반영해 캠페인이 더 인정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각 지역의 러쉬 매장이 환경, 인권, 동물권을 지키는 캠페인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길 기대한다”며 유쾌한 상상을 더했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